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2012.12.21

 

 

  많은 것들은 지나가고, 아주 적은 것들만 남는다. 이 말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어른들이 보기에 나는 아직 새파랗겠지만 어느덧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를 읊조릴 대열에 합류할 때가 가까워졌다. ‘즈음’이란 자신이 의존하는 명사의 앞뒤로 어떤 기간의 여백을 의미하는 것이니, 어쩌면 나는 이미 합류했는지도 모르겠다.


  연말이니까 시쳇말로 ‘센치’한 마음이 되어 서재 이곳저곳을 바라보면 유독 나를 붙잡아두는 책들이 있다. 몇 권 안 된다. 아주 적은 것들만 남는다고 했으니까. 하나씩 꺼내 옛 손자국들, 틈에 껴 있던 머리카락, 뭘 먹으며 읽었는지 군데군데 번져 있는 연한 붉은 자국들을 본다. 손 많이 탄 꾀죄죄한 책들. 읽는다는 것에 대한 동경. 그런 것들. 그런 것들이 진정으로 소중한 것이리라, 생각한다.


  최근 읽고 있는 책들 중에서도 5년, 10년, 20년이 지난 어느 날들에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각각 있을 것이다. 그 나이나, 그 무렵의 생각에 맞는 책이 오래 간다고 하니, 몇 권 짐작되긴 한다. 5년으로 끊어봤을 때, 내가 책과 함께 한 시간이라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5년은 고등학생 무렵부터 군입대 전까지이다. 그 때는 ‘글’이라면 거의 환장을 했을 때이다. 그 5년에 있어 나에게 가장 기억되는 책을 꼽으라고 하면, 나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를 꺼내 보여줄 것이다.

 

 

*   *   *

 

 

  어린 마음으로 처음 접한 『좀머 씨 이야기』는 나에게 세 가지로 기억된다. 하나는 ‘장 자크 상페’. 나는 지난 해 동생과 함께 ‘장 자크 상페’전에 다녀왔다. 나와 동생은 지독히도 상페를 사랑한다. 고등학생 시절, 나는 당시 교과서에 문학 소년으로 등장했던 ‘만득이’를 별명으로 얻었고, 몇몇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과 함께 글에 대해 막연한 생각을 나누기도 했다. 그 중 한 여학생이 나와 공유했던 키워드가 바로 ‘파트리크 쥐스킨트’와 ‘장 자크 상페’였다. 인생에 대한 심각한 토론을 기대하긴 물론 어려웠으나, 그 무렵이란 막연함이 막연함을 위로하던 때였으니, 우리는 『좀머 씨 이야기』로부터 실로 큰 위안을 받았다.


  다른 두 가지는 모두 이 ‘위안’과 관련된 것이다. 그 중 첫 번째 위안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는 좀머 씨의 외침이었다. 적어도 자신의 상황에 대한 일말의 회의나 ‘밀폐감’ 같은 것을 느껴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누구라도 들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대개는 부모나 가족, 혹은 알 수 없는 저 사회에게 던지고자 하는 마음으로 좀머 씨의 외침을 내뱉고 싶을 것이다. 우리는 그 원인을 모른다. 인간이 본래 그런 존재인지, 아니면 사회의 특성이 그런 것인지, 여러 면에서 생각해볼 수 있겠지만 저 ‘인문적 외침’은 그래서 원인을 알 수 없는 증상이 된다. 때문에 우린 대개 저런 질문을 잊거나, 하지 않는다. 힘들다고 하면서도 저마다 잘 살 것이라고 믿으니까 말이다.


  처음에 나와 그녀는 좀머 씨의 외침이 파트리크 쥐스킨트 자신의 상황을 대변하는 것이라는데 동의했다. 책날개에도 그렇게 적혀 있었고, 해설에도 그런 말이 있었으니, 정확하진 않으나 둘 중 한 명이 그걸 보고, 아니면 둘 다 그걸 보고 그냥 뭔가 알아냈다는 정도로 나눈 토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저 말이 내가 하고 싶은 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냥 누구에게나. ‘exit’이라는 단어를 찾아 필사적으로 뛰던 때였다. 그것이 ‘exist’에 대한 심각한 고민이었음은 두말할 나위 없다.


  두 번째 위안은 쥐스킨트가 작품 이곳저곳에 심어 놓은 위트와 유년의 기억이었다. 카롤리나 퀵켈만과의 어린 사랑 - 마음에 드는 여자 친구를 위해 뭔가 한참 준비하고 밤새 뒤척였으나 정작 그녀가 바빠 나의 모든 준비가 공으로 돌아갔을 때의 그 느낌이란! - 이야기, 자전거를 처음 타게 된 이야기, ‘미세스 풍켈’에게 피아노를 배웠던 그 ‘코딱지’ 이야기, 그리고 자신이 죽으면 주변 사람들이, 심지어는 카롤리나 퀵켈만까지 애도할 것이라는 헛된 ‘자살’에 대한 생각,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이후의 이야기. 나는 소설의 ‘나’와 연결될 수 있는 나의 경험이라면 모조리 떠올려가면서 반추해보곤 했다. 10년은 더 된 옛날의 독일에서 한 괴짜 작가가 쓴 유년의 기억이 나의 것과 닮았다는 것에도 새삼 놀라면서.

 

  고등학생이면, 사실 좀머 씨의 행동과 이후 행방에 대해서 내가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는 나이는 아니었다. 하나의 로맨티시즘이라 여길 법도 했고, 그건 생각이 부족한 사람들이 으레 문학의 결론에 가져다붙이는 그런 꼬리표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좀머 씨’라는 사람에 처음으로 집중하게 된 건, 아마 제대 후였을 것이다. 소설 『향수』가 영화화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을 때, 나는 옛 기억을 떠올리며 그것을 다시 읽었는데 그 참에 『좀머 씨 이야기』도 꺼내든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군가를 정의내리길 좋아한다. 적어도 그/그녀에 대해 파악했다고 믿어야만 타인과의 안정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고, 그것이 정상인 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때론 너무 안이하다는 것이 문제다. 소설에 등장하는 마을 사람들도 마음대로 좀머 씨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와 경마장에 다녀올 때, 갑작스레 우박이 섞인 큰 비가 내린다. 둘은 차 안에서 현기증 나는 바깥을 바라보며 부디 차 지붕이 부서지지 않기를 바란다. 바로 그 때, 도로 위에 좀머 씨가 있었다. 그는 굳이 태워주겠다며 “이러다 죽겠어요!”라고 외치는 아버지에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라고 소리친다. 이를 두고 아버지는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 날 가족들의 대화에서는 ‘밀폐 공포증’이라는 어려운 말까지 나온다.


  ‘나’는 잠자리에 들어 그 광경과 ‘밀폐 공포증’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다 뒤척인다. 나는 좀머 씨에 대한 가장 훌륭한, 하지만 가장 비극적인 묘사를 그 뒤척임 속에서 찾아냈다.


  “생각해보면 그것은 빗속에 있으면서도 호수의 물을 다 들이킬 수 있을 것 같은 갈증을 느끼는 표정 같기도 했다.”


  나는 그 어떤 것보다도 저 ‘갈증’이라는 단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갈증’은 보통 ‘욕망’이라는 단어와 자주 어울린다. 좋은 의미로는 열렬한 추구의 모습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결핍의 상황을 뜻할 것이다. 다시 읽은 좀머 씨에서 나는 저 둘이 고통스러운 형상으로 뒤틀려 있는 모습을 봤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자살하려고 마음을 먹은 ‘나’가 숲에서 그의 기이한 행동을 보고 자살을 포기하며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까짓 코딱지 때문에 자살을 하다니! 그런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했던 내가 불과 몇 분 전에 일생 동안 죽음으로부터 도망치려고 하는 사람을 보지 않았던가!”


  조금 멀리 떨어져서, 어떤 종류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무언가를 미친 듯이 하는, 때문에 다른 일에 대해서는 신경도 안 쓰고, 다른 사람의 말은 듣지도 않는 사람의 모습에는 어딘가 감동스러운 면이 있다. 죽음으로부터의 도망, 갈증, 사위(四圍)에 적이 있는 듯 주변을 살피는 긴장. 사실 좀머 씨의 행동이 유별나게 기이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마음 한 구석으로는 충분히 이해되는 건, 그리하여 우리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걸 알게 된 후 더욱 이 작품에 애착을 갖게 되는 건, 우리도 좀머 씨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라고 말한다면야 굳이 “당신은 좀머 씨에요.”라고까지 우길 건 없는데, 잠시 생각해보자면 장자(莊子)가 말하는 ‘좌치(坐馳)’의 삶을 우리는 좀머 씨와 우리의 모습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좌치’는 참 재미있는 개념이다. 앉아서 내달린다는 거다. 몸은 앉았는데, 마음은 항상 쫓긴다. 그런 삶을 살기에, 그런 삶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서점에 가서 소위 ‘힐링책’을 사들고, 그 1~2만원의 책을 보험처럼 끌어안고 다니는 것을, 우리는 무어라고 설명해야 할까. 그 책은 좀머 씨의 지팡이가 아닐까.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절규하며 이렇게 외치는 사람에게 나는 과연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수 있을까? 과연 나라면 ‘나’처럼 호수로 들어가려는 좀머 씨를 그냥 가만히 보고만 있었을까? 오랜 뒤에 다시 읽은 『좀머 씨 이야기』는 저런 종류의 답할 수 없는 질문을 남겨놨고, 그 어떤 위로나 아름다운 유년의 기억도 상기시키지 않았다.


  역자(譯者)는 “지극히 순수한 동심으로 쓰여진 아름다운 책”이라 했으나, 나는 이 얇은 책을 덮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해야 했다. 나의 외침인 것도 같고, 누군가의 외침인 것도 같고, 우리들의 잃어버린 외침인 것도 같아서였으나, 그것 말고도 좀머 씨가 걸어 들어간 호수처럼 깊은 어떤 곳에 가라앉은 외침이 생각나서 그랬던 것 같다. 그는 죽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가 끝내 살아서 깊은 호수의 밑바닥을 5km나 걸어서 건너갔으면 하고 바라게 된다. 그는 호수 속에서도 외쳤을 것이다. 뱃사공이 그 때 마침 호수 위에 있었다면 그것을 봤을지도. 나는 그의 행방을 계속 수소문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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