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다섯을 특별한 이유없이 떠올릴 일이 있을까. 돌이켜보면 시인 랭보가 스물 셋이 어쩌구 저쩌구 한것으로 그 시절을 뒤돌아보았고, 김광석이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다는 서른을 뒤돌아본 적은 있다. 아, 그러고 보니 스물 다섯도 김경미의 비망록 이라는 시 속에서 발견하고는 잠시 뒤돌아본 기억이 난다. 오늘 이 글은 랭보도, 광석이 형님도, 김경미도 아닌 파란여우님의 스물 다섯이란 페이퍼를 보고 문득 생각나서 끄적인다.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 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
서였습니다. 아무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내 나이 스물 다섯에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3학년에 복학한 복학생이었다. 아직도 벗지 못한 촌티에 복학생 특유의 칙칙함까지 골고루 갖춘, 말 그대로 전형적인 복학생의 모습이었으리라 짐작한다. 커다란 가방에는 묵직한 전공서적과 노트들, 다시 읽기 시작한 데미안, 이문열의 삼국지, 거금을 주고 마련한 카시오 공학용 계산기, 첫사랑이 선물해준 여성스런(?) 낡은 헝겁 필통이 있었다. 독쟁이 고개의 곱창골목은 열악한 주머니 사정에 딱 어울렸고 시화전이 주로 열리던 호숫가 벤치는 낮잠의 장소였다. 잠결에 실눈을 뜨고 어느 시 동아리 회원이 쓴 협궤 열차 시를 읽고는 한동안 협궤 열차의 환상에 사로잡혀 고등학교 시절의 습작노트에 달랑 2편의 얼토당토한 시를 쓰고는 접어버렸다.

내 나이 스물 다섯에 새벽 인력 시장을 꽤나 돌아다녔다. 나와 동갑, 군 제대후 다시 대입시를 시작한 친구에게 꿈을 너무 오래 꾸지 말기를 술 취하여 열변 토하며 떠별리고는 미안한 마음 주체하지 못하던 시절, 주말이나 연휴기간은 그 녀석을 따라 노량진역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쪽방에서 칼잠을 자며 새벽마다 인력 시장을 들락거리곤 했다. 아침 커피가 끓고 노가다 이력이 얼굴에 훤히 드러나는 사람들 틈바구니 어색한 소파에 앉아 날이 밝아오는 모양을 지켜보곤 했다. 워커에 군복 바지, 조금이라도 비싼 일터로 가기 위하여 학생 신분을 속이고, 어른들 틈바구니에서 괜히 담배도 줄창 물고 있곤 했다. 일당 오만원을 거머쥐고 돌아오던 버스 안에서 바라본 63빌딩의 낙조, 문득 아름답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던 시절이다. 서울이 아름답다고 느낀 유일한 기억이다.

내 나이 스물 다섯은 첫사랑과 헤어진 이후 두번째로 어느 여인을 만났다. 스물 다섯도 거의 지나갈 무렵, 인턴사원으로 들어간 회사에서 우연찮게 만나서, 짧은 3주간의 기간동안 그런 감정이 싹트고 있었다. 처음 데이트를 한 날, 그녀가 잃어버린 가죽 장갑 한쪽을 찾기 위해 공단내 걸었던 길을 되짚어 걸으며 새벽까지 돌아다니다 감기에 걸렸다. 장갑의 상실과 감기몸살의 열병, 막 뜨기 시작한 녹색지대의 준비없는 이별, 이후 스물 여섯의 가을까지 이어진 만남의 쓰라린 추억의 징후였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스물 다섯에는 그런 이별과 열병에 휩싸이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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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5-07-27 14: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조금만 더..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요, 를 묻고 싶지만 왠지 빛 바랜 흑백 사진같은 이 아릿한 풍경을 덮어야만 할 것 같은 분위기..(아껴뒀다 나중에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물어봐야지) 근데 스물 셋에서 스물 다섯까지, 제게도 정지된 어떤 흔적들은 있는 거 같은데 아직은 그것을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아요.(진지버젼)아, 그나저나 때깔나는 식사는 하셨수?(까불버젼)

2005-07-27 15: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icaru 2005-07-27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이 특별히 슬픈 사연을 읊은 것두 아닌디...
어쩌자구... 슬프구 처연하게 느껴지는지요~

참...글게요~ 부실한 아침 점심 식단 개선은 좀 됐는지유~

플레져 2005-07-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나이 스물 다섯에는 인생을 다시 시작해서, 만약 그걸 고백하자고 들면 그 환희를 표현할 수 없어 쓰다 말 겁니다. 다른 님들의 스물 다섯을 바라보며 자꾸 나의 스물 다섯이 떠올라도 무던히 참아내는 것, 그 이유 때문일거에요. 언젠가 거리에서 잃어버린 장갑 한 짝을 주은 적 있는데... 혹시 제가 주웠으려나요? 캥거루표 검은색 가죽장갑이었는데...ㅎㅎㅎ

갈대 2005-07-27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내년에 스물 다섯, 복학해서 3학년, 같네요^^ 그렇다면 내년에는 로맨스가..

잉크냄새 2005-07-27 1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복돌이님 / 스물 다섯은 장미빛이었다오. 님이 바라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정지된 흔적들은 뭘까요. 전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곧잘 돌아다 봅니다. 지금은 잘 익은 상처에 지나지 않으니까요.
이카루님 / 칙칙한 복학생, 너저분한 노가다꾼, 이별이 예고된 만남...뭐 이런 글들이니 좀 청승스러울 겁니다. 그래도 어쩐데요. 저것이 제 스물 다섯의 빛바랜 흔적들인걸요.ㅎㅎ
플레져님 / 님이 글을 쓰지 못할 정도로 벅차 오르는 환희는 무엇일까요. 어, 그 장갑 제가 주웠더라면 이루어졌을텐데...지금이라도 주쇼...
갈대님 / 스물 다섯, 복학생, 거기다 로맨스... 부디 복학생의 칙칙함만은 없으시길 바랍니다. 요즘 복학생 취급 안하는것 제가 다닐때보다 심한것 같더이다. 복학 축하드려요.

2005-07-27 17: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내가없는 이 안 2005-07-28 02: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칙칙한 복학생, 너저분한 노가다꾼, 이라고 표현하시니 대뜸 떠오르는 군상들이 있는데요, 에잇, 이렇게 얘기하시면 너무 울적해지잖아요. ^^ 스물다섯에 뭐 기분 째질 일이 많던가요? 저도 좀 암울했는데... ^^

잉크냄새 2005-07-28 13: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속삭이신님 / 별 말씀을요. 에브리바디, 모두 기쁨입니다.
이안님 / 대뜸 떠오르는 군상...예전에 말씀하신 지리산 멤버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스물 다섯, 글이 칙칙해고 과거의 일을 회상하다보니 감상적이 되어서 그렇지...저에게는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행복한 시절이었답니다.

파란여우 2005-07-28 17: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님의 기쁨에 제 이름이 나와서 기쁩니다.^^

잉크냄새 2005-07-29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우님 / 저도 기쁩니다. 님으로 인해 스물 다섯을 오랫만에 돌아보았답니다.

미네르바 2005-07-30 1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우님 페이퍼 읽고, 님 페이퍼를 읽고 제 나이 스물 다섯을 떠올려 봤는데...(그 해는 너무나 선명하게 획을 그었던 아픈 일이 있었네요) 아무리 시간이 흘렀어도 그 때는 어둡기만 하네요. 그래도 그리운 시절이더라구요. 칙칙한 복학생... 맞아요. 왜 복학생들은 하나같이 칙칙했는지...^^

잉크냄새 2005-08-08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네르바님 / 여성이 남성보다 과거를 돌아보기에 벅찬 기억이 많은 모양입니다. 전 아무리 아픈 기억이라도 과거는 한낱 추억일 뿐이다 라는 명제하에 곧잘 돌아보고 웃곤 합니다. 복학생 칙칙한것은 숙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