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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꽃을 저녁에 줍다
루쉰 지음, 이욱연 엮고 옮김 / 예문 / 2003년 12월
평점 :
절판
의학의 길을 걷고자 했던 루쉰는 일본 유학시절 중국인이 총살당하는 비참한 한편의 필름을 보고 중국 민중의 삶을 뼈저리게 느낀다. 진정 치유해야하는 것은 인간의 육체가 아닌 정신임을 깨닫고 고행의 길로 들어선다. 우연하게도 남미대륙을 여행하던중 민중속으로 걸어들어간 체 게바라의 삶과 비슷하다. 루쉰이 문학으로서 그 길을 가고자 했다면 체 게바라는 실천적 혁명가로서 그 길을 걸어갔다는 것이다.
시집을 연상시키는 제목과는 달리 그의 글은 과격하고 분노에 차 있다. 현실을 완곡하게 말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무조건적인 직설화법으로 글을 전개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의 글에서는 비유나 은유조차도 시뻘겋게 타오른 불길이고 시퍼렇게 날이선 칼날이다. 1910~1930년대 봉건주의와 서구근대의 이중고에 시달리는 중국 근대사의 정점에 서 있었던 그는 우매한 민중보다는, 낡아빠진 유교사상에 집착하는 지식인과 중국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을 향해 피토하듯 소리친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 페어플레이는 아직 이르다 > 는 부분이다. 그는 이 글에서 물에 빠진 개를 수구세력, 낡은 사고의 지식인에 비유한다. 물에 빠진 개는 다시는 뭍에 발을 올리지 못하도록 과감히 몽둥이로 때리라고 말한다. 혹여 물에서 건진 개가 꼬리를 내리고 개과천선하면 모를까 현실에서 대부분의 개는 다시 짖어될것이니 몽둥이로 패라고 말한다. 낡은 유교사상에서 말하는 관용이라고 것은 위정자를 위한 한낱 명사일뿐 미덕이 아니라 방임일수도 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의 미래는 청년이다. 우리가 꾸어야 하는 꿈은 미래의 꿈이 아니라 현재의 꿈이라고 말하나 그 속에는 칼날같은 역설이 도사리고 있는것은 아닐까. 현재의 각성없이는 청년도, 미래도 없는 것이다. 그는 청년들이 그를 밟고 나아가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물울덩이를 메우는 흙이, 꽃을 위해 썩는 풀이 되고자 한다. 그에게 있어 미래는 꿈이어서는 안된다. 손에 잡히는 사실이어야 한다. 현재의 각성과 변화가 동반되지 않은 미래의 꿈은 현실의 고통을 가중시킬 뿐이다. 그래서 그는 어설픈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지 않고, 바로 우리가 서 있는 현재의 꿈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