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파란여우 > (펌)시인의 나이

연말이다.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해를 맞는 기쁨도 있겠지만, 연말이 더욱 각별한 의미로 다가오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열 아홉, 스물 아홉, 서른 아홉, 마흔 아홉…. 아홉이란 말의 어감에는 왠지 모르게 쓸쓸함이 먼저 묻어난다.

고정희 시인의 유고시집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 중 '사십대'에는 이런 고백들이 절절히 풀어져 있다.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서면
가야 할 길이 멀지 않다는 것을 안다
선택할 끈이 길지 않다는 것도 안다
방황하던 시절이나
지루하던 고비도 눈물겹게 그러안고
인생의 지도를 마감해야 한다…
쭉정이든 알곡이든
제 몸에서 스스로 추수하는 사십대,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
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
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
- 고정희, 사십대 중에서

특히나 여자들이 맞는 아홉 수란 보다 남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이다. 스물 아홉보단 서른 아홉이, 서른 아홉보단 마흔 아홉이. 하지만 여류시인들에게 있어서 스물 아홉에서 서른으로 넘어가는 사이는 다른 아홉보다 자못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듯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라는 노래 가사처럼 멀어져 가는 또 하루를 보내며 떠나간 사랑을 못내 그리워하듯이.

시인 김승희는 자신이 체험한 삼십 대를 '나이 삼십이 넘으니 이제 보이는 것 모두가 재개봉관' 같다며 우울함을 감추지 못한다. 심지어 '사랑도 미움도 번뇌마저도 재개봉관'이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시큰거리는 치통 같은 흰 손수건을 내저으며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하며…
오 행복행복행복한 항복
기쁘다 우리 철판깔았네
- 최승자, '삼십 세' 중에서

최승자 시인은 보다 더 충격적으로 서른 살을 회고한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이 왔다. 그때의 서른은 시큰거리는 치통이었고, 놀라 부릅뜬 흰자위로 애원한 나이였다.

최영미 시인은 자신의 첫 시집 제목을 아예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고 내세운다.

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란 걸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 중에서

시인이 아직 서른이었기 전, 시인은 마찬가지로 서른에 대한 희망보다는 두려움이 앞섰다.

어둠과 취기에 감았던 눈을
밝아오는 빛 속에 떠야 한다는 것이,
그 눈으로
삶의 새로운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이,
그 입술로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나는 두렵다.

어제 너를 내리쳤던 그 손으로
오늘 네 뺨을 어루만지러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
결국 치욕과 사랑은 하나라는 걸
인정해야 하는 것이 두렵기만 하다.

가을비에 낙엽은 길을 재촉해 떠나가지만
그 둔덕, 낙엽 사이로
쑥풀이 한갓 희망처럼 물오르고 있는 걸
하나의 가슴으로
맞고 보내는 아침이 이렇게 눈물겨웁다.

- 나희덕, '나 서른이 되면' 중에서

서른이 되면 눈물 젖은 희망을 말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다던 나희덕 시인은 지금 한국 나이로 서른 아홉이다. 시인은 과연 자신의 마흔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그리고 이제 곧 잊혀질 삼십대는.

김승희, 최승자 시인은 50대 중반을, 최영미 시인은 40대 중반을, 그리고 유안진 시인은 60대 중반을 살아가고 있다. 모두 씨뿌리는 이십대도, 가꾸는 삼십대도 아주 빠르게 흘러, 거두는 사십대 이랑에 들어선 것도 어제의 일, 중년의 산을 훌쩍 넘어가고 있다.

싱싱한 고래 한 마리 내 허리에 살았네
그때 스무 살 나는 푸른 고래였지
서른 살 나는 첼로였다네
적당히 다리를 벌리고 앉아
잘 길든 사내의 등어리를 긁듯이
그렇게 나를 긁으면 안개라고 할까
매캐한 담배 냄새 같은 첼로였다네
마흔 살 땐 장송곡을 틀었을 거야
검은 드레스에 검은 장미도 꽂았을 거야
서양 여자들처럼 언덕을 넘어갔지
이유는 모르겠어
장하고 조금 목이 메었어
쉰 살이 되면 나는 아무 것도 잡을 것이 없어
오히려 가볍겠지
사랑에 못 박히는 것조차
바람결에 맡기고
모든 것이 있는데 무엇인가 반은 없는
쉰 살의 생일파티는 어떻게 할까
기도는 공짜지만 제일 큰 이익을 가져온다 하니
청승맞게 꿇어앉아 기도나 할까
- 문정희, '생일파티' 전문

'쉰 살이 되면'을 읊조리던 시인은 이제 육십줄에 다다라 있다. 서른을 이야기하던 시인은 마흔이, 마흔을 이야기하던 시인은 쉰이, 그리고 쉰을 이야기하던 시인은 어느덧 예순과 일흔을 지나 인생의 황혼을 마주한다. 그러나 고정희 시인의 유고시집 제목처럼,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김으로 아름답게 추억되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한 해가 가고 또 한 해가, 그리고 한 시대가 가고 또 한 시대가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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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04-12-23 1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보다 두살이 많은 입사동기를 놀리느라 <서른즈음에>를 부르던 적이 있었고,

허탈한 내 심정 달래느라 <서른즈음에>를 부르던 적이 있었고,

술 사달라 칭얼거리며 <서른즈음에>를 부르는 후배를 따라 살며시 읊조리던 적이 있었다. 에헤라~~

진주 2004-12-23 2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싸, 서른은 넘겼으렸다!(근데,잉크님은 코를 안 흘렸다고 내가 알고 있는데, 코는 언제까지 흘리고 댕긴겨??)82...

icaru 2004-12-24 0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크 냄새 님이 들려주는 서른 즈음을 들었던 그 동기님은.... 아마...따식..같이 늙어가는 주제에...했겠지요~ ㅋㅋ 님...얄궂습니당^^

잉크냄새 2004-12-2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찬미님 / 그럼요. 코는 초등학교 입학전까지 흘렸죠.^^ 82년에는 안 흘렸답니다.

복순이 언니님 / 제가 서른즈음에는 그 친구가 불러주더군요. 축하한다고! 둘다 얄궂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