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스름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그 소리는 어김없이 마을 전체를 고요한 평온함으로 휩싸고 있었다. 처음 그 소리를 들었을 때, 그리 낯설지 않다고 느낀 것은 심장 언저리에 와 닿는 파형이 기억 속의 어느 지점과 닿아 있기 때문이었다. 길게 꼬리를 끄는 그 소리에 나도 눈을 감고 기억 저편을 더듬어 보곤 했다. 해질녘 짝사랑하던 소녀의 집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소년의 등뒤로 울리던 성당의 종소리, 어두운 밤 길을 잃고 헤매다 찾아 든 산사에 울리던 풍경 소리, 시체 한 구가 온전히 타들어가는 시간을 뒤로하고 울리던 힌두 의식의 어수선함, 기억은 그 소리들 사이를 꿈결처럼 날곤 했다. 소리가 잦아들 무렵 눈을 뜨면 하나 둘 켜지는 등불이 어둠을 조금씩 물아내지만 골목 한 구석에 움크린 소리들은 바람이 불면 그런 기억 한 조각을 또 다시 불려내게 만들곤 했다. 이슬람 의식을 알리는 이 소리는 하루에 다섯번 울리는데 새벽녘 잠이 덜 깬 얼굴로 창을 활짝 열고 심호흡으로 맞아드리던 처음과 하루의 상념을 어둠의 무게로 땅으로 끌고 들어가던 마지막 소리가 가장 정겨웠다. 그 소리가 들리던 시간 만큼은 시간이 정지된 듯한, 오직 나만이 깨어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했는데, 여명이 밝아오는 어스름의 언저리가 만져질 듯 느껴진다든지, 어둠의 장막이 극장의 커튼처럼 살며시 내려앉는다든지 하는 꿈 같은 노곤함에 젖어들곤 했다.

 

 

<팔미라 유적지로 가는 길 >

 

 

시리아를 여행한 후 다시 터키 지중해 연안을 돌아 이스탄불로 올라가려는 여행 계획이 바뀐 것은 아마도 이 곳에서 본 아파미아 때문일 것이다. 팔미라는 워낙 유명한 곳이지만 아파미아는 이곳에 와서 처음 알았다. 지중해 연안의 고대 유적을 직접 보지 못했으나 아파미아를 보는 순간 더  이상 그리스 시대의 유적을 볼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실망이라든지 감탄과 같은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언덕 위에 자리잡은 고대의 폐허 아파미아는 고즈넉했다. 아직 많이 알려지지 않은 듯 북유럽인으로 보이는 중년 부부와 나 이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따스한 햇살은 순백의 유적을 더욱 눈부시게 했으며 초록잎을 흔드는 가벼운 산들 바람은 고대인의 혼백을 다시금 불러내어 봄을 만끽하는 듯 싶었다. 반면, 풀 한 포기 보이지 않는 황무지 한 가운데를 세 시간 가량 질주해야 도착하는 팔미라는 웅장함의 무게만큼이나 황량했다. 유명세를 입증이라도 하듯 카탈루니아 민속 공연단이 민속춤을 추고 있었는데, 춤조차 고대 신을 축복하는 하나의 초라한 의식처럼 보였다. 언덕 위의 아랍성이 희미하게 보일 정도로 휘몰아치는 모래 바람은 사막의 여왕의 신비를 감추려는 듯 팔미라를 휘감고 다시 아랍성문 안으로 빨려들어가곤 했다. 초록 풀빛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은백색의 아파미아는 황토빛 모래 황무지의 거센 바람 속에 오랜 세월 상처 입은 팔미라와는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는데 아파미아가 거울 앞에 앉아 긴 삼단머리를 곱게 빚질하는 아프로디테라면 팔미라는 금방 전투에서 돌아온 듯 붉은 피를 뿌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아레스였다.

 

 

 

<아파미아 유적지>

 

 <팔미라 유적지>

 

시리아를 여행하다 보면 유독 봉고가 많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세르비스라 불리는 이 봉고는 장거리 버스 노선을 제외한 단거리 노선을 주로 운행한다. 도시 안의 교통은 세르비스로 이루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요금을 내는 방식이 의아하기도 하고 정답기도 하다. 세르비스에는 별도의 요금함이 없는데 차에 오른 사람은 자기 앞의 사람에게 돈을 전달하고 마지막으로 운전석 뒤에 등을 맞대고 앉은 손님이 돈을 운전자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시리아에 있는 동안 세르비스에서 거의 요금을 내지 않았는데 요금을 안 내려는 꼼수를 쓴 건 아니었다. 보통 버스 안내양의 역할을 대행하는 손님이 한 눈에 봐도 이방인 티가 훌훌 풍기는 나에게 손사래를 치며 버스비를 내지 못하게 한다든지, 혹은 이미 걷어간 돈을 살핀 운전수가 고개를 돌려 나를 힐끗 쳐다보고는 버스비를 다시 돌려주는 일들이 자주 일어난 것이다. 어떤 날은 그저 싱긋이 웃음으로 화답하며 무임승차를 시도해 보기도 했다. 이 얼마나 화기애애하고 장려할만한 미풍양속인가. 사실 이 즈음에 예멘에서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테러가 발생해 신경이 곤두설 즈음이었지만 세르비스 안에 흐르는 그들의 마음은 그런 불안감을 해소하고도 남을 편안함을 안겨주었다.

 

 

 

<팔미라앞 스페인 카탈루니야 전통 민속춤 공연>

 

이슬람 문화권 사람들이 이방인에게 유독 친절한 것은 이방인 접대를 명예시하는 유목 민족의 피가 면면히 이어져 온 이유이고,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도 이방인 접대를 하나의 커다란 덕목으로 삼음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 한다. 공원이건 유적지건 몇 번의 대화가 오고 가면 그들은 어김없이 집으로 초대하곤 하는데 한 이슬람 영감님을 만난 건 아파미아 유적을 돌아보고 오는 길이었다세르비스를 기다리며 도로 한 켠에 쪼그리고 앉아 사과를 베어 물고 있을 즈음 검은 옷으로 온 몸을 휘둘러 감고 약간은 어색한 선글라스를 낀 영감님이 오토바이를 멈추었다. 숙소가 있는 도시로 돌아가려면 이 곳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역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 곳까지 오토바이를 태워준다는 말을 미끼로 나를 집으로 초대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선 집은 전혀 어색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는데 아마도 집과 마당과 마당 한 켠에 꾸며진 작은 화단이 내 어린 시절 기억 어딘가에 자리잡은 큰 집의 이미지와 비슷한 이유일 것이다. 큰 아들 내외와 작은 아들, , 손녀를 차례로 소개받고 인사를 나눈 후 마당 한 켠에 자리잡은 돌로 만든 식탁에 둘러앉아 늦은 점심을 먹었다. 가부장적 권위인지 식탁이 좁아서인지 알 수는 없으나 여자들은 식탁을 같이 하지 않고 이층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나와 눈길이 마주칠 때마다 수줍은 미소를 띄곤 했다. 어린 손녀만이 영감님 무릎에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이방인이 먹는 모습을 낱낱이 살펴보고 있었다. 히잡을 쓴 중동 여성을 가까이에서 정면 촬영한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영감님이 모든 사진에 낀 것은 영감님 습성이 사진 찍히길 좋아하는 것인지 여성만을 사진 찍히게 할 수 없다는 영감님의 말이 사실인 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크락데 슈발리에성 - 십자군 전쟁 당시 십자군이 점령후 100년이 넘는 세월을 보낸 성. 아쉽게도 론니 플레닛에는 십자군이 100년을 수성한 역사로 표현되나 십자군이 100년을 약탈 점령한 성이란 표현이 명확한 입장이 아닐런지, 어차리 약탈의 역사란 건 다 아는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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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12-04-0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마에는 위에서 언급된 유적지가 하나도 없다.커다란 물레방아가 좀 유명한 도시다. 다만 숙소로 잡고 팔미라, 크락데 슈발리에성, 아파미아 등을 하루 코스로 다니기에 좋은 곳이어서 여장을 풀었다. 좀더 아래 홈즈도 그런 중간 기착지로 괜찮은 곳이다.

Forgettable. 2012-04-09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네요. 안그래도 봄바람 살랑살랑 떠나고 싶어서 흔들거리는데 아주 바람을 불어 주시네요. 그리고 언제나 감동하지만 글 참 좋습니다. 저도 이런 묘사 한 번 해봤으면^^

잉크냄새 2012-04-10 09:23   좋아요 0 | URL
아마 저도 봄바람 살랑살랑 거리는 바람에 오랫만에 여행 이야기를 또 적어본건지도 모르겠네요.
봄은 그런 마력을 지닌것 같습니다. 마음을 붕 띄워서 어디론가 발길을 내딪도록 등 떠미는 그런 마력 말이죠.

못난 글 항상 읽어주시니 감사합니다.

icaru 2012-04-10 11: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들을 보고 있노라니, 잉크냄새님은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 여행을 다녀오신게 아니신가!!!
여성 혼자만 찍히는 사진을 방지코저, 모든 사진의 모델이 되어주신 선글라스 영감님 이야기도 여행지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미네요~

뭐니뭐니해도 마지막 슈발리에 성이 제게는 큰 임팩트를 주는데, 성 아래 광경은 어떤지 몹시 궁금해지네요 ㅎㅎ 더불어 처음으로 근접하여 촬영하였다는 히잡을 쓴 중동 여성의 모습도요 ^^

잉크냄새 2012-04-10 13:32   좋아요 0 | URL
오랫만에 사진 찾아봤더니 영감님이 대머리네요. 히잡쓴 따님들도 햇살을 받아 다 찡그린 표정이네요.ㅎㅎ

크락데 슈발리에성은 과연 저 곳이 함락될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거대하고 잘 보존되어 있더군요. 단순히 요새라기 보다는 그 전쟁이 있기전에는 아름다운 성이었음을 보여주는 복도의 회랑이라든가 암튼 난공불락의 요새안에 또 다른 미적 요소를 감추고 있습니다. 성 아래 풍경 또한 대략 60도의 가파른 경사를 이루고 있습니다. 근처 입구의 마을에서 올라오는 길 또한 좁은 언덕을 통과하기 때문에 접근이 상당히 어려웠을 겁니다.

지금은,,, 그냥 당나귀가 비탈에 위태하게 서서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더군요.

마음을데려가는人 2012-04-1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이 참 아름다워요 +.+
이슬람 의식을 알리는 소리...
저는 인도에서 자다가 그 소리만 들리면 알 수 없는 두려움, 불쾌감 같은 것들이 밀려오곤 했습니다. 고요한 정적을 가르는 그 경건한 소리가 낯설고 무서웠어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을까요?
시간이 지나고 기억도 흐릿해지니 다시 한 번 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잉크냄새 2012-04-10 13:45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에는 그 소리가 낯설었어요. 특히 도심에서 듣는 소리는 더 낯설게 느껴지곤 했답니다. 이슬람 의식의 저 소리가 처음으로 가슴에 와 닿은 것은 사프란볼루에 머물때입니다. 제가 언덕 중간쯤의 3층에 머물렀는데 아침 저녁으로 낮게 깔린 전통 가옥의 지붕들 위로 잦아들던 그 소리가 너무 좋았답니다. 그 후로도 도시보다는 인적 드물고 전통 가옥들이 옹기종기 모인 그런 곳에서의 저 의식을 알리는 소리는 알수없는 편안함을 항상 느끼게 해주었답니다.

風流男兒 2012-04-18 0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오늘도 감탄만 하고 갑니다.
사진만 봐도 가슴이 벅차는데, 실제로 보면 또 어떨까요.
설렘을 안겨주셔서 고맙습니다 ^^

잉크냄새 2012-04-18 13:44   좋아요 0 | URL
여행을 마치고나서 그 여행을 기억하게 해주는 것은 여러가지가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사진만한게 없는것 같아요.
비자와 출입국 도장이 잔뜩 찍힌 여권, 풍경을 하나둘 안고 있는 풍경 사진, 전통 시장 구석구석에서 사 모은 작은 기념품들, 그리고 기억들...
이 모든 것을 가장 잘 떠올리게 하는 것이 한장의 사진 같습니다.

검둥개 2012-04-1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네요. 덕분에 좋은 대리여행했어요 ^^

잉크냄새 2012-04-23 14:16   좋아요 0 | URL
오랫만이네요. 잘 지내시는지요?
저도 지금 사진을 보면 기억여행을 떠나곤 합니다.

차트랑 2012-04-24 1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여행과는 카테고리 자체가 다르군요 ㅠ.ㅠ
저는 겨우 국내를 하루 횅 하니 다녀오는 정도거든요^^
지난 번에 가장 멀리 여행차 간 곳이 울진이었답니다.
국내에서 왔다갔다 하는거죠^

오늘 방문이 처음이지만
눈에 익은 닉네임들도 보입니다.

저의 활동 범위가 제한 적인 것은 여행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알라딘의 이웃들도 마찬가지네요^^

좋은 여행기 잘 읽었습니다.
이렇게되면 또 따라서 가 보고싶어지고 그렇다니까요^^

잉크냄새 2012-04-25 10:4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한국의 직장인 대부분이 그렇게 조금씩 여행하게 되죠. 저도 물론 그랬으니까요. 전 직장을 옮길 즈음에 시간내어 장기 여행길에 올랐답니다. 그때의 이야기를 3년이 지난 지금에야 올리고 있답니다.

종종 인사나누겠습니다.

차트랑 2012-04-26 23:54   좋아요 0 | URL
아...네..고맙습니다.
참 좋은 여행이었겠다 싶습니다.
자주 이곳 저곳을 다니고 싶은데 여의치 못하답니다.
검둥개님의 말씀처럼 이곳 서재에서
'대리여행'을 할까봅니다^^

여건이 되시는대로 소개해주시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평안하세요..

잉크냄새 2012-04-27 11:05   좋아요 0 | URL
허접한 여행이라 대리여행이 될려나 모르겠네요.

글재주가 없는지라 여행기 한편한편 올라오는 간격이 아주 길답니다.^^

차트랑 2012-04-27 20:07   좋아요 0 | URL
어이구, 무슨말씀을요 잉크냄새님,
충분히 대리가 가능합니다!
제가 안가보고도 은근 가본 척 할 수 있는
그런 수준의 페어퍼랍니다^^
그러므로
경험이 그만큼 잘 전달된 좋은 글입니다.
어느 술자리에서
지중해, 이슬람 어쩌구 떠드는 사람있으면
그게 바로 저인줄이나 아세요 쿠더덩~^^

잉크냄새 2012-04-28 16:55   좋아요 0 | URL
그 이야기 소재를 위해서도 부지런히 써봐야 겠네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다음 목적지는 '다마스커스'랍니다.

차트랑 2012-04-28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잉크냄새 2012-05-02 10:09   좋아요 0 | URL
네 ^^

뽈쥐의 독서일기 2012-05-29 16: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진이 넘 멋져요. 특히 창문에 앉아 노래하고 있는 청년 사진이요!

여행에서 좋은 경험을 하셨네요. 부러워요. 저도 겨울나무가 되고 싶어요..^^

잉크냄새 2012-05-30 09:3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창문에서 노래하는 청년은 이 페이퍼가 아니고 다른 도시인데...ㅎㅎ
농담이고요 종종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