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雨 , 봄비를 이름으로 가진 동네 형이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속에 커다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형은 동네 골목대장이었다. 그 형은 5살 위인데 동네에서 내 위로 5살 터울 사이에 몇명이 없어서 어린 시절을 거의 같이 보냈다. 턱과 손등에 커다란 갈색의 점이 아직도 눈에 선한 그가 오늘 문득 떠오른다.
그의 집은 만물상이었다. 창호지 문을 열면 벽위에 위치한 이불대 밑으로 희귀한 물건이 가득했다. 라디오 트랜지스터, 계급장, 우산대로 만든 소총, 우표, 낡아빠진 책, 나비 표본....동심을 잡아끄는 물건들이 산재했다. 우리는 그 방에 모여 후라이팬에 빠다를 발라 메뚜기를 구워먹고 입심이 남달랐던 형의 무용담을 밤새 듣다 잠이들곤 했다. 격렬했던 옆동네와의 언덕배기 고수 전투에 머리를 맞대고 작전을 짜기도 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즐거웠던 시절의 한구석에 그는 사람좋은 웃음으로 항상 남아있다.
그러나 그는 서글펐던 기억으로 더 남는다. 이런 생각을 한것은 물론 그 당시의 일은 아니다. 한참이 지난후의 일이다. 그의 아버지는 동네에서 소문난 주정뱅이였다. 형의 어머니도 술주정과 구타를 피해 어디론가 달아났다. 술에 취한 날은 어김없이 욕설과 구타가 난무했으며 그는 아버지를 피해 언덕으로 급히 도망갔다. 그를 따라 우리도 같이 뛰었던 적도 있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산과 바다를 뛰어다녔다.
어느 눈내린 겨울 아침이었다. 집에 기르던 개가 개집밖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개집안을 살펴보니 형이 개집에서 자고 있었다. 밤새 개를 껴안고 잠이 들었었던 모양이다. 형을 집안으로 불러들인 어머니가 형집에 달려가서 한참을 큰소리로 미친 주정뱅이가 애를 잡으려고 한다고 소리쳤다. 아마 한밤중에 술주정과 구타에 못이겨 도망쳐 찾아들어간 곳이 개집이었던 모양이다. 오들오들 떠는 형을 아랫목에 앉히고 아침을 먹이며 어머니는 " 불쌍한것, 너의 엄마가 도망간 걸 이해해라" 고 말하곤 했다. 그래도 철없던 나는 마냥 즐거웠다. 그와 잠시후면 놀러나간다는 사실만으로도. 지금 생각해도 눈물을 본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 울고 있었을것 같은데...
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디론가 취직을 해서 떠나면서 우리들의 어릴적 추억도 끝이 났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나도 사춘기를 거치고 어른이 되었다. 언젠가 그 형의 결혼소식과 딸아이를 낳았다는 소식도 어렴풋이 들은것 같다. 도망간 형 어머니의 죽음도 전해들었다. " 아~ 형은 이렇게 또 살아가고 있구나" 하며 참 무심하게도 살아왔다. 가을바람속으로 어렴풋한 기억 한조각이 떠오르는 걸 보니 가을인가보다. 올 추석에는 끊어진 소식이나마 다시 알아봐야겠다. 그리고 술 한잔 기울이며 그때 눈물을 흘렀는지 물어봐야겠다. 아마 허허 웃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