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 개정판
조영래 지음 / 돌베개 / 2001년 9월
평점 :
절판


당신께 감사드리고 싶군요. 한가족의 생명을 짊어지고 닭장 같은 방제공장으로 내몰려 청춘의 모든 감정을 철저히 외면당한채 살아온 젊은 여직공들의 삶을 그리도 안쓰럽게 바라본 당신의 마음에 감사드리고 싶군요. 밤새 새벽길을 걸으며 아낀 버스비로 빵 하나를 건네던 당신의 손길이나 말 한마디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었을런지요. 당신이 분신한 후 십년이 지난 후의 일이지만 중학교를 졸업하고 인형공장으로 구두공장으로 먼 길을 떠난 내 누이들의 삶도 그러했을가 싶은 마음에 가슴 한켠이 울컥하더군요. 철없던 시절의 일이라 누이들의 마음 하나 보듬지 못한 어리석은 나를 대신해 그들의 머리를 쓰다듬고 가슴을 어루만진 당신의 손길에 감사드리고 싶군요.

마음이 아팠던 것은 비단 당신의 분신 때문만은 아닐 겁니다. 노동 환경의 부조리로 인하여 인간으로서의 삶에 대한 성찰에 눈뜨기 시작하던 시기의 당신의 마음은 얼마나 순수했던가요. 인간이 희망인 세상을 꿈꾸던 당신의 가슴은 또 얼마나 희망으로 벅차 올랐던가요. 그런 당신의 순수성의 한계를 알기에 서글펐고 결국 삶의 부조리란 인간 자체의 부조리가 아니라 인간이 만든 사회의 억압과 폭력구조라는 사실에 좌절하던 모습이 아직도 가슴 아프게 남아있네요. 어쩌면 당신의 분신은 절망의 마지막 표출이고 항거였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그 절망의 끝자락에 남은 희망을 바라보는 시각을 우리들에게 던져주었죠. 그러나 진정으로 서글픈 것은 당신이 떠난 지 삼십 년이 훌쩍 넘은 이 사회가 그런 절망으로부터 희망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더 폭력적이고 억압적이고 이기적인 사회가 되어간다는 것입니다. 어느 농민의, 노동자의 분신이 단순히 개인의 이기적이고 비겁한 선택으로 비춰지는 시대가 되어버렸다는 겁니다. 당신이 던져준 희망을 이야기하기에 부끄러운 우리가 되어버린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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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08-03-05 1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좀 부끄러워요. 저분이 그렇게 세상을 떠났는데.. 현실은 변한게 하나도 없는 것 같아서요.

파란여우 2008-03-05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제목만 보고 제 얘긴줄 알았어요.
(진지한 리뷰에 펑 폭발하는 댓글)

암흑의 시절, 등불을 밝히신 분들에게 우리는 모두 빚을 지고 살지요.
최소한 지금이라도 의도적 방관자가 되지 않아야 할텐데 말입니다.

잉크냄새 2008-03-06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차장님 /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세태에 대하여 많은 생각을 하게 되더군요.

여우님 / 예전에 제 선배가 숫자로 인간을 분석하는 저의 전공에 치를 떨 날이 올것이라는 말에 지금은 공감하고 삽니다. 그저 살아가는 한 방편이라고 말하기에는 스스로의 일이 참 거시기한때도 많네요.의도적 방관자,수동적 방관자...모두 같은 의미일것 같습니다.

icaru 2008-03-06 0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슴다~~!

2008-03-06 15: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춤추는인생. 2008-03-07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얼마만의 잉작가님표 리뷰래요?^^
한자한자 눌러쓰신듯한, 진한 잉크향이 묻어나는 묵직한 리뷰 고개숙여 잘 읽고갑니다.

털짱 2008-03-09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단은 추천 한방 날리고...
모처럼 잉크냄새님의 리뷰를 읽으니 좋군요.^-^

제가 제 친구 하얀마녀님을 "몇 살 더 어린 잉크냄새님"이라고 소개한 적이 있는데...
잉크냄새님도 제 친구 하얀마녀님을 닮았을 것 같아요.
다른 무엇보다도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이 아주 닮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잉크냄새 2008-03-10 13: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 언제던가 님의 리뷰에서 조영래 선생에 관한 글을 읽은 기억이 나네요. 가물 가물.

속삭님 / 하하, 별말씀을 좋은 음악 잘 듣겠습니다. 내 마음이 빚진 것을 찾아보도록 하지요.

춤인생님 / 요즘은 리뷰 쓰기가 쉽지 않아요. 예전처럼 슥삭슥삭 쓰고 싶은데, 요즘은 스스로에게 어떤 의미를 자꾸 부여하려고 하나봐요.

살청님 / ^^

털짱님 / 오랫만에 복귀하신 하얀마녀님이 친구이시군요. 두분을 생각하니 예전 밤새 릴레이 달리던 댓글이 떠오르네요. 누군가 절 닮았다는 사람, 문득 궁금해집니다.

하얀마녀 2008-03-14 0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힛... 저에겐 칭찬이지만 잉크냄새님껜 별로 아닌 듯...
같은 책을 읽었는데 결과물은 많이 다르네요.
이 리뷰를 읽으니 책을 한 번 더 읽은 느낌입니다.

잉크냄새 2008-03-18 09:00   좋아요 0 | URL
ㅎㅎ 전태일 평전도 오래도록 가슴에 남을 책이라고 생각합니다. 언젠가 님께서 쓰신 짧은 리뷰 읽어보았답니다.

털짱 2008-03-21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얀마녀님(을 감히 제 친구라 했지만, 사실 저보다 연장자세요)과 잉크냄새님의 가장 큰 공통점은 두 분다 알라딘마을사람들이 사랑하는 서재주인이라는 점이겠지요? ^-^

아주 가끔씩 게으르게 들어오지만, 두 분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글들이 참 반갑습니다.
마음에 온돌을 깐 느낌이랄까...ㅋㅋㅋ (에구, 촌스러...)

잉크냄새 2008-03-24 13:08   좋아요 0 | URL
비주류 서재에 그런 찬사를 해주시다니요.
<마음에 온돌을 깐 느낌> 이런 따스한 표현이 또 어디있다고 촌스럽다니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