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아카바는 국경 도시라 자유로운 분위기가 느껴진다. 홍해 반대편 불빛은 이집트의 카바 항구로서 이스라엘로 들어가는 유일한 항구이다>
이집트로 넘어가는 국경도시인 아카바에 도착한 것은 해질녘이었다. 하루만 머물 예정이었으므로 대충 숙소를 잡고 밖으로 나섰다. 국경의 밤은 뭔가 화려했다. 휘황찬란한 화려함이 아닌 자유로운 화려함이랄까. 다른 중동의 도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면서도 뭔가 자유로움이 선사하는 발랄한 분위기가 도시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주류판매점에서 양주를 두 병씩 샀다. 이집트에는 술을 사기 힘들다는 정보(나중에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를 듣고 두 명의 일행과 함께 총 여섯 병을 샀다. 숙소에 도착하니 숙소 주인이 국경을 통과할 수 있는 건 인당 한병이라기에 버릴 수는 없고 3층 베란다에서 각자 한병씩을 마셨다. 동행한 두 명은 세계 여행이 삼년째 접어든 여행 고수 청년과 영국 유학후 육로로 귀국길을 선택한 여대생이었다. 배낭여행 삼개월차인 내가 제일 초보였는데 셋이 합이 잘 맞아 다마스커스부터 이 곳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로 도심의 불이 완전히 꺼질 때가지 자리는 이어졌다.

<숙소 베란다에서 술 마시며 바라본 아랍 거리, 술 문화가 없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차분한 분위기이다>
아카바를 떠나 홍해를 건너 이집트 뉴웨이바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늦잠 때문에 서둘러 떠난 택시에서 바라본 에머랄드빛 바다와 푸르다 못해 멍든 하늘은 형언할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을 부풀어 오르게 했다. 쾌속선을 기다리는 시간 점차 뜨거워지기 시작한 햇살 속에 아직 가지지 않은 숙취가 다시 스멀스멀 올라왔다. 보따리 장수를 연상케하는 수 많은 이집트인들 뒤로 페리에 올라타니 홍해의 푸른 바다가 눈 앞에 펼쳐졌다. 바람도 쐬고 술도 깰 겸 두 팔 벌려 타이타닉의 My heary will go on을 하러 뱃머리로 나가니 운행중 갑판에 있을 수 없다고 객실로 모두를 밀어 넣었다. 갑갑한 객실은 만원이었는데 숙취와 객실 가득 피어오르던 향신료 향에 없던 배멀미도 올라올 지경이었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어보니 어느덧 뉴웨이바에 도착해 있었다. 주섬주섬 배낭을 챙기니 옆에서 빤히 바라보던 이집트인이 새우깡 비슷한 걸 건네주어 먹었는데 향신료 범벅이었다.
뉴웨이바 입국 관리소는 허름한 건물이었다. 외국 여행객이 많지 않아 수속 순서는 금방 찾아왔다. 일행이 먼저 수속을 마치고 뒷자리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비자 발급 심사원 앞에 서서 여권을 건넸다. 여권의 사진을 보고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그가 얼굴을 들어 올렸고 나도 최대한 미소를 짓기 위해 입고리를 올리는 순간 내 속에서 무언가 큰 덩어리가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배낭을 둘러멘 채 손으로 입을 틀어 막고 출입문을 거칠게 발로 걷어차고 달려나갔다. 폼으로 배낭에 매단 스테인레스 커피잔과 호신용 호루라기가 부딪혀 비명 소리보다 날카로운 금속음을 질렀고 "형님, 뛰지 마"라는 일행들의 다급한 외침이 들렸어도 내 눈에는 출입구의 창문을 통해 어두운 복도를 비추던 햇살만이 보였다. 롱테이크 샷을 찍듯 어지러이 흔들리던 햇살이 열리며 드디어 그 햇살 속으로 전속력으로 뛰어들었고 파전 한 조각을 급하게 토해내었다. 숙취와 배멀미와 향신료의 절묘한 콜라보이다. 눈물로 촉촉해진 충혈된 눈을 들어 바라보니 총을 멘 채 뒤따라온 군인이 황당한 표정으로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다른 이유로 놀라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불과 얼마전 고란 고원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 지역이었다.

<이집트 다합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다이빙 포인트이다. 괜히 분위기에 휩쓸려 18m 오픈워터 자격증을 따서 장롱에 처박아 두고 있다>
군인의 호위를 받으며 돌아와 눈물을 훔치며 다시 그 앞에 섰다. 사실 비자 거부 사태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더러운 놈, 니네 나라로 돌아가"라고 말한다면 뭐라 하겠는가. 후회가 밀려왔다. 왜 하필 당신 앞에서인가. 반성하는 의미로 열중 쉬어 자세로 서 있으니 한참을 바라보다 여권에 비자를 붙여주었다. 아, 그는 개인의 자존심보다 국가의 관광 수입을 먼저 생각하는 진정한 애국자였던 것이었다! 왠지 같은 나라 국적임을 밝히기 싫어하는 것 같은 동행들과 다합으로 향했다. 뉴웨이바에서 승합차에 오른 순간부터 다음 날 잠에서 깰 때까지 기억이 없다. 기억이 돌아온 건 다음날 다합의 게스트하우스였다. 악몽을 꾼 듯 시트는 온통 땀으로 젖어 있었다. 여행후 처음 찾아든 몸의 아우성이었는지 단순한 숙취였는지 지독한 배멀미였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내 뇌가 쪽팔림에 스스로를 봉인해버린 모양이었다. 지금 이 순간도 그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는 여전히 암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