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최전선에서 인문학을 만나다
존 브록만 엮음, 안인희 옮김 / 소소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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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급 지식의 거간꾼, 과학계의 큐레이터, 세련된 취향으로 선택된 특별한 과학자들을 자석처럼 끌어당겨 자연스러운 토론장을 이끄는 21세기의 쌀롱 주인 존 브록만.

내가 가장 부러워하는 삶, 직업, 아이디어를 추구하고 성취해온 사람이다.

<우리는 어떻게 과학자가 되었는가>, <앞으로 50년>과 마찬가지로 이 책은 브록만이 주제의 성격에 맞는 과학자들의 글을 엮어낸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Edge라는 사이트에 실린 글들이라고 한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브록만이 개최한 파티에 초대되어 유명인사(과학계의 celebrities)들을 만나 인사 나누고 한두마디 주고받는 경험에 비교할 수 있다.

책 소개에서 부각시킨 제러드 다이아몬드, 스티븐 핑커, 그리고 과학자들의 철학자라고 부를만한 대니얼 데닛 와 같은 잘 알려진 출판계(독서계)의 스타뿐만 아니라 로봇 및 인공지능 분야의 민스키, 브룩스, 모라벡, 도발적인 미래 예측을 내놓고 있는 레이 커즈와일(이 책은 커즈윌로 표기)  매우 특이하고 괴짜스럽지만 정작 균형있는 주장을 펴는 재런 래니어(재이런 러니어), 최고 수준의 학자이면서 인류의 미래에 대한 책을 쓴 마틴 리스 등을 만나는 것도 가슴 설레게 하는 일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전에 알지 못했던 과학자들도 새롭게 소개받는 것도 나름대로 즐거운 일이다.

하지만 바로 "파티"의 한계가 이 책의 한계이기도 하다.

한두 마디의 대화로 끝.....만나는 사람들의 피상적이고 단편적인 모습밖에 접할 수 없다.

이 책에 나타난 각 과학자들의 모습(그들의 글)이 그들을 대표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각자의 연구분야가 다르고 개성이 뚜렷하다 보니 책의 방향이 이리저리 산만하다.

그리고...나는 분명 열렬한 과학 애호가이지만 진정 인문학을 이야기할만한 내공 및 글빨을 지닌 과학자들의 수는 아직 그다지 많지 않다는 느낌도 저버릴 수 없다. (하다 못해 이 책 안에서도)

또 번역도 그다지 이해하기 쉽지는 않은 편이다...

그.러.나. 이런 단점들에도 불구하고....브록만의 파티에 참가하는 입장권으로 이 책 한 권의 값은 그다지 비싼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즐거운 파티였다. 앞으로도 브록만이 판을 벌이면 기꺼이 달려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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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 트랜스휴먼과 미래경제
박영숙.호세 꼬르데이로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0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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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손으로 만들었는지 발로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외국인 저자와 국내 저자의 공저 형식인데 누가 어느 부분을 썼는지 언급이 되어있지 않고 번역도 네 사람이 나누어 했다고 되어있는데 책의 전반부는 정말...심한 수준이다.

일례로...p123을 보면 한 패러그래프 안에

텔레 메디슨

텔레 메디신

텔레 의학

텔레 의료

라는 단어가 나온다. 짐작컨데...모두....telemedicine의 번역인듯....

('원격 의료'라는 표현은 생각이 안난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런 식으로 영어 한 단어를 우리말로 바꾸지 않고(충분히 바꿀 수 있는 상황인데도) 그대로 음역해버리면서 과잉 띄어쓰기 한 예는 바로 근처에서 더 찾아볼 수 있다. (p121 슈퍼 임포지션 ㅡ,.ㅡ)

그 바로 윗줄의 "개개인의 전자 일렉트론은"이라는 표현은 또 뭔지...

편집 과정은 아예 없었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이런 내용에 관심을 갖고 책을 주문한 나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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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재즈....

파릇파릇하던 시절에 재즈에 매혹되어 열쉼히 음반을 사모으고, 듣고, 공부하고, 사랑하다가...

"아줌마"가 되면서 완전 빠이빠이.....(젖병이랑 똥오줌 기저귀랑 씨름하면서 재즈가 귀에 들어오랴..)

애들이 조금 커서 조금 여유가 생기면서...애들 학교에 태우고 다니면서..차에서 귀가 허전해 그 옛날 사모은 음반들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치만 취향이 아줌마스러워져셔인지...온리 보컬곡만 들었다. 엘라 핏제럴드, 빌리 할러데이의 앨범...혹은 작곡/작사가별로 나온 songbook 앨범들...그런 식으로... 

그런데 내가 좋아하는 콜 포터의 songbook 중에서...주로 연주곡만으로 구성된 앨범이 있다. (보컬이 들어간 곡도 하나 있긴 하지만) 개성 넘치는 뮤지션들이 콜 포터의 곡들을 무척 독특한 방식으로 해석한 명반...(알라딘엔 이 상품이 없네염..)

이 앨범의 모든 연주가 다 멋지지만....그 중에서 Bud Powell이 온리 피아노만으로 (unaccompanied) 연주한 "Just one of those things"이라는 곡이 있는데....

이 곡이 그만....가슴에 푸우우우우욱 꽂혀버렸다!!!!!!

이런 감동..이런 매혹이 얼마만인지...(나이들어보시라......"감동"과 "매혹"을 관장하는 뇌의 신경전달물질이 줄어들어서인지...그런 경험....정말정말 맛보기 힘들어진다.......)

마력을 지닌 듯한...전광석화와 같은 화려한 기교...
(파웰에 꽂혀서 인터넷에서 정보를 좀 찾아보니..엄청난 속도의 오른손 연주와..간결한 왼손 반주가 파웰 특유의 주법이라고 한다....)

단순히 인간이 피아노를 저렇게 다룰 수가...뭐 그런 감탄만이 절때 아니고(그런거라면 감동의 표면만을 스쳤겠죠.) 그가 연주한 이 곡은...정말이지...아.름.다.웠.다.  그의 독특한 연주와 해석이.....오만 번도 더 들은 콜 포터의 이 곡(Just one of those things)을 너무나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다...

참, 파웰에 대한 정보를 찾다보니...천재적인 피아니스트로 떠올랐지만...사고를 당하고 마약에 쩔고 인간관계도 좋지 못하고 비참한 말로를 걸었다고 한다......

(왜 내가 무척 좋아하는 재즈 예술가들은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빌리 할러데이도 그렇고...동성애자였던 천재적 작사가 래리 하트도 그렇고.....자신의 인생 역시 가장 비극적이고 인상적인...기억에 오래 남을 연주로 남기려고 했던것일까...? 아니...버드 파웰의 연주를 들어보면...저런 연주를 하다보면 마약에 의한 도취감에 이르지 않을 수 없겠구나...(듣는 사람도 high가 느껴지는데...) 그런 도취감에 맛을 들인 다음에는..금단현상을 이기기 위해  마약이든 술이든 찾지 않을수 없겠구나...싶기도 하다. (실제로 파웰은 사고를 당하고 나이 먹어서 손가락이 예전같이 잘 돌아가지 못했다고도 한다....ㅡ,.ㅡ)

 

<-라운드 미드나잇

 참, 이 영화....이게..늙고 비참해진 뮤지션과 너무나 가난하지만 그의 음악을 절절히 사랑한 팬간의 교감을 그린 영화라고 하는데...영화에서는 색스폰 주자인 덱스터 고든이 뮤지션 역할을 했지만 영화의 모티브가 된 실제 사건은 바로 버드 파웰과 그의 팬의 이야기라고 한다. 사실 이 영화...예전에 디븨디 숍에서 빌렸다가...느무느무바빠서 다 못보고(거의 못보고) 돌려준 일이 있다. 다시 한번 빌려볼까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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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교양사전 - 대한민국의 창조적 소수가 알아야 할 모든 것
이인식 지음 / 갤리온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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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처음 출간되었을때 당장  보관함에 넣어놓고...그 후 장바구니로 옮겼다가 다시 보관함으로 되돌려놓기를 몇번이나 거듭한 책이다. 무척 흥미로워 보이고 꼭 읽어보고 싶기는 했지만 책값이 적잖이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그러다가...직업적 필요...라는 구실을 만들어 결국 지르고 말았다. (지금 과학과 미래학에 관한 책을 번역하고 있어서...전문용어와 개념 등을 참조하기 위한 일종의 참고문헌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처음 이 책을 받아들고 쭈욱 훑어보면서 구성을 살펴보니 그야말로 참고서적으로 제격인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ㄱ에서 ㅎ까지 표제어를 제시하고 각 표제어별로 짧게는 한 두 단락에서 길게는 몇 쪽에 걸쳐 설명이 붙어있는 사전식 구성을 하고 있다.

그.런.데. 사전이나 백과사전 등의 딱딱한 문장이나 건조한 설명과는 거리가 멀다!

다루고 있는 정보들은 아주 전문적이고 특수하고 세부적인데 그걸 전달하는 방식은 쉽고 친절하고 재미있다.  중학생 이상이라면 (어쩌면 독서 능력이 뛰어난 초등학생들도) 무리없이 읽을 수 있는 수준이고 개념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도 전혀 위압적이지 않다. 이건 사실 줄타기를 하듯 절묘한 균형이 필요한 일이다. 내용이 전문적이다보면 결국 아는 사람들끼리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이야기하는 경우가 태반이고 독자 눈높이에 맞춘다고 쉽게쓴 교양서(특히 과학서)는 내용이 빈약한것이 보통이다.

과학에 대한 내용이 주가되지만 역사와 문화, 사회 등 저자의 인문적 지식과 통찰도 듬뿍 들어있다. 아니, 과학이 주가 된다기 보다 과학기술에 의해 변화되고 있는 현재와 다가올 미래의 "인간의 삶"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크게 관심을 모으고 있는 과학과 인문학의 접목, 미래학 분야에 일반인이 재미있게 접근하기에 더없이 좋은 책이다.

저자의 독서이력은 놀라울 정도이다. 우리 시대, 우리 사회의 진정한  "르네상스인"이라는 칭호가 걸맞을 것이다. 이런 저자가 있다는게 고맙고 자랑스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고백컨대....칼럼 등으로는 간혹 접했지만....이인식씨의 책을 사서 보는 것은 처음이다.

전문가와 대중 사이에 다리를 놓는 지식의 가공자라는 역할이 무척 중요하고 박수칠만한 일이지만 사실 아직까지 척박한 국내의 토양 위에서 기대에 부응하는 저자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로울게 없는 내용을 글재주로 포장해서 내놓거나 심지어 이미 일차, 이차 가공된 외국의 저작물을 뭉텅뭉텅 짜집기한 저서들(요리에 비유하자면 라면 끓이기ㅡ,.ㅡ)이 상당했기 때문이다...(나의 선입견도 없지 않았음을 인정한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국내 저자들의 책도 참고문헌 표기를 좀 더 자세하게, 엄격하게 해주었으면 하는 바램이 크고 그 측면에서는 이 책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다. (참고한 서적들을 맨 뒤에 알파벳 순서로 제시하고 있는데 각 표제어 별로 따로 제시해주었다면 더 깊이 알고싶은 독자에게 많이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이 책의 전반적인 장점은 그 정도의 아쉬움을 가리고도 남는다. 그리고 참고한 문헌을 그대로 인용했다기보다는 저자가 완전히 소화해서 그의 머릿속에서 새롭게 자아냈기 때문에 (요리에 비유하자면 모든 재료들을 솜씨있게 다듬고 양념하고 지지고 볶고 끓여 맛이 푹 우러난 찌게???...) 읽다보면 참고문헌 표기 여부는 연연하지 않게 된다.

또 한가지...

워낙 새로운 최첨단 용어들이 많아서 국내에 거의 소개되지 않은 새로운 용어들의 번역만으로도 큰 고민거리가 아니었을까 짐작된다. 가능한 한 적절하게 한글화하거나 불가피한 경우 원어를 음역해서 표기한 것으로 보이는 용어 번역에서도 상식적인 균형감각이 엿보인다.

이 방대한 책을 다 읽은건 물론 아니고...사실 오늘 처음 책을 받아 읽기 시작했다.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아무 항목부터 읽어나가도 좋을 것이다. 정말 재미있고 풍부한,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정보가 가득~하다.

퍽 비싼 책이지만....책 값의 몇배 몇십배되는 정보와 즐거움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아쉬움...아니 바램이 있다면...이 책이 정기적으로 업데이트되고 다른 항목들도 추가되어 앞으로도 꾸준히 성장해나갔으면 한다...지금 어린 나의 아이들이 자라난 5년 10년 후에도 추천해주고픈 그런 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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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문제의 본질은 번역자다

필요 때문에 번역 문제에 관한 자료들을 검색하다가 작년 봄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발행하는 <기획회의> 18호(2005년 4월) 특집이 '번역출판의 오늘을 말한다'였다는 걸 알게 됐다. 특집기사들 중에서 한기호 소장의 글 '문제의 본질은 번역자다: 번역출판의 제도적 측면'을 옮겨온다.

 

 

 

 

-이 글을 써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내내 나는 <아나 트롤>(창비, 1991)의 경험을 순간적으로 떠올렸다. 뛰어난 서정시인이자 정치풍자시의 대가 하인리히  하이네의 대표적 장편풍자시 <아나 트롤>과 12편의 시사시를 번역 수록한 이  책은 1991년에 시인 김남주의 번역으로  창비에서 출간됐다(*이 책은 현재 절판중이다). 당시 그 회사 영업책임자이던 나는 교정지에서 접한  번역문의 유려한 문장에 반해 <아나 트롤>에 대해 더 상세하게 알고 싶었다. 그래서 <아나 트롤>을 다룬 석사논문을 찾아 읽어보았는데 논문 속의 인용문은 교정지의 번역문과는  전혀 다른 맛이었다. 석사논문 속의 인용문은 그냥 뜻이나 통하게 옮겨놓았다고나 할까? 내가 만약 그 인용문 수준의 글부터 읽었다면 과연 <아나 트롤>에 대한 아름다운 추억을  가지게 되었을지, 책이 만약 그런 수준이었다면 책을 구해 읽었을지 장담할 수는 없는 일이다.

-오늘날 표면적으로는 번역출판의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전체 발행종수 가운데 번역서가 차지하는 비중은  1995년 15%에서 2003년 29.1%로 2배 가까이 늘었다. 그러나 이는 대부분 만화와 아동에 집중되어 있으며 이 두 분야를 제외하고는 역사 분야가 평균 성장률과 비슷하고 나머지는 모두 밑돌고  있다. 결국 출판시장의 성장에 비추어보면 질적으로 상당한 퇴보를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동안 번역출판을 놓고 단순한 통계수치만으로 ‘상당한 양적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는 분석이 없지 않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속빈 강정’임을 알 수 있다.  

-이런 흐름은 2004년에도 어느 정도 유지됐다. 2004년에  번역서는 전체 발행종수 35만394종의 28.5%인 10만88종으로 2003년과 비슷하다. 만화(3108종)와 아동(2245종)을 합하면 여전히 번역서의 절반을 넘는다. 단지 아동은 늘어나고 만화가 줄어들었을 뿐이다.

 

 

 


-번역서의 번역 수준은 우리 출판의 아킬레스건이다. 한 마디로  앞에서 예를 든 석사학위논문 인용문 수준의 번역문을 그대로 담은 책들이 줄줄이  출간되고 있다. 영미문학연구회 번역평가사업단이 영미 문학 대표작 가운데 ‘친숙하게 읽혀온’ 작품의 변역 수준을  평가한 결과에 따르면 “영미문학의 번역은 양적인 풍요와 질적인 빈곤으로  요약될 수 있다. 대상 작품들의 번역서로 최종 검토 대상이 된 완역본은 총 573종인데 이중 추천할 만한 번역본은 모두 61종(11%)에 불과하다.

-대략 10권  중 한 권 정도가 믿고  읽을만한 번역본인 셈이다. 추천본이 없는 작품도 전체 작품의 3분의 1이 넘는다. 소설의 경우에는 추천본이 전체 번역본의 6%에 불과”했다. “비소설의  경우는 추천본 비율이  높으며(29%), 추천본의 종수가 가장 많은 것도 ‘햄릿’(10종)”이었지만 “검토본 가운데 반수 이상(54%ㅎ310종)이  표절본으로 그대로 베낀 것부터 짜집기, 윤문潤文까지 다양한 형태를 확인” (1) 할 수 있었다.

-여기서 표절의 책임은 대부분 출판사에 있다. 특히 잘 팔리는 책, 독자에게 친숙하게 읽혀온 문학서적의 경우에는 출판사가 기존에 출간된 책을 적당히 윤문해 중복 출판하는 경우가 성행했기 때문이다. 번역출판으로 꽤 명성을  날린 출판사들도 실제로 이런  행태를 자행하고 있음을 수없이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영미문학연구회의 평가결과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왜 이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책임은 먼저 번역가가 질 수밖에 없다. 미디어 평론가 변정수는 그 자신을 비롯해 수많은 편집자들이 “번역 텍스트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거의 ‘공역자’ 수준의 역할을 떠맡고 있다”고  지적한다. “명목상의 역자는 결과적으로 고작해야 초벌 번역의 수고를 해 주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게 되고 편집자가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내 저작물에  빗대자면 거의 ‘섀도 라이터’에 해당될 정도의 역할”(2)을 하고 있는 셈이다.

-꼼꼼하게 공들인 번역으로 소문난 유명 역자들은 편집자가 거의 손을 볼 필요가 없는 완벽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더 이상 이야기할 것도 없겠지만 대부분은 편집자가 ‘공역자’에 준하는 역할을 하거나 심지어 거의 ‘재번역’을 해야 하는 수준의  번역문이 들어온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편집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상 대다수의 편집자는 원문대조도 하지 않고 오탈자나 잡아내는 수준의 교열에  머무른다. 그래서 전문편집자의 필요성이 절실하지만 그런  편집자들이라도 ‘교수’의 직함을 달고 있는 학자 번역자의 경우에는 십중팔구 재번역해야 하는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교수들과 일하는 것을 매우 꺼린다.  

-학자들이 번역에서 그들만이 이해하는 용어로  그들만의 ‘언어게임’을 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앞에서 언급한 <아나 트롤>
수준의 번역보다 못한 번역 원고가 그대로 출판사로 들어오는 것이 대부분이다.  이럴 경우  편집자들은 ‘교수’가  직접 번역한  것이 아니라 ‘조교’나 다른 대행자들이 번역을 대신한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것이 다반사다.  

-상황이 이런데도 편집자들이 ‘사실상의 번역자’ 노릇을 감수하면서 십중팔구 믿지 못하는 교수에게 매달리는 것은 ‘손을 볼 필요가 없는’ 번역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유능한  몇몇 번역가들은 밀린 일이 많아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전문번역회사다. 한 출판번역전문회사의  대표는 “국내 산업번역 규모가  1조원 대에 달하고 그리고 영상미디어 번역이 5천억 원, 출판번역시장이 5천억 원에 달한다”고 전망했는데 시장은 이렇게 크지만 양질의 번역을 빠르게  해줄 수 있는 번역가가 많지 않아 이런 업체는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번역전문회사는 대부분  번역지망생과 출판사를 연결시켜주고  커미션을 챙기는 중간업자에 불과하다. 이 회사들은  보통 번역료의 30% 가까이를 챙긴다.  출판사가 지급번역을 요청할 경우에는 원고를 여러 사람에게  쪼개서 번역한 것을 모아 한두  사람이 죽 읽어가면서 획일성만 기하기 마련인데 이런  원고의 수준은 ‘눈 뜨고 봐주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전문번역회사들은 출판사와 번역자들이 만나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해 번역자들이 편집자와 만나 번역의 질을 상승시키는 길 자체를 원천적으로 차단해 버리고 번역자가 교열을 볼 수 있는 기회마저 박탈하는 병폐가 있다. 하지만 속도를 요하는 분야에서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출판사들까지 이런 전문번역회사를 애용하는 현실이다.

-그렇다면 더 많은 전문번역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당연히 번역료가 낮기 때문이다. 상위 출판사의 경우 영어는 3500-4000원, 일본어는 2500-3500원, 프랑스어나 독일어는 3500-4000원 수준이다. 물론 수준이 보장되는 전문번역가는 이보다  높은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낮은 경우가 더 많다.  일본의 법인 또는 단체가 일본책의  한국어 번역료를 통상 10,000-15,000원 수준에서 지원하는 것과 비교하면  우리 번역료가 어느 수준인가를 절실하게 깨달을 수 있다.

-더구나 지금의 번역료는 몇 년  전의 수준에 머문 것이어서 물가상승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갈수록 뒤쳐지고 있어 번역에 ‘목숨’을 거는 번역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최근 학술진흥재단 등에서 시행하고 있는 고전 번역 지원사업에서는 번역 원고료를 10,000원 안팎으로 책정하고 있다. 나도 신청중인 과제가 있긴 하지만 이 정도의 대우가 보장되지 않는다면 번역에 나서기 어려운 게 현실이다. 더구나 인세일 경우 한달 평균 100여 만원 정도의 보상을 기대하면서 번역에 '목숨' 걸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특히 전문영역에 속하는 책들을 맡아주어야 할 학자들은 번역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사명감에 충만하거나 특별한 인간관계가 아니면 일부러 나서려  들지 않는 것이다. 우선 번역료가 너무 싸고,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번역을 학문적  업적으로 여겨주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부 출판사는 고육책으로  번역료와 인세를 병행하는 정책을 쓰기도  한다. 기본 번역료는 보장하되 번역료 이상으로 책이 팔리는 경우에는 인세를 추가로 지급하는 방식인데 실제로는 추가 인세가 지급되는 경우가 흔치 않아 확실한 ‘유인책’이 되지 못하고 있다.

-물론 ‘셜록 홈즈’ 시리즈의 사례처럼 인세로 계약한  대중서가 1백만 부나 팔려 평생의 고생을 보상할 수준의 인세가  나오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런  경우가 매우 드물기는 해도 이런 제도가 도입되면 번역자가 어느 정도 번역에 책임을 지려 들 것이다. 하지만 출판사는 기본 번역료를 감당하기도 어렵다.

-인문학, 철학, 과학 분야의 전문분야 출판사인 이제이북스는 지난 3년 동안 60권의 책을 펴냈지만 2쇄를 발행한 책이 단 2종에  불과하다고 밝히고 있다.(3)  이 출판사가  나름대로 번역에 매우  많은 공을  들여왔고 초판을 1000부 밖에 발행하지 않는 것을 감안하면 출판사의 출혈투자가 없이는 도저히 책 출간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이제이북스의 경우는 며칠 전에 다룬 바 있다). 15,000원  정가의 책인 경우 1000부가 다 팔린다  해도 매출액은 1천만 원 내외다. 이 금액 모두가 번역료로  지급되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여기에 제작비, 인건비, 일반관리비 등을 부담해야 하므로 출간 즉시 적자가 발생하는 일이  다반사니 대다수 출판인은 출판을 기피한다.

-번역료가 낮은 근본적인 원인을 출판사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다. 그렇다면 책을 읽지 않는 독자를 탓해야 할까? 물론 탓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독자들도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독자들은 철학을 쉽게 풀어주고 독해가 가능한 책을  만들어주지 못하고 부실한 번역이 독자들을 떠나가게 만들었다는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의 뼈아픈 지적을 더 수용하려 들 것이다.


-결국 이 땅의 번역출판 부실은 어느 일방의 책임이라기보다는 구조적이라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내수시장이 근본적으로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시스템을  극복할 수 있는 사회제도적 후원시스템을 ‘억지로’라도 만들어야 한다. 그 점에 대해서는 선험적인 연구자들이 결론내린 바  있다.

-김선남(원광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한 연구논문(4)에서 “전문 번역가의 부족, 낮은 번역료, 오역 및 중복 출판, 출판사의 과도한 저작권 확보 경쟁 등과 같은 출판사 내·외적인 문제”를 극복하고 번역출판이 활성화되기 위한 방안으로  전문번역인 양성 프로그램 개발, 번역활동 지원 단체의 확충, 번역 출판물 기획의 다양성 확보 등을 제시했다.

-이런 결론은 지난 수십 년간 내려졌고 물론 간헐적인 대응책은 있어왔지만 근원적인 대책은 세워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전문 번역인은 어떻게 양성할  것인가? 지원자만 모아놓고 교육만 시키면 해결이 될 것인가? 그보다는 전문적인 번역자가 전문편집자와 함께 일을 해가면서 번역의 질적 수준을 높여가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그래서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주도하는 사람들이 주요 인문출판사와 공동작업을 하면서 번역학교를 따로 꾸리고 있는  것은 모범적인 사례가 된다. 이 단체는 이미 상업적으로도 성공한 책을 여럿 내고 있으며 고전을 재해석한 ‘리라이팅’ 시리즈처럼 저작의 단계로도 올라서서 인문출판의 성공적인  모델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앞으로 이런 모임이 더욱 많아져야 할 것이다(*한데, 이 리라이팅 시리즈도 작년부터는 한 권의 책도 내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출판시장이 갈수록 자본의 논리에 지배되는 상황에서 상업성이 부족하지만 꼭  필요한 번역출판이 이뤄지려면 공공적인  지원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어야  한다. 국가나 기업에서 지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공공도서관과 학교도서관이 근원적으로 가동되어야  할 것이다. 비단 이것은 번역서뿐만이 아니라 출판 전반에 적용되는 것이지만 도서관의 기본적인 존립목적인 정보 접근 평등성을 위해 도서관 스스로가 양서를 다양하게 구비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공공도서관은 너무 ‘빈약’하다.

-따라서 소기의 성과를 빨리 이루려면 각급 학교도서관의 활성화가 시대적 소명이다. 학교도서관을 활성화하고 이를 지역 주민도 이용하는 기초생활문화공간으로 거듭나게 한 다음  공신력 있는 기구가 선정한 우수도서를 학교도서관이 의무적으로 구비할 수 있는  정책적·사회적 시스템을 갖추어 양서의 경우 5000-10,000부 정도가 소비될 수 있다면, 출판사들은 구태여 시류에 영합하는 책을 만들지  않고도 안정된 경영을 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출판뿐만 아니라 기초학문과 교육이 사는 길이고 결국 국가가  경쟁력을 갖는 일이다. 우수한 번역서를 여기에서 제외시킬 이유가 없기에 번역출판도 자연스럽게 활성화될 수 있을 것이다. 정책당국자들은 예산타령만을 일삼지만 이런 일이 이뤄지지 않는 것은 예산이 없어서가 아니라 의지가 없어서일 뿐이다.

-다양성은 무척 중요하다. 그 문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하지만 전문성도 중요하다. 지금 구조에서는 번역출판을 통해 한 분야의 전문성을 갖기가 쉽지 않다. “어떤 약삭빠른 출판사가 입도선매식으로 저자권계약을 맺어놓은 다음”에 “자격 없는 역자들을 동원하여 오역·졸역본의 출판을 남발하는 경우”에는 “저작권을 보호함으로써  마구잡이 번역을 막겠다는 원래의 정신에 정면으로 어긋나는 역설적 결과”(5)가 수시로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물건이나 언어에는 반드시 그 배경에 주류와 계통을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계통도에서 상위에 올라있는 책을 먼저 계약해놓고 책을 출간하지 않으면 하위에  해당하는 책을 펴낸 출판사는 고통만 겪을 확률이 높다. 이것은 원저작은 보지 못하고 비평서만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상호 협조와 양해를 통해  바람직한 조정이 이뤄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상황이 매우 열악하지만 우리에게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앞의 ‘연구공간 수유+너머’도 희망적인 사례지만 영미문학연구회가 분석한 책들이 출간된 같은 시기에도 “고전  번역에 가담한 새로운 세대 전문연구자들의 활약은 고무적이다. 또  초기에 나온 번역본이 이후 어떤 번역본보다 더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 경우도 적지 않아 우수한 번역진의 층이 얇다고 만은 할 수 없다. 더 좋은 번역환경이 마련되고, 다수의 독자들이 좋은 번역을 선별해  읽을 수 있다면 번역 풍토의 획기적인 개선도 기대”(6)할 수 있다는 지적도 우리에게 기대를 갖게 만든다. 따라서 바람직한 비평을 통해 좋은 책을 선별해주는  사회적 시스템이 다양하게 정착되는 일 또한 바람직한 번역출판이 이뤄지기 위한 필요조건이라 할 것이다.

(1)「번역 평가 왜 필요한가」<한국일보> 2004.2.16
(2)변정수,「번역 출판의 원숭이들」<기획회의> 8호 2004.11.5
(3)김현미,「우리말로, 철학하기, 출판으로 철학하기 - 이제이북스 전응주 사장」
   <기획회의>10호 2004.12.5
(4)김선남,「국내 번역 출판물의 현황과 화성화 방안 연구」<한국출판학연구> 제43호 2001
(5)한정숙,「학술서적 번역 이것이 문제다」<국민일보> 1996.8.12
(6)김영희, 같은 글

06. 0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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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2 0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네파벨 2006-08-22 0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그렇답니다...늘 고맙습니다!

톡톡캔디 2006-08-28 1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주로 편집자 입장에서 썼네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