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irl with the Dragon Tattoo: A Lisbeth Salander Novel (Paperback)
스티그 라르손 지음 / Vintage Books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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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이 책이 선풍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사들었다.
유럽에서는 해리 포터를 능가하는 신드롬을 일으킨 책이라고......

좌파 경향의 경제 전문 기자인 미카엘 브롬크비스트(Michael Bromkvist)가 두 기업의 비밀과 연루되어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다. 브롬크비스트라는 발음하기도 힘든 성(이름)은 스웨덴이 자랑하는 아동문학가 아스트린드 린드그렌에 대한 오마쥬일까? 이름때문에 미카엘은 칼레 브롬크비스트라는 별명으로 불리고(린드그렌의 유명한 동화 "소년 탐정 칼레") 그 이름이 암시하듯.......그는 저널리스트라는 본분에서 더 나아가 탐정일을 떠맡게 되어 범죄와 비밀을 파헤치게 된다.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는 어릴적 루팡, 홈즈, 미스마플과 포와로 시리즈를 졸업한 이래로 거의 완전히 관심을 꺼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이 책은 주인공이 금융 및 기업세계의 비리를 파헤친다는 설정이 나의 관심을 자극했다. 재작년의 금융위기 이후로 금융이니 경제니 하는 주제들은 나의 관심 키워드의 목록에 항상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알고보니 금융/기업 드라마가 아니라 오히려 싸이코 스릴러, 시리얼 킬러물이었다!
.............으흐흐흐........그런줄 알았으면 솔직히 아예 읽기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ㅡ,.ㅡ

아가사 크리스티 이후로 추리소설을 읽지 않는데서 알 수 있듯, 나는 범죄소설, 스릴러 따위를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고 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굳이 돈과 시간을 들여서 읽고 싶지도 않다. 그냥.....워낙......나의 성정이......평화를 사랑하고 피튀기는 걸 싫어하기에...흠흠...

더구나 범죄인(?)이 성경 구절의 대목을 은유적, 상징적 암호로 사용하고 주인공이 그것을 해석하여 비밀을 풀어나가고 어쩌고....
이런 류의 설정도 솔직히 신물이 난다. 영화니 소설 여기저기에 너무 많이 등장해서.

더 이상의 디테일은 스포일러가 될 듯.

나는 원래 서평/독후감을 쓸 때 나만의 기록을 위해 읽은 책의 줄거리를 자세히 적는 편이지만.........
이런 추리소설(?)의 특성상 스포일링은 훗날 책을 읽으실 수도 있는 잠재적 독자들에게 예의가 아닌듯 하야...줄거리는 생략.

이렇듯, 내가 좋아하지 않는 쟝르의 책임에도 불구하고, 과연 재미는 있다. 엄청.
 
처음에는 그냥 그랬다.

무미건조하고 딱딱한 문체. 쏘 쿨~ 하고 드라이한 인물들. (이런것이 하드보일드 소설의 특징인가? 잘 모르겠다. 거의 읽어본게 없어서.)
 

그래도 은근 사람을 잡아끄는 줄거리의 흡인력에 책장은 잘 넘어간다. (스웨덴어를 영어로 번역한 책인데 영어도 무척 쉽다.) 처음 1/3 정도는 그냥 틈틈히 시간이 날 때마다 집어들고 조금씩 읽었기 때문에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그러다가 책의 후반부에 이르면서........책의 광고에서 예언한 대로 밤잠을 줄여가며 읽게 되었다. (덕분에 지금 나의 컨디션은 말이 아니다.)

굉장히 재미있기는 한데..........이 책의 매력이 무엇인지는 지금도 정확히 꼬집어서 말하기가 어렵다. 

책을 중간쯤 읽을 무렵, 너무 재미있어서 저자와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해 마구 관심이 증폭되었다. 

주인공인 Michael Blomkvist는 저자인 스티그 라르손의 문학속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의 비리를 폭로하는 좌파 경향의 잡지(책속에서는 Millenium, 라르손이 발간한 잡지는 EXPO)를 운영하는 기자로 극우파 기업가들에게 끊임없히 협박을 당하고 살해기도마저 겪었던 라르손은 실제로 미카엘과 마찬가지로 잡지의 공동발행인인 여자친구와 평생의 동반자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그런데..라르손은 이 책을 포함 밀레니엄 시리즈 삼부작을 탈고한 다음 얼마 안있어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한다.  

50세의 나이에 권 당 700페이지가 넘는 두꺼운 처녀작 소설 세 권을 연달아 내놓고 그 소설이 세계적으로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는걸 채 보지도 못하고 꼴깍 죽어버리다니...............What a life!

스웨덴이라는 나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문학의 힘인 듯.)
책에 나오는 지명을 구글어스에서 찾아보기도 하고....
스웨덴이 2차대전 당시 어떤 정치/외교적 역학관계에 놓여있었는지........
정치적 무풍지대이고 한없이 이성적이고 합리적일 듯 한 이 스칸디나비아 국가에서 최근까지도 신나치 운동이 기승을 부렸다는 생소한 사실도 접하게 되었다. (구글질을 하다보니 이케아의 창업주이자 CEO인 인물도 젊은시절 나치인지 신나치운동에 가담했었다고...ㅡ,.ㅡ)

"이성적이고 합리적이고 성에 대하여 개방적인 북구인"이라는 스테레오타입도 거의 재확인된다. 
주인공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만나는 여자들과 우정과 섹스를 나누지만 사랑은 글쎄..............

또 다른 주인공인 Lisbeth Salander는 정신적으로 disabled 판정을 받을 정도로........자폐적인...아스퍼거 증후군으로 의심되는...천재적이지만 감정과 사회성이 미숙하기 이를데없는 여성이다.

또 다른 악의 축의 무리들........

그들은 아마도 저자가 평생 적으로 삼았던...수단방법 가리지 않고 부정하게 돈을 모은 기업가, 정치적 우파, 신나치주의자(인종적 우월성과 타인종, 이민자에 대한 혐오로 가득한 일부 스웨덴인들),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 인간성이 심하게 훼손된 새디스트, 변태성욕자 등을 상징적으로 대표한다고 생각된다.

그들의 비리를 파헤치고 복수(?) 하는 방법이 불법적이었다는 점은 또 다른 생각거리를 주지만...........어쨌든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리스베스의 복수방법은 통쾌하기 이를데없다.
(앞부분의 작은 일화에 지나지 않지만 리스베스가 자신의 후견인인 변호사에게 벌인 복수는 특히 마음에 든다.)

책의 마지막은 속편을 진하게 암시하고 있다. 리스베스의 개인적 비밀과 상처도 설명되지 않았고 그녀의 마음에 자라고 있는 미카엘에 대한 감정도 정리되지 않은채 책이 마무리되었다.

2권을 읽고싶은 욕구가 적지 않지만............당분간 쉬어야겠다.  

폐인모드에서 벗어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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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3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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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리뷰에 이어) 

톰이 힘들게 돈을 모으고 투자해서 가까스로 아버지의 빚을 갚던 날....
기쁨과 흥분에 취한 아버지 털리버씨는 물방앗간에 찾아온 필립 웨이컴과 싸움을 벌이고, 이성을 잃고 그를 마구 채찍으로 때려서 부상을 입히고 그 자신도 곧 쓰려져 삶을 마감한다. 

더 이상 물방앗간에서 살 수 없게 된 가족은, 톰은 하숙을 얻어 나가고, 엄마는 부자인 언니네 집에 들어가 가정부처럼 일하고, 매기는 집을 떠나 학교 선생님으로 일하며 역시 고되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 부분은 몇 년을 훌~쩍 뛰어넘어....

학교 근무를 마치고 잠시 쉴 생각으로 엄마가 살고 있는, 이모네 집을 방문해 머물게 된 매기.
이모는 병으로 죽은 상태였고, 그 이모부가 오빠 톰을 취직시키고 돌봐준 부자 이모부이고, 그들의 딸인 사촌 루시는 매기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착하고 예쁜..........이상적인 빅토리아 시대의 신붓감(금발에 푸른 눈에  흰 피부, 자그마한 체구, 여성스럽고 착하고 다정한 소녀)이었다. 

루시는 마침 세인트오그스에서 최고의 신랑감이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의 아버지 회사의 사장인 게스트의 아들 스티븐 게스트의 구애를 받고 있었다. 부유하고, 좋은 교육을 받고, 멋지고 남자다운 외모를 갖춘 매력적인 남자 스티븐.  그런데 그는 보통 아가씨들과 달리 꾸밈 없는 태도와 지적인 열망을 가진, 거기에 가난과 불행을 후광처럼 두른 매기에게 조금씩 빠져들기 시작한다. 미운오리새끼 같던 매기는 검은 눈에 검은 머리카락에 큰 키가 매혹적인 아름다운 처녀로 성장한 터였다. 

루시를 가운데 두고 스티븐과 매기는 그들만 알 수 있는 이끌림과 유혹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그들은 각자 상대방의 존재를 숨 막힐 듯 거의 손끝까지 의식하였다.") 아니, 주고받는다고 하는 것은 공정하지 못하다. 매기는 자신의 감정에 계속 저항했으니까. 하지만 매기 역시 스티븐에게 강하게 이끌렸던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이성과 합리성이 결여된, 강렬한 본능적, 성적 이끌림이었다. 스티븐은 좋은 조건을 갖춘 멋진 남자지만 루시의 약혼자나 마찬가지였고, 무책임하고 이기적이고 자기합리화에 능한, 저자의 시선으로나, 독자의 시선으로나, 매기의 시선으로나..........공감보다는 비난을 보내 마땅한 "나쁜 남자"임에 틀림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기는 그에게 이끌리는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잘라내지 못하고 감추지도 못했다...............................

한편 스티븐과 친구인 필립도 루시의 집을 방문하면서 넷이 함께 어울리게 되었다. 단순한 루시와 달리 영민하고 예민한 필립은 스티븐의 강렬한 열정과 그에 저항하고자 하면서도 이끌리는 매기의 감정을 알아차리고 괴로와한다. 
 

선의에서 필립과 매기를 맺어주고 싶었던 루시의 주도하에 필립이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해 물방앗간을 내놓게 해서 톰이 다시 사들일 수 있게 되고, 필립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매기와의 결혼(웨이컴 입장에서는 자신을 채찍으로 때려죽이려던 자의 딸을 며느리로 맞는 일)을 허락을 받는다. 불구 아들에 대한 남다른 연민과 사랑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필립과 루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스티븐이 찾아와 매기와 둘 만 보트를 타게 되고, 그 보트가 내릴 곳을 지나치고 계속 떠내려가 둘은 사랑의 도피를 한 것과 같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 추문을 그나마 최선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매기가 스티븐과 결혼하는 길 뿐이었지만, 매기는 사랑하는 사촌 루시, 어린 시절 마음을 주고받고 자신을 깊이 사랑하는 필립에 대한 마음 때문에 결국 스티븐을 거절하고 혼자서 세인트오그스로 돌아온다. 
 

사람들의 비난과 경멸을 한 몸에 받고 오빠인 톰에게 의절당한 매기. 불행하고 외롭고 치욕적인 삶이었지만 그녀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의리를 지켰던 루시와 필립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녀를 감싼다. 

그러던 와중에..........

플로스 강의 물이 불어나 몇십 몇백년 만의 큰 홍수가 나고, 매기는 혼자 배를 저어 물방앗간으로 찾아가 오빠를 구해내지만 곧 상류에서 떠내려오는 거대한 덩어리에 휩쓸려 두 남매는 꼭 껴안고 물에 빠져 삶을 마감한다.

죽기 직전, 오빠에게 용서받고 사랑을 확인한 채로....................................
그리고, 펴보지 못하고 죽은 젊은 남매의 묘비에는 "두 사람은 죽어서도 서로를 떠나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새겨진다.
 

..................................................................................

*** 결말에 대하여 *** 


이 마지막 부분의 결론을 놓고, 또 매기가 천박한 스티븐의 유혹에 흔들리는 것을 놓고 많은 비평가들이 비난을 보냈다고 한다. 

그렇다.

플롯을, 꼬고 또 꼬고, 갈등 위에 새로운 갈등을 아슬아슬하게 쌓아놓은 후에 갑자기 불가항력의 힘에 의한 "죽음" 따위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것은......................다분히 폭력적이고, 허망하고, 어쩌면....인간이 해결할 수 없는 갈등을 신이 내려와 한방에 해결해버리는 그리스 드라마의 데우스 엑스 마키나 기법 이래로....너무나 상투적인 기법인지도 모른다. '지붕킥' PD가 시청자들을 우롱한 것과 너무도 비슷한...

상상력 풍부하고 지적이고 야생마처럼 자유로운 영혼을 지니고 감성이 풍부하고 고집센 매기가 이 모든 자충우돌, 우여곡절을 겪고 그녀와 비슷한 성향을 가진, <작은아씨들>의 조나, <빨강머리 앤>의 앤이나 <키다리 아저씨>의 주디처럼 따스하고 평범한 결말을 맞았다면, 그런 책들처럼 어린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는 마음 흐뭇한 성장소설로 더 널리 자리잡지 않았을까......아니면 적어도 <제인에어>처럼...비참함과 고독 끝에나마 해피엔딩의 위안을 얻을 수 있었다면............하지만 이 책은 <폭풍의 언덕>의 비극적 미학과 궤를 같이한다. 

<폭풍의 언덕>강렬한 캐릭터, 비극적 플롯, 그리고 독특한 전원적 배경(히드가 만발한 바람부는 황무지)으로 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듯 이 책도  역시 강렬한 캐릭터, 비극적 플롯, 그리고 역시 작품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독특한 전원적 배경(플로스 강)으로 깊은 인상을 준다. 
 
작품 내내 강과 물의 이미지....홍수에 대한 어렴풋한 암시가 줄곧 되풀이된다. 세인트오그스라는 마을 자체가 절박한 모자(실은 성모마리아)를 위험을 무릅쓰고 배로 건네주어 성인의 반열에 오른 뱃사공 오그의 이름을 딴 것이다. 플로스강은 이 마을의 젓줄이자........털리버 일가, 매기와 톰 남매에게는 몸속을 흐르는 피 만큼이나 진하고 친밀하고 소중하고........또 운명적이고 치명적인 존재였다. 책의 말미 작품 분석에서 언급되었지만 물가에서 위험하게 뛰어노는 매기에게 "저 애는 언젠가 물에 빠져 죽을거야"라고 말하던 엄마의 불안, 마녀인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물에 빠뜨려서 헤엄쳐 나오면 마녀이고 빠져죽으면 결백한 것으로 인정했다는 이야기에 "죽은 다음에 마녀가 아닌걸로 밝혀지면 무슨 소용이야?"라고 항변하던 매기..........

그 마녀 이야기는 너무나 슬픈 복선이다. 당시의 인습과 전통이 채 감당할 수 없는 성품을 지닌 매기....매기는 그녀가 속한 가정과 사회에서 마녀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었고....자신의 선의와 결백을 증명하고 자신을 이해하고 보듬어주지 못한 가정과 사회(오빠인 톰!!!)과 화해하는 길은 결국 "죽음".......마녀처럼 물에 빠져 죽는 길밖에 없었던 것이다! 


*** 매기 그리고 조지 엘리엇*** 

이 책은 조지 엘리엇의 자전적 소설로 불린다. 매기의 성격과 어린시절 성장과정, 에피소드는 조지 엘리엇(메리 앤 에반스) 자신의 이야기에서 따온 것으로 여겨진다. 

조지 엘리엇은 그 시대 인습의 굴레에서 벗어나 스스로 엄청난 수준의 학식을 쌓고, 글을 쓰고, 돈을 벌고, 자유연애를 하고 유부남과 일생의 반려관계를 맺고 늙어서는 20년 연하의 남성과 다시 결혼하는.....오늘날 페미니스트의 시각으로 볼때 유쾌+통쾌+상쾌하기 그지없는 파격적인 삶을 산 멋~~~~진 여성이다.

그런 그녀가 자전적 소설의 주인공인 매기를 그토록 허무하게 죽인 것에 대해, 더구나 매기에게 어울리지 않는 무가치한 남자(스티븐) 때문에 고통에 빠지고, 더더욱 매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대로 사랑조차 주지 않은 친오빠 톰을 구하다가 톰에게 용서받으며 삶을 마감한 것에 대해, 페미니스트를 비롯 많은 비평가들이 불만을 표시한다고 한다. (오늘 서점에서 이 책의 원서를 들춰보다 Jane Smiley라는 작가가 쓴 Afterword에서 알게된 내용이다.)

그런데.........나는 엘리엇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별볼일 없는 가정환경, 갑갑하기 이를데 없는 여성의 사회적 역할 따위를 던져버리고 스스로 솟구쳐 올라가 당대 최고의 문인(찰스 디킨즈에 비견되는) 자리에 오르고, 사랑 역시 성취했다고 하지만..........그녀가 던져버린 것, 거부한 것, 배신한 것, 또는 그녀를 저버리고 그녀에게 등을 돌린 것들에 대해.......아리고 아픈 회한과 그리움이 없었을까?
(실제로 엘리엇의 친오빠는 그녀가 유부남인 루이스와 동거에 들어가자 의절을 하고 몇십년 동안 말도 하지 않고 지냈다고 한다.)

그녀가 매기를 죽인 것........오빠인 톰과 부둥켜안은채 어린시절 친숙하게 뛰어놀던 강물에 빠져서 죽도록 한 것.........
그것은 엘리엇 그녀가 인습과 단절한 파격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알을 깨고 나오는 것만큼, 하나의 존재가 죽고 다시 태어나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음을 항변한 것이 아니었을까? 그녀 자신의 본성과 내면의 충동과 그것이 가족(사회)과 일으키는 갈등이 오직 죽음으로만 봉합할 수 있을만큼 크고도 강했음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어쩌면 마음 한 구석에는.......죽음을 대가로 치루고라도 단절된 그 세계-가족-와 화해하고 싶은 소망이 자리잡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가족, 몰락, 그리고 남매***

 

이 세 단어를 테마로 하는, 나의 기억에 깊고 깊은 인상을 남긴 다른 두 작품이 있다.

테네시 윌리엄스의 희곡 <유리동물원>
자크 반 도마엘 감독의 영화 <토토의 천국(Toto le Heros)>

이 책과 위의 두 작품은 모두 몰락한 가족, 가난의 비참함, helpless한 부모, 함께 손을 잡고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남매의 서로에 대한 깊은 사랑과 연민과 집착을 다룬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세 작품 모두 내가 기꺼이 완전한 별 다섯을 주고픈, 내 일생에서 만난 최.고.의. 작품들에 속한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다. 세 작품의 작가(감독) 모두 독자(관객)의 내밀한 슬픔을 후벼파는데 있어 천재적인 솜씨를 갖고 있다는 점도 역시 공통적이다.

<유리동물원>이나 <영웅 토토> 모두 각 작품에 대해서 얘기를 꺼낼라치면 한 바닥이 넘을 테니.......그냥 여기까지만.
 

*** 플라토닉, 에로스, 아가페 또는 정신 vs. 육체***

 뭔가를 유형화 하고 범주화 하는 것은 언제나 불완전함과 왜곡의 위험이 따르지만, 사랑의 종류를 굳이 따져서 범주화한 위의 분류는 때로는 유용하다. 

필립에 대한 매기의 사랑은 서로 닮은 정신세계에 반하고 존경하고 함께 나누는 플라토닉한 사랑과 가엾은 것, 사랑받지 못하고 불행한 것에 대한 아가페적 사랑이 섞인 것이었다. 매기 자신이 늘 사랑을 갈구하지만 가족으로부터(엄마와 오빠) 그것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또한 스스로가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아이라는 인식 속에서 커왔기 때문에 매기는 모든 여자가 외면할 곱사등이 필립을 거리낌없이 사랑한다. 

"그녀는 목이 비뚤어진 양들을 좋아했던 것이다. 튼튼하고 잘생긴 양들은 귀염을 받는데 그리 문제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기에게 귀여움 받고 싶어하는 녀석들을 귀여워해주길 특히 좋아했다."

타고난 반골에 외톨이인만큼 인습을 거부하고 타인의 취향에 아랑곳 않는 면도, 또한 어린시절 여러 행동으로 미루어 본능적 감, 즉 직관과 EQ가 무척 떨어지고 대신 책벌레답게 책에 나오는 도덕적 원칙에 충실하게 사람을 대하는 면도 필립과 사귀는데 일조했을 것이다. (인간 관계에서 내가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 잘 안다...............ㅡ,.ㅡ)

그런 필립과의 사랑에서 2% 부족했던 그것(아, 집안 원수의 아들이라는 점은 차치하고)........그것을 갖고 있는 자가 바로 스티븐이었다.정신세계도 인격도 그저그런 그였지만, 그는 아름답고 건장한 외모를 가진 그야말로 '멋진 수컷'이었다. 

남녀간의 사랑에.......이렇듯 머리와 마음과 몸이 따로 노는 것은 비극의 영원한 테마다. 꼬리를 물고 떠오른 다른 작품들....

앙드레 지드의 <전원교향곡>
목사가 고아가 된 장님 소녀를 데려다 돌보며 세상을 가르쳐주다가 서로 사랑하게 되었으나, 수술로 눈을 뜬 소녀는 자신이 상상 속에서 사랑한 대상이 늙은 목사가 아니라 그의 아들(젊음을 갖춘 "멋진 수컷")이었음을 깨닫는다.

로이드 웨버 또는 매킨토시의 <오페라의 유령> (소설 원작자 이름은 모름)
최고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음미하고 창조해낼 수 있는 지고의 재능, 아름다운 정신세계를 가졌으나 괴물같은 외모의 팬텀. 크리스틴의 재능을 발견한 것도, 그녀에게 기회를 주고 이끌어준 것도, 그녀를 운명처럼 사랑한 것도 모두 팬텀이었으나...........추악한 외모때문에 그를 마음마저 비뚤어진 악당일 수밖에 없고........결국...........평범한 "멋진 수컷"에 지나지 않는 라울이 크리스틴의 사랑을 차지하게 된다. 

우리는 높고 아름답고 남다른 정신세계를 찬양하고 칭송하지만, 이성에 대한 끌림은 일차적으로 인간으로 진화되기 이전의 동물 상태에서 배선된 뇌의 지배를 받지 않던가... 

필립의 사랑은 가슴아프다. <오페라의 유령>의 팬텀의 사랑도 역시 가슴아프다.
신이 그들에게 육신의 조화를 빼앗는 대신 정신의 우월을 줄 때......아름다운 여인과의 사랑은 금단의 열매로 정했으리라. 그 금단의 열매를 맛본 죄로 평생 사무치는 슬픔이나 파멸을 치러야 했던 그들....
 

***친구의 친구를 사랑했네***

 이것 역시 소설과 드라마의 영원한 테마이다. 어쩌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연적이 될 확률이 높은 것은 당연할 지도 모르겠다. 금기의 벽이 높기에 그나마 감춰지고 수그러들지만, 때로는 금기의 벽 때문에 이성과 도덕의 힘이 약한 자들에게는 더한 매력과 도전정신을 불러일으키기도......
 

또 닮은 작품 찾기 놀이를 해보자면....... 

얼마전에 읽은 이디스 워튼의 <순수의 시대>
'매기-스티븐-루시'의 삼각관계는 이 작품에 나오는 '엘렌-뉴랜드 아처-메이'의 삼각관계와 완.전.히. 닮았다. 거의 똑같다. 사교계의 사랑을 받는 좋은 집안의 착하고 아름다운 처녀(루시, 메이)가 좋은 조건을 갖춘 멋진 청년의 구애를 받고(약혼관계) 있는 와중에 불행의 후광을 드리운, 어릴때부터 수상쩍은 뒷말을 들어온 위험스럽고 치명적인 매력(Jane Smiley의 표현을 빌자면 'dark voluptuousness')를 가진 사촌이 방문하고.......그 멋장이 청년과 불행하고 매력적인 약혼자의 사촌이 눈이 맞는..........ㅡ,.ㅡ
두 작품 모두 남자는 빠져서 허우적대며 정신을 못차리고.......dark한 우뤼의 여주인공들은(매기, 엘렌) 그 남자의 사랑에 마음으로 굴복하지만 이성과 양심으로 이겨내고 그를 거부한다............
 

*** 유년기.......황금의 문 ***

 

조지 엘리엇의 문장은 탁월하다. 점점 사건이 꼬이고 갈등과 고통이 증폭되어가는 플롯도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이 작품을 "가장 사랑하는 소설"의 반열에 올려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일부 비평가들은 특별한 재능을 타고난 매기가 자신을 이해하지도, 받아주지도, 용서하지도 않는 몰인정한 오빠(단순하고 고집세고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답답한 캐릭터)에게 돌아가며 작품이 마무리된 것에 대해 불평을 말하지만, 이 소설이 어릴 적 읽은 후에 마음에 깊이 남았고, 지금 다시 읽고나서도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가족이란.........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벗어던지고 싶은 굴레이고 속박이지만....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먼저 사랑하고, 걱정근심 없는 유년기의 황금의 뜨락에서 흠 없는 행복을 함께 나누던 존재.......

결국 매기가 가족(톰)에게로 돌아가고 자연(홍수)에 순응하는 결말은............ 나에겐 더없이 아름답게 느껴졌다. 

채 피어보지 못하고 죽은 두 남매가 어린 시절의 천국 속에서 고사리 손을 잡고 깔깔 웃으며 뛰어놀기를....마음 속으로 간절히 바래본다. 

슬픔은 살아있는 자들의 몫일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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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스 강의 물방앗간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2
조지 엘리엇 지음, 한애경.이봉지 옮김 / 민음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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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금잔디 동산에, 매기, 같이 앉아서 놀던 곳...
물레방아 소리 들린다, 매기, 내 사랑하는 매기야...

이 노래를 들으면 떠오르는 이야기.........

사실 이 노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책이지만 주인공 이름이 매기이고, 물방앗간이 배경이고, 유년시절의 추억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야기라...이 노래와 딱~ 연상의 고리가 연결되고 만다. 책을 읽는 며칠동안, 그리고 지금도 종종 고장난 레코드처럼 이 노래가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되풀이되고 있다........

어린 시절 축약본으로 읽고서 오랫동안 마음에 남았던 책....
기억의 바닥에 가라앉았다가 몇년 전, 고마운 분의 소개로 완역본이 나온 사실을 알게되었다.
(사실 저자는 물론 제목도 잊어버린채...가슴 먹먹한 스토리만 유령처럼 마음에 남아있던 터였다.)
그 후에도 바쁜 생활 속에서 이리저리 미루다가 최근 책을 사서 읽게 되었다.


종교적이고 가부장적인 빅토리아시대애 파격적인 연애를 하고 남자의 필명으로 작품을 발표한 조지 엘리엇. 이 책은 그녀의 자전적 이야기로 알려져있다.

조지 엘리엇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매기 털리버는 미운오리새끼와 같은 소녀였다.
금발에 푸른 눈, 흰 피부가 칭송받던 시절에 검은 머리, 검은 눈에 유난히 피부가 검은 외모때문에 그녀는 집시같다는 소리를 듣곤 했다.

정이 많고 감성이 풍부하고, 영리하고 상상력이 풍부하고 책을 무지 좋아하는 지적인 아이였지만.....그런 특성은 19세기 초 영국 시골의 중류가정 소녀에게는 별 장점이 못되었다.  감정 기복이 심하고 격하고 충동적이고 사리분별을 잘 못하는 면이 두드려져....엄마와 외가 친척들에게 계속 혼나고 욕먹고 걱정듣는.....한마디로 말.썽.꾸.러.기.+ 천.덕.꾸.러.기 소녀였다.
예컨대 검고 자꾸 삐치는 곧은 머리카락에 대해 엄마가 잔소리하자 가위로 마구 잘라버리거나,
오빠가 사촌인 루시에게 잘해주자 샘이 나서 루시를 진흙탕에 밀어버리고....혼날 일이 두려워 집을 나가 집시에게 찾아간 사건이나...
매기가 오늘날의 중산층 가정에 태어났다면 부모는 병원 문고리 여러 번 잡았을 것이 분명하다. ㅡ,.ㅡ

그런 매기를 이해 못하는 고지식하고 꽉 막힌 엄마 (그리고 빅토리아 시대의 엄격하고 쩨쩨한 사회분위기를 대변하는 외가쪽 이모들)
정이 많고 다혈질인 아버지 (그리고 현실감각 없는 연애의 결과로 비참한 가난 속에 사는 아버지의 누이동생 모스 고모)  

외가의 피를 받아 현실적이고 고지식한.........어릴 때는 적당히 고집 세고, 장난꾸러기인 천상 남자애였고 나중엔 시대가 요구하는 바람직한 청년으로 자라나는 오빠 톰 털리버.
그들이 매기의 가족이었다.  

매기는 오빠 톰을 하늘처럼 따르고 사랑했다.
어릴 때부터.......매기는 무작정 오빠를 좋아하고, 톰은 정다운 여동생 매기를 사랑하지만, 그녀의 감당할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측면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비판을 날려 매기에게 상처를 주기도 했다.
어쨌든.......따스한 유년기의 햇볕 속에서.....그들은 즐겁고 행복하고 다정한 오누이였다. 

그런데, 몇대 째 물려온 물방앗간 주인인 유복한 농부 털리버씨는 상류에 물을 끌어 쓴다거나 다리를 놓는다거나 하는 사람들과 소송을 벌이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문제에 휘말려들어간다.  또한 그 와중에 상대편 변호사인 웨이컴에 대한 증오가 점점 커져갔다.

한편 산업혁명의 불씨가 조금씩 불붙기 시작하던 19세기 전반,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 적응하도록, 아들이 자기보다 나은, 그러나 실용적인 교육을 받기를 원했던 털리버씨는 친구의 잘못된 조언으로 라틴어니 유클리드 기하학이니 하는 귀족교육을 하는 목사에게 톰을 보내 공부 시킨다. 이런 추상적이고 비현실적인 학문에 눈꼽만큼의 흥미도 소질도 없는 톰은 그나마 기울어가는 가세에 비싼 돈을 축내며 스승인 목사의 집에서 몇 년의 세월을 낭비한다.

그런데 얄궃게도 그 곳에서 톰과 같이 공부한 소년이 바로 웨이컴의 아들이자 곱추인 필립 웨이컴이었다. 필립은 어릴적 엄마를 잃고 사고로 불구가 되었지만 라틴어와 기하학은 물론이고 미술, 음악 등에 능통하고 조예가 깊은.....영민하고...아름다운 정신세계를 가진 소년이었다.
오빠를 몇 번 방문한 매기는 필립과 이야기를 나누고 우정을 쌓게 되고.....
필립은 지적 갈망과 호기심을 공유하고, 한편으로 정이 넘치는 매기를 깊이 사랑하게 된다.   

몇 년의 세월이 흘르는 동안 거듭해서 소송에서 진 털리버씨는 마지막으로 큰 소송에서 패배하면서 가산을 모두 탕진하고 빚을 지게 된다. 마침 그 물방앗간을 사들인 자가 하필 상대편 변호사였던 웨이컴이었고, 털리버씨는 원수의 밑에서 고용살이를 하면서 물방앗간 관리인 노릇을 하게 되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집으로 돌아온 톰은 사업가인 이모부 아래서 바닥부터 상업 일을 배워 돈을 벌기 시작한다. 라틴어니 기하학을 배울 때는 좌절감과 굴욕의 쓰나미 속에서 찌그러졌던 톰은 근면과 성실, 사업감각이 요구되는 현실 세계에선 믿음직하고 전도유망한 젊은이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고지식하고 단순한 톰은 열심히 돈을 벌어 빚을 값아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목적을 향해 한 발 한 발 나아갔고, 그런 그에게 조금씩 기회도 찾아왔다. 안으로는 산업혁명이, 밖으로는 해상무역이 발달하던 영국, 톰은 해외로 수출하는 상품에 조금씩 투자해서 돈을 불린다.

병든 아버지와 혼란에 빠진 어머니와 함께 물방앗간에서 지내는 매기는, 꿈도 많고 호기심도 많고, 삶에 대한 열정과 격정으로 늘 들끓어오르는 매기는 너무나도 불행한 삶 속에서...........모든 욕망과 희망을 버리고 평화를 찾는....구도자와도 같은 금욕적 철학을 따르고자 노력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우연히 필립 웨이컴을 다시 만나게 된다! 
금욕적 삶을 추구하는 매기에게 필립은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삶의 아름다움과 예술, 지적 탐구와 참된 행복을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설득한다. 그녀에게 책을 빌려주고, 이야기를 나누고, 그녀의 초상을 그리는등.........둘만의 만남이 일년 넘게 지속되었다. 

톰이 가까스로 빚을 갚을 돈을 모아 아버지를 기쁘게 해주려던 무렵에, 매기와 필립의 만남이 톰에게 발각된다. 여동생이 아버지를 불행에 몰아넣고 물방앗간을 가로챈 원수의 아들인 필립, 게다가 본능적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추한 곱사등이인 필립과 만나고 있다는 사실에 경악한 톰은 매기에게 절교를 강요하고, 마지막 순간 필립과 매기는 서로 사랑한다는 마음을 주고받는다. 
 

그 다음은 2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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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체코민속인형극단의 내한공연 <돈 지오바니>를 봤다. 

http://www.hoamarthall.org/ticket/ticket.aspx?cType=view&cId=267&ltype=month&tY=&tM=

진눈깨비 오는 추운 저녁 남편과 애들은 집에 놔두고 나 혼자서 보고 왔다.  꼭 보고싶은 공연이었는데 남편이 시큰둥하길래 애들이나 봐달라고 부탁하고 한 자리만 예매했었다.

공연은........기대했던것 만큼 만족스러웠다.
 

모차르트의 <돈 지오바니> 공연은 접해본 일이 없고 전곡을 들어본 일도 없던 터라.....내용도 재미있고, 음악도 아름답고, 인형극 특유의 맛도 특별했다. 

현대인의 취향에 맞게 세련되고, 완벽하고, 놀랍고, 현란하고, 압도적인.....그런 쇼가 아니라...
정말 오래고 오랜 옛것의 느낌이 배어있는...전통과 정통에 충실한....
썰렁한 유머, 어설픈 동작, 낡은 의상이나 배경 마저도 genuine한 멋으로 느껴지는...
그런 공연이었다. 

지난주, 이 공연에 대한 정보를 어디선가 접하고....꼭 봐야겠다는 느낌이 확 들었다. 

나에게 무척 매혹적이고...개인적으로 호소해오는 두 가지 키워드가 들어있는 공연이니까. 

그 두 키워드는 바로 "체코"와 "인형극"이다. 

먼저 체코.........
 
쿤데라는 과거에도 지금에도 그리고 아마도 미래에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다.

나의 20대...쿤데라의 소설들 중 좋아하는 작품들(<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농담>, <웃음과 망각의 책>, <불멸>, <생은 다른 곳에> 등)은 권당 열번에서 스무번씩은 읽었을 것이다.

쿤데라 할아버지가 체코의 전통 인형극을 좋아했는지, 특별한 감정을 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어쩌면 아닐지도....그의 많은 작품에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으니^^;;;
쿤데라와 체코 인형극은 나와 안동 하회탈 공연만큼이나 아무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사비나가 떠난 후에도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는 프란츠가.....사실은 사비나와 반목했던 스위스의 체코 망명자들 모임에 열심히 참석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쳤던 것처럼..........나는 그저 "체코"에서 온 공연단이 쿤데라 할아버지의 한 조각이라도 되듯 반갑고 특별했다.


그 다음 인형극.........

줄을 움직여 조종하는 인형, 마리오네트에 나는 오랜 옛날부터 매혹되었다.

아마 대개....영화에서 본 이미지였을 것이다.

먼저 <사운드 오브 뮤직> 



 

마리아가 아이들과 함께 퍼펫을 조종하여 보여준 <The Lonely Goatherd>

사랑스러운 멜로디의 요들송과 더불어 잊을수 없이 아름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그 다음............오래고 오랜 기억의 바닥을 박박 긁어 실마리를 찾아내고....구글의 도움을 받아 재구성한 영화 <Lili> 



 

 

 

 

 

 

 

 



이 유명하지도 않은 오래된 영화를 아는 분, 기억하는 분이 있을까???
 

내가 아이적...(초딩? 중딩?) TV 명화극장 류의 프로그램에서 보여준 영화였는데....
멜 파라(오드리 헵번의 남편으로 그나마 기억되는.....)가 우수 쩌는 남자주인공 puppeteer 역할을 맡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난..........원숭이 같기도 하고 멸치 같기도 한 좀 못생긴 배우인 Mel Ferrer를 한 동안 무척 사랑했다.  

90%는 까먹은 영화 줄거리를 구글을 통해 확인해보니...

오갈데 없는 신세가 된 여주인공 릴리가 어찌어찌하여 carnival (곡마단?)과 엮이게 되는데, 그녀가 순수하게 인형들과 소통하는 모습이 곡마단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어 puppet show의 일부로 참여하게 된다.....

그녀는 매력적인,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노는 마술사를 짝사랑하며 상처를 입고...

멜 파라는 그런 그녀를 줄곧 말없이 사랑하며 지켜보며 스스로를 괴롭히는.......(원래 유명한 발레리노였는데 전쟁으로 다리를 다쳐 puppeteer로 전락하엿고, 자신이 조종하는 인형들 뒤로 완전히 숨어버린....컴플렉스 덩어리에 메저키즘의 극치를 달리는.........)

으아.........나으 보호본능 완전 자극하는 캐릭터  ㅡ,.ㅡ

그가 조종하는 인형들은 그의 분신이고 그의 몸이고 그의 영혼이고 그가 내밀 수 없는 손, 달릴 수 없는 다리...그의 육신이었다.......

이 영화가 어린 시절 나에게 그토록 깊은 인상을 주었고, 모든걸 다 까먹어버리는 블랙홀 같은 나의 뇌세포 속에서도 survive할 수 있었던 것은................그 지독하게 우수어린 멜 파라의 캐릭터, 그리고.......puppet, marionette의 매력 때문이었으리라.......

 

그 다음....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3편 중 하나에 드는 <베로니카의 이중생활>

(
다른 두 편은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와 <토토의 천국>이다.)



 

 

 

 

 

 

 

 



 

이 영화에 대해서는 따로 한 바닥을 써도 모자를 판이지만........

암튼 영화에서 비밀로 가득한 puppeteer는 아주 중요한 요소이다.

인형극 공연자는 발레리나가 춤을 추다 쓰러진 후.............번데기에서 나비가 태어나듯...껍데기(육신)를 벗어던지고 날아오르는 천사(영혼)의 이야기가 담긴 공연을 선보이고.........그는 이후에도 줄곧 베로니카에게 접근하고, 신호를 보내고, 치고 빠지며(?) 그녀 주위를 맴돈다. 이 남자와 어떻게 되었는지....영화의 결말이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 (DVD를 갖고 있으니 언제 한 번 다시 봐야겠다.)

암튼.........

Puppet과 Puppeteer는........
인간과 인간의 운명을 조종하는 절대자의 관계에 대한..........진부하리만큼 뻔한 은유가 아닐 수 없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그 진부함이 진부하게 느껴지지 않을 만큼 세련되고 아름답게 그려냈다. 
(키에슬롭스키 감독이 이 영화에서 하고싶었던 말들이 무엇이었을까....알 것도 같고 모를 것도 같고....)

내가 푸펫...마리오네트에 매혹되는 이유도.............어쩌면.............베로니카, 아니 키에슬롭스키 감독의 존재론적 욕구와 닿아있는지도 모르겠다.

.....................................

공연이 끝나고 걸려있는 인형들은...........무섭다. 
 

마치 생명과 영혼이 빠져나간 육체처럼..............

 
막이 오르면...........죽어있던 인형들에 또 다시 생명과 영혼과 활기를 불어넣는 pupeteer들의 삶은...........멋질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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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리스는 올해 10살 된 딸내미의 애칭?? 입니다. 유치원과 미국에서 썼던 영어이름이기도 하고..) 

오늘은 아이들 개학날.
무민이 녀석은 예상했던 대로 개학식 끝나고 친구네 집으로 내뺐고 (10시부터 3시까지 장장 5시간을 놀고 왔다.)

앨리스와 둘이서 집 근처 샌드위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바로 옆에 있는 대형서점에서 죽치고 앉아 책을 실컷 보고 왔다.

그런데....가는 길에....앨리스가 이런 얘기를 했다.

"엄마, 나는 가끔...이상한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좀 이기적인 생각일지도 모르겠는데요...
내가 눈을 감으면 세상이 안보이잖아요. 혹시 그때 잠깐 세상이 사라지는건 아닐까?
어쩌면...이 세상에 나 혼자만 있고 다른 모든건 다 그냥...."

나는 적당한 표현을 찾지 못하는 아이의 말에 끼어들고 말았다.

"그러니까...너만 진짜로 존재하는거고 다른건 다 환상이 아닐까...그런 생각?" 

"네, 맞아요. 그런 느낌이요......"

나는 맘속으로 확~ 놀랐다. 이것이 바로 유아론(唯我論), soliptism의 정수 아닌가???

나도 어린 시절 이런 생각을 한 일이 있고...이 생각에 매혹되고 사로잡혀 혼자서 엄청 곱씹고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가 나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생각을 했으며 그것이 철학사의 한 개념으로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또 은근 반갑기도 하고 서운하기도 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내가 그 생각을 한건....앨리스보다 훨씬 컸을 때, 중학생? 아님 적어도 고학년이 되어서가 아닐까 싶은데... 

앨리스에게 엄마도 어린시절 그런 생각을 했었고 그 생각이 무척 신기하고 충격적이었다는 얘기를 해주고...
조금 있다가 샌위치 집에 들어가서....좀 더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니까.....내가 걸어갈 때....나는...내가 생각을 하고 일부러 다리를 움직여서 걷는거잖아요? 그런데 주위의 다른 사람들도 나처럼 그렇게 걷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그런게 아니라 그냥 저절로 움직이는게 아닐까?"
 

"그러니까 좀비처럼?"

"하핫 꼭 그런건 아니구요."

아...이건 어린시절 내가 생각했던 유아론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의식의 주관성"에 대한 통찰에까지 이른 것 아닌가???
 

식당 안에서 앨리스는 자기가 가끔 하는 이상한 생각을 한가지 더 들려주었다.

"엄마, 그리고 나는 가끔...어떤 단어에 대해 집중해서 막 생각하면......아무 뜻도 없어지는 것 같아요."
 

이건 또 무슨 소린가...금방 와닿지 않아서 다시 되물었다.
  

"그러니까...snake가...왜 뱀인가...그런거요."

 "뭐라구?? 글쎄??"

"음...그러니까....... S가 왜 "에스"인지...잘 모르겠다는 거죠."
(아이가 정확히 어떤 글자와 소리의 관계를 의미한건지 모양의 관계를 의미한건지 둘 다인지 그밖의 뜻인지는 모르지만.....)

"그래...원래 뱀이 snake인것도 아니고 그냥 그걸 뱀이나 snake라고 부르는건 사람들의 약속일 뿐이야. 그러니까 사실 꼭 뱀이거나 snake일 필요는 없는거지. 사람이 만들어낸 거니까...네 느낌이 어떤건지 알 수 있을거 같아......"

암튼....기호나 상징의 "자의성"에 대한 의문도......자못 진지하지 않은가....

그 후 샌드위치를 베어먹으면서 우린 계속 수준높은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 ^__________^

"엄마,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사람이 있어요?"
 

"글쎄, 일란성 쌍동이? 하지만 쌍동이도 완전히 똑같은건 아냐..."(나의 지식의 빈약함으로 말꼬리를 흐리고...) "무엇보다도 자라나면서 서로 다른 경험을 하기때문에 점점 더 다른 사람이 되지."

"엄마, 사람을 복제할 수도 있어요?"

"기술적으로는 가능할지도 몰라 ~~~ 복제 동물, 체세포 핵 이식...어쩌구저쩌구(중략)~~~ 하지만 지금 현재 대부분의 사회에서는 사람을 복제하는걸 윤리적으로 금지하고 있지. 나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왜 나쁜 일이죠?"
 

"왜냐하면....원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과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사람의 기분은 어떨까?
그리고 사람을 무한정 복제할 수 있다면 이상한 사람들이...자기와 똑같은 사람 또는 자기 가족과 똑같은 사람을 여러명 복제할 수도 있지. 그런데 그런 식으로 만들어진 인간이 모두 귀하게 대접을 받을까? 너 스타워즈 클론의 전쟁에 나오는 클론 군대 생각나지? 그 군인들은 기계처럼 싸우기 위해 복제된거잖아...
그와 마찬가지로 어떤 부모들은 자기 자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아이와 똑같은 존재를 하나 더 spare로 만들어놓을 수도 있겠지. 자기 아이가 다치거나 장기가 손상되면 그 spare아이에게서 그런걸 얻으려고 할 수도 있고...
그밖에 복제인간을 나쁘게 이용할 방법은 아주 많단다........
 또 다른 이유는...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고 있는데.......인간이 인간을 만드는 일은 불경하고 나쁜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지금도 사람이 사람을 만들고 있잖아요?"

(I know what you mean, baby~ ㅡ,.ㅡ)

"그래, 하지만 그건 자연적인 방법인거고....인간의 기술로 만들어내는건 또 다른 문제지."

 
대략 이런 얘기들을 나누었다.
아이들과, 더구나 앨리스와 이런 얘기를 나눈건 처음이었고....신선한 충격이었다.

앨리스는 나름 책도 많이 읽고 또래 중 똘똘한 편이긴 하지만..............뭐랄까........아이가 피상적이고 감각적인걸 좋아하고...(이른바 우뇌형)...말하는건 특히나 언제나 어린아이같고 횡설수설하기 때문에....앨리스가 이런 얘기를 하는건 너무나 뜻밖이었다.

둘째라서 그런지........아무런 사심 없이(우리 아이 영재 났네~ 이런 사심말이다.)
그냥........앨리스와 이런 얘기를 나눌 수 있는게 기쁘다.

딸내미와 도란도란 피상적이고 신변잡기적인 얘기들을 나누면서 데이트하는 것만도 행복한데...
때로는 이런..........형이상학적인 얘기, 철학적인 얘기, 사회적인 얘기, 서로의 정신세계도 함께 나눌수 있다면....그 어찌 기쁘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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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0-01-30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은 몰라도 앨리스는 '생각하기'를 좋아하는 아이로군요.
(저, 앨리스에게 급관심입니다~ ^^)

군자란 2010-02-01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앨리스가 던지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낭 간단히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없는 것 같네요. 어렸을때 생각하는 힘을 기른다는게 쉬운건 아닌데...부럽습니다.

이네파벨 2010-02-01 14: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nine님, 군자란님, 찾아주셔서 감사해요^^

앨리스는 둘째라서 그런지...마냥 아기처럼 여겨왔고..또 아이의 생각이 성장하기를 바라는 마음보다도 늘 아기로 남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큰 듯한...(큰애에 대한 마음가짐과 또 아주 다르더라구요.) 그런 느낌인데...
아이의 뜻밖의 말에 놀라게 되네요.

어쩌면 이런저런 관심사로 물들지 않은 아이의 여유롭고 깨끗한 마음이야말로 진정 "철학(이라기보다 생각)"을 할 수 있는 좋은 그릇이 아닐까....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