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로운 지적 모험을 위한 유용한 여행안내서
원고 의뢰를 받고서 많이 고민했다. 과학책 몇 권 번역했을 뿐인데 과학 분야의 '전문가 리뷰'를 맡아도 되는 걸까? 난감했다. 나는 과학에 대하여 막연한 동경과 애정을 품어왔다. 나에게 과학은 우리 삶을 더 풍요하게 해주는 경이로운 선물이자,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가 낳은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지적 활동이며, 가장 높은 수준의 정신 활동이 빚어낸 지고의 아름다움이다. 사실 나는 과학 활동에 담긴 땀과 눈물, 괴로움과 쓴맛은 피해가며 오롯이 과학의 말랑말랑하고 달콤한 부분만을 즐기는 딜레탕트적 과학애호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같은 취미나마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도 어쩌면 의미 있겠다 싶어 감히 과분한 책무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에게 있어서 과학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고민이 자연스럽게 가 닿은 책이 바로 이 『과학으로 생각한다』이다. 과학과 인간, 과학과 세계, 과학과 인문학의 소통에 관심이 많은 독자로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을 전공한 저자들이 펼쳐놓은 이야기에 귀가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뉴턴, 다윈, 아인슈타인, 양자 이론, 괴델, 튜링, 분자생물학으로 구성된 1장을 읽어나가면서 '이크, 책을 잘못 골랐나?' 하는 생각이 들었음을 고백한다. 여기저기에서 많이 들어본 듯 진부하고, 발을 물에 적시지조차 않고 표면만 살짝살짝 스쳐 지나가는 소금쟁이의 모습처럼 피상적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초중고생 논술대비 참고서류의 기획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잠시 접어두고 조금 더 읽어 나갔다. 그러다가 과학철학에 대해 본격적으로 논의하는 2장에 들어서면서 나의 경박한 선입견은 구름처럼 걷혔다. 생소하면서도 흥미로운 새로운 세계, 지식의 블루오션이 눈앞에 펼쳐진 기분이었다. 이 장은 마흐, 비트겐슈타인, 비엔나 모임의 논리실증주의 철학자들, 포퍼, 파이어아벤트, 라카토슈 등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에 걸쳐서 과학을 논의한 철학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제각기 다르지만 과학적인 방법으로 과학을 규정하고 과학의 사례를 통해 지식을 추구하고 세계를 파악하는 방법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같은 범주로 묶을 수 있다. 사실 나는 사변적이고 형이상학적이고 자기들만의 언어를 사용하는 철학자들의 이야기에는 늘 벽이 느껴지곤 했다. 여기에 소개된 내용도 결코 이해하기 쉽거나 친근한 것은 아닐 터인데 저자는 일반 독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친절하고 흥미롭게 핵심을 전달해주고 있다.
2장이 다소 난해하고 도전적인 주제를 다루었다면 그 다음 이어지는, 도킨스, 윌슨, 데닛, 굴드와 르원틴을 통해서 진화론이 세계관과 사회에 미친 영향을 논의하는 3장은 전혀 다른 템포와 리듬으로 배턴을 받는다. 한 사람, 한 사람, 워낙 유명하고 흥미로운 인물들인데다 이 부분을 쓴 저자의 맛깔스러운 글 솜씨는 재미를 배가시킨다. 4장에서는 다시 과학 자체에 대한 성찰로 돌아와 쿤, 해킹, 라투르, 갤리슨, 사회구성주의 학자들을 다루고 있다. 역시 토머스 쿤을 제외하고는 모두 생소한 인물들이었다. 과학철학뿐만 아니라 과학사, 과학사회학 등 과학 자체를 비판적으로 연구하는 이들 학문은 내가 그동안 품고 있던 과학에 대한 막연하고 모호한 생각에 찬물을 끼얹는 느낌조차 주었다. 5장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파헤친다. 앞서 논의한 과학에 대한 비판적 시각의 필요성을 입증하는 우생학 사례, 보편주의, 집합주의, 무사무욕, 조직적 회의주의를 과학의 규범이자 에토스라고 주장한 과학사회학자 머튼, 현대 과학 정책에 깊은 영향을 준, 과학을 사회의 도구로 규정하고 통제해야 한다는 버널과 과학 활동 그 자체에 독립적 의미를 부여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폴라니의 논쟁 등이 여기에서 다루어진다.
그 다음, 마지막 장에서 다루어진 '소칼의 속임수'에서 촉발된 '과학전쟁'은 소설처럼 극적인 흥미를 유발하는데다 이 책의 주제를 관통하는 상징적인 사건이다. 이것은 수리물리학자인 앨런 소칼이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인문학자들이 과학에 대해 쓴 글들을 짜깁기해서 만든 엉터리 논문을 한 인문학 저널에 출판하고 또 다른 인문학 저널을 통해 자신의 속임수를 폭로한 사건이었다. 소칼의 의도는 '상대주의적 과학관을 퍼뜨리고 과학의 객관성을 부인'하는 과학학자 포함 인문학자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것이었다. 과학자와 과학학자들 사이의 골 깊은 갈등을 드러냈지만 이를 계기로 양 진영이 서로에 대한 이해와 통합을 모색한다. 학제를 뛰어넘는 통섭이 강조되는 시대 풍조 속에서 당연한 흐름일지도 모른다. 앎에 대한 길은 결국 하나로 통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마지막으로 과학과 페미니즘, 과학에서 여성이 처했던, 그리고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독특한 위상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장에서 특히 부각되었지만 논쟁적 주제들에 대한 저자들의 차분하고 공정한 시각이 돋보인다.
이 책의 제목은 '과학으로 생각한다'이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과학으로 생각하기'에 해당되는 주제와 '과학을 생각하기'에 해당되는 주제들로 구분 지을 수 있다. 과학자들이 생산한 담론을 중심으로 과학이 삶과 세상을 어떻게 설명했으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다루는 주제들과 과학의 경계 바깥에서 과학을 대상으로, 과학 그 자체에 대해 숙고하고 성찰한 주제들이 마치 탁구대 위에서 공을 주고받듯 펼쳐진다. 좀더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과학 안쪽에서 바깥을 내다보는 시선과 과학 바깥쪽에서 안쪽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이는 책의 부제인 '과학 속 사상, 사상 속 과학'에 함축되어 있듯 에셔의 '손을 그리는 손Drawing Hands'의 이미지를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면 과학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메타과학 활동 자체가 자기지시적이고 회귀적인 호프스태터적 세계의 한 사례처럼 느껴진다.
각설하고, 짤막짤막한 글로 많은 수의 인물과 사상을 소개한 이 책은 입맛을 돋우는 요리들을 조금씩 담아놓은 애피타이저 접시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이 책 한 권으로 배부르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 책은 어느 한 항목에 멈추어서 그곳으로부터 더 깊이, 더 멀리 탐험하고 싶은 독자들을 위한 좋은 여행안내서가 될 거라 확신한다. 각 항목의 말미에 실린 '더 읽어볼 만한 자료들'은 유용한 팁이 될 것이다. 또한 애피타이저로 훌륭한 요리솜씨를 보여준 저자들이 만들어내는 메인 요리를 맛보고 싶어진다. 어려운 내용을 쉽고 재미있게 소개하는 빼어난 솜씨를 살려서 과학사와 과학철학의 난해한 주제들을 재미있게 소개하는 본격적인 책들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