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장에 달린 자물쇠는 마음만 먹으면 단 한 번의 충격으로 망가뜨릴 수 있는 조악한 물건이었지만 소녀들은 그 작고 허술한 장치에 자신의 비밀을 맡겼다. 다른 누군가가 읽으면 부끄러워서 죽고 싶을 일기장. 하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멋진 누군가가 읽어주었으면 하는 일기장. 소녀들은 특별한 누군가가 읽어주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그 상대를 향해 조금쯤은 꾸며낸 자신의 일상을 적으면서 지루한 밤의 한 때를 보냈다. -12쪽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있으면 그걸 보고 있던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는 법이다. 멋진 일에 가슴이 설렐 때면 반드시 누군가가 '그따위 시시한 것'하고 속삭인다. 그렇게 해서 까치발을 하다가 주저앉고 손을 내밀다가 뒤로 빼고 조금씩 뭔가를 포기하고 뭔가 조금씩 차갑게 굳어가면서 나는 어른이라는 '특별한 생물'이 될 것이다. -32쪽
마당에 널어 햇볕을 쪼인 이불의 보송보송한 단내. 지금부터 무슨 일이든 적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달력의 여백. 아직 펼쳐보지 않은 하얀 페이지. 앞으로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이 가져다줄 행복한 예감으로 가득하다. 한 달만 지나면 그것이 환상이었음을 깨닫게 되겠지만 해마다 똑같은 행복한 예감으로 가득한 것을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단순하고 진보가 없는 생물인가. 여름방학의 시작이 행복한 것은, 뭔가를 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33쪽
진실? 그런 게 어디에 있다는 겁니까? 진실, 이 말을 입에 담은 순간 그 말이 갖는 허구의 맹독으로 혀가 썩기 시작한다는 것을 난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이 본 것밖에 믿지 못합니다. 아니, 믿고 싶은 것밖에 보지 못합니다. 진실이란 우리가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89쪽
음식을 먹는다는 건 때로 허망하고 부끄럽고 서글프다. 사자처럼 한 번 먹으면 한 달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 번 먹으면 한 달 동안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루에 몇 번씩 배를 채우기 위해 어김없이 부엌에서 부지런히 움직여 음식을 만들고 입을 벌려 음식을 넣고 우적우적 씹어야 하다니, 얼마나 비참하고 굴욕적인가. 더욱 서글픈 것은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손은 저절로 움직여 남김없이 음식을 집어먹고는 부른 배를 안고 편안해한다는 것이다. 평소에 제아무리 점잔빼는 사람이라도 어차피 동물이긴 마찬가지라는 사실이 실감나는 순간이다. -15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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