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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빨간 표지에 다소 촌스러워보이는 옷을 입고 있는(북한 아가씨가 생각나는 듯한) 여자가 그려진 책. 이 책에 대해 여기 저기서 호감어린 이야기들을 들었지만 '표지가 마음에 안 들어'라는 이유로 왠지 읽기를 미루기만 했는데, 우연히 도서관에 갔다가 서가에 꽂힌 책을 보고 지금 안 읽으면 못 읽겠구나 싶은 마음에 읽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들이 언급하고 있지만 "오전 9시의 담배는 절망감의 표현이다."라는 첫문장은 건조함과 쓸쓸함, 절망감 등의 감정들을 담담하게 이야기하는 듯하다. 이어지는 이야기도 슬픔을 억누른 채 작은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마치 독백과 같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수지라는 한국인 1.5세. 마냥 얌전하게 부모님 말씀을 따르던 착한 딸이었던 그녀는 대학시절 유부남 교수와 눈이 맞아 부모로부터 '양갈보'라는 소리를 듣고 결국 집에서 나와 부모와 연을 끊는다. 하지만 부모님이 누군가에게 총살당하여 죽자 그녀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돌아가고, 그곳에서 그녀의 언니 그레이스는 다시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선언한다. 이로써 낯선 땅에서 부모도, 언니도 없이 지내게 된 수지. 그녀의 일상도 그녀의 말투처럼 건조하고 고독하며 사건없는 일상이 이어진다. 여전히 유부남을 만나고 있고, 몇 안되는 친구들을 가지고 있으며, 여러 직장을 전전하다가 그나마 자신의 모습을 감출 수 있는 통역사란 직업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런 그녀가 통역때문에 알게된 한 한국인으로부터 부모님에 대한 험담을 듣게되고 대체 부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헤쳐보기 시작하는데...
수지는 한국인 1.5세로 미국 입장에서 봤을 때는 한국인이라는 소수민족일 뿐이고,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반은 미국인인 사람이다. 한국인과 미국인 그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이기때문에 그녀의 고독과 절망은 왠지 생생하게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큰 줄거리는 부모님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지만 그 이야기에만 치중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과 같은 처지에 있을 언니 그레이스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도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고 있다. 동생 수지를 끔찍스럽게 싫어하던 언니, 가까이 가려고 하면 자꾸 밀어냈던 언니. 그런 언니를 수지는 회상하고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그리워한다. 부모가 죽은 사건의 진상은 무엇인가와 더불어 과연 그레이스와 수지는 화해할 수 있을 것인가하는 것도 책을 읽으면서 생긴 하나의 궁금증이었다.
결말부에서 내 궁금증은 모두 해결된다. 부모가 실제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누가 부모를 죽인 건지, 언니는 수지를 용서해줄 수 있을 것인지 등등. 하지만 모든 결말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여전히 씁쓸하고, 안타깝기만 하다.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야기들이 100프로 허구가 아님을 알고 있기에, 괜시리 눈물이 핑 돌았다랄까. 아메리칸 드림을 안고 떠난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이들처럼 힘든 삶을 살았을까. 다문화 사회라고 주장하는 미국은 실제로 얼마나 폐쇄적 사회인가. 라는 생각들 때문에 책을 놓고도 한동안 마음이 편치 않았다. 수지의 고통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좋겠지만 결국 그것은 각자의 몫으로 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