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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 제120회 나오키상 수상작
미야베 미유키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05년 12월
평점 :
미야베 미유키. 몇 번이나 이름을 접했지만 책으로는 뒤늦게 만나본 그녀. 꽤 두꺼운 페이지의 압박때문인지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나와 독서 취향이 비슷한 분들의 호평, 그리고 무엇보다 내게 있어서는 하나의 보증수표라고 할 수 있는 '나오키 상 수상작'이라는 점에서 집어들게 되었다.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녀는 이야기 속으로 나를 강하게 빨아들였다.
우리나라로 치면 타워팰리스쯤 될 법한 호화로운 아파트. 반다루 센주기타 뉴시티의 웨스트 타워. 폭풍우가 거세게 치던 밤. 그 곳의 2025호에서 일가족이 살해당한 채 발견된다. 단순히 일가족이 살해되었다는 점만으로도 사회적으로 큰 혼란을 불러일으킬 터인데, 알고보니 살해당한 사람은 일명 '버티기꾼'들이었다. 비바람 속에 가려져 끝없이 혼란에 혼란을 불러일으키는 사건이 이 책 한 권 속에 녹아있다. 이야기는 독특하게 르포르타주 형식을 취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그 사건에 관련된 인물들의 입을 통해서 사건의 실마리를 하나씩 하나씩 얻어가고, 그 것을 통해 사건이 있던 날의 정황을 추정해본다. 일정한 시점이 없고, 인칭이 없기때문에 독자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그들의 의견을 수렴할 수 있고, 그 개개인의 사정을 귀담아 들으며 독자 스스로도 사건을 구성해볼 수 있다. 실마리를 하나씩 하나씩 툭툭 던지다가 작가는 마지막에 사건 현장에 있었던 이의 입을 빌려 조심스럽게 진상을 털어놓는다.
간단하게 책의 내용을 요약해버리면 '아라카와 일가족 4인 살인사건'이 되어버리겠지만 실상 속을 들여다보면 "자석이 쇳가루를 끌어 모으듯 '사건'은 많은 사람을 빨아들인다." 때문에 책 속에서는 꽤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하고 외국인 이름은 다 고만고만하게 생각하는 나의 단순함 때문에 초반에는 꽤 혼란스러워하며 책을 읽었다. (나와 같은 곤란을 겪지 않기 위해서는 등장인물을 간단하게 요약하는 센스가 필요할 듯) 저마다의 이야기를 들어가면서 사건도 사건이지만 그들 개개인에 대한 안타까움이나 동정을 느꼈다. 살인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나와는 동떨어진 세계인 듯 싶지만 그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내 주위에서 한 번쯤은 봤음직한 그런 인물들이었기때문이다. 게다가 등장인물들은 작거나 크거나 저마다 가족간의 갈등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게끔 만들어줬다.
등장하는 많은 사람들뿐만 아니라 사건의 배경이 된 2025호가 경매로 넘어갔다는 점에서 부동산이라는 소재와도 맞닿아 있다. 살해당한 사람들은 매입자가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려는 '버티기 꾼'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허왕된 꿈을 가지고 호화 아파트를 사려고 했던 사람들. 그리고 그 곳에 사는 사람들. 커다란 상자같은 아파트 속에서 그들은 어떻게 변해갔는가에 대해 접하면서 가끔씩 뉴스에 나오는 노인이 죽은지 한 달만에 발견되었다와 같은 이야기들이 생각이 났다. 삭막하고, 인간적인 정이 없는 곳.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이웃의 의미를 알까. 그리고 또 애초에 허왕된 꿈을 쫓아 무리해서 아파트에 입주한 사람은 과연 그 아파트를 얻어서 행복했을까라는 생각들이 들었다.
그동안 일반적으로 봐온 추리소설과는 구성이나 방식이 전혀 다르기때문에 전통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처음 몇 페이지를 읽고 실망스러워할 지도 모른다.(물론, 워낙 재미있기때문에 전통 추리소설이 아니라고 책을 놓아버릴 독자는 없을 듯) 책 속에는 눈 씻고 찾아봐도 똑똑한 탐정, 형사는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독자에게 "범인이 누군지 한 번 맞춰봐"라고 도전해오지도 않기 때문이다. 화자는 담담하게 사건에 연류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들의 시각에서 전해주고, 독자에게 독자의 시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을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사회상, 가족상, 한 개인의 꿈 등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줬던 작품이었다. 딱 한 작품을 접해봤을 뿐인데 그녀에 대한 나의 기대감은 너무도 커져버렸다. 단 한 작품으로 내가 좋아하는 작가 반열에 올라버린 그녀. 앞으로의 작품들도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