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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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습관이라는 것이 있다. 어떤 일 혹은 어떤 사람과 어떻게 처음을 시작하느냐에 따라 설정되는 관계의 틀 말이다. 평소 늦잠을 자던 버릇이 새 집으로 이사한 뒤 말끔히 고쳐진 것처럼,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좋은 틀을 짜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어디 일뿐일까. 새로운 사람, 새로운 장소, 새로운 시간, 그 어떤 것이라도 처음 시작은 우리에게 좋은 관계의 습관을 짤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준다. 지금 나에게 그 기회가 왔다는 걸 잊지 말자. -29쪽

물이 끓는 100도와 그렇지 않는 99도. 단 1도 차이지만 바로 그 1도가 얼마나 큰 차이를 만드는가. 그러니 한 발짝만 더 가면 100도가 되는데 99도에서 멈출 수는 없어. 암, 그럴수는 없지. 99도까지 오느라 들인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말이야. -133쪽

나도 집에 거울이 있는 사람이니 나의 객관적인 외모가 B+라는 거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얼굴로 살고 싶다. 부모님이 물려준 이목구비 예쁜 얼굴이 아니라 밝고 환해서, 당당해서, 쉽게 포기하지 않아서, 매사에 최선의 최선의 최선을 다해서 사랑스럽고 예뻐 보이는 얼굴로 살고 싶다. -133쪽

막내누나, 난 지금 권투 시합중이야. 센 상대방 선수에게 잽을 많이 맞아 비틀거리다가 방금 정통으로 한 방 맞아서 링 위에 뻗어 있어. 심판이 카운트를 하기 시작했어. 하나, 둘, 셋. 그러나 나, 정신은 놓지 않았더. 숫자 세는 소리 똑똑히 듣고 있어. 그러면서 힘을 비축하고 있지. 열 세기 전까지만 일어나면 되는 거 아니야? 그 때 일어나서 다시 싸우면 되는 거 아니야? 그러니까 막내누나, 지금 링 위에 누워 있다고 걱정하지마. 열까지 세기 전에 꼭 일어날께.-141쪽

외로움은 혼자 사는 사람들의 인생 패키지 안에 있는 품목 같은 게 아닐까. 장미에 가시가 있는 것처럼 독신으로서의 자유로움과 독신이라서 좀더 외로운 것은 한 묶음이다. 자유로움만 택할 순 없다. 단독 포장이 아니라 패키지니까. -142쪽

다시 한 번 라주 대령의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썩 잘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눈매가 서늘하고, 웃는 모습도 천진하다. 무엇보다도 함부로 할 수 없는 품위가 배어나왔다. 신기하다. 도대체 그 품위는 어디서 나오는 걸까? 군인이라는 직업이나 지휘관이라는 직책은 아닐 거다. 군 지휘관이라고 모두 라주 대령 같지는 않을 테니까. 사람의 품위를 결정하는 게 외적 조건 같은 하드웨어가 아니라는 건 확실하다. 그럼 답은 분명해진다. 결국 품위는 자기 존재에 대한 당당함, 자기 일에 대한 자부심, 통제력, 타인에 대한 정직함과 배려 같은 소프트웨어에서 나오는 거다. 이것이 없다면 왕이라도 전혀 품위가 안 날 것이고, 이것이 있다면 일개 농부라도 품위가 넘칠 것이다. 나는? 난, 아직 멀었다. 저 소프트웨어가 대단히 탐나지만 하루아침에 얻을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197쪽

내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워하는 것은 다름아닌 헛된 이름. 허명(虛名)이 나는 일이다. 평가절하도 물론 싫지만 지금의 나 이상으로 여겨지는 것이 제일 무섭다. 나의 실체와 남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차이를 메우기 위해 부질없는 노력과 시간을 들여야 하는 것이 제일 두렵다. 실제로는 오이인데 사람들이 수박이라고 생각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길쭉한 오이는 남 앞에 설 때마다 크고 동그랗게 보이려고 무진장 애를 쓸 것이고, 있지도 않은 줄무늬까지 그려넣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빈틈없이 변장을 했으면서도 자기가 오이라는 것이 드러날까 봐 늘 마음 졸이며 살아야 한다. 기껏해야 백 년인 인생인데 그렇게 남이 정해놓은 허상에 자기를 맞추느라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하면서 말이다. 나는 아무리 수박 노릇이 근사하고 대접을 받는다 하더라도, 가짜 수박보다는 진짜 오이가 훨씬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얼치기, 함량미달, 헛 이름이 난 수박보다 진국, 오리지널, 이름값 하는 오이가 훨씬 자유롭고 떳떳할 테니까. 그래야 제 맛을 내면서 자기 능력의 최대치를 발휘할 수 있을테니까. 조금씩 커가는 과정을 스스로 만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가짜배기 수박이고 싶은가, 진짜배기 오이이고 싶은가? -263쪽

'왜 계속하고 싶은건데?' 답은 아주 간단하다.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기 때문이다. 내 피를 끓게 하기 때문이다. -282쪽

나는 인생이란 산맥을 따라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산맥에는 무수한 산이 있고 각 산마다 정상이 있다. 그런 산 가운데는 넘어가려면 수십년 걸리는 거대한 산도 있고, 1년이면 오를 수 있는 아담한 산도 있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산이라도 정상에 서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한 발 한 발 걸어서 열심히 올라온 끝에 밟은 정상일 테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산의 정상에 올랐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산은 또 다른 산으로 이어지는 것. 그렇게 모인 정상들과 그 사이를 잇는 능선들이 바로 인생길인 것이다. 삶을 갈무리할 나이쯤 되었을 때, 그곳에서 여태껏 넘어온 크고 작은 산들을 돌아보는 기분은 어떨까?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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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05-11-2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멋지고 힘을 주고 자신을 사랑하게 하는 법이 가득한 책이군요. 아직 못 읽어봤는데 읽어봐야겠어요

이매지 2005-11-29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을 때마다 참 멋진 여성이라는 생각이 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