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책 이야기에 앞서 오래전 친구가 적어준 ‘이런 남자 만나라’를 먼저 소개하려 합니다.

(특정 남성 비하가 아님을 밝혀둡니다. 소심소심.)

 

잔잔하고 감성적인 노래+클래식+재즈 좋아하는 남자 안 됨.

그냥 아이유나 소시 좋아하는 단순한 남자!

맛집 꿰고 있고 분위기 좋은 데 잘 알고 식성 까탈스런 남자 안 됨!

김밥천국이든 나발이든 아무거나 우걱우걱 소처럼 잘 먹는 단순한 남자!

책 좋아하고 독립영화, 상 받은 영화 잘 보는 진지병 걸린 남자 안 됨.

<엽기적인 그녀> 같은 거나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나 시시한 할리우드 무비도 군말없이 재밌다고 껄껄대면서 보는 남자여야 됨.

 

이런 이야기와 함께 그 친구는 '문과생 남자는 안 된다' '예술하는 남자도 안 된다'며 '남자라면 공대생'이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하지만 『경이의 시대』를 편집하면서 저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탄식했습니다.

 

'아, 과학하는 남자도 안 되겠어……'

 

뜬금없이 왜 남자 이야기냐구요? 『경이의 시대』가 '과학자(특히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잠을 잊는 것은 기본이고, 밥때도 놓쳐서 옆에서 떠먹여줘야 할 판에, 무모할 정도로 자기 삶을 바쳐(심지어는 목숨까지 걸고) 과학에 매진해 과학 연구에 새로운 상상력과 흥분을 불어넣은 과학자들. 이들의 이야기가 『경이의 시대』에 담겨 있습니다.

 

흔히 낭만주의 시대 하면 문학이나 미술, 음악 같은 예술적 성취를 떠올리지만, 이 시기 과학사적으로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생겼습니다. 『경이의 시대』의 저자 리처드 홈스는, 직접 제작한 망원경을 통해 태양계의 대중적인 개념을 완전히 바꾼 윌리엄 허셜과 그의 여동생 캐럴라인 허셜, 자신의 목숨을 건 실험으로 화학 마취의 시작을 연 험프리 데이비를 비롯해서 조지프 뱅크스, 토머스 베도스, 마이클 패러데이 같은 '과학자'들의 생생한 이야기 그리고 이들의 발견과 발명을 돌파구 삼아 영감을 얻었던 메리 셸리(『프랑켄슈타인』), 콜리지, 키츠 같은 낭만주의 작가들의 이야기를 통해 다채롭고 흡입력 있는 내러티브로 낭만주의 시대를 채워갑니다.

 

800쪽이 넘는(본문 796쪽+화보 24쪽) 책이라 선뜻 다가가기 힘들어 보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면 『경이의 시대』는 술술 읽힙니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 읽어봤을 위인전처럼 전기(傳記) 형식을 취한 책이기 때문입니다. 달걀을 품은 에디슨의 에피소드에 웃음 지은 적이 있다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경이의 시대』는 어른이 되어 다시 읽는, 조금 더 살이 붙은 과학위인전입니다. 평전처럼 한 인물의 삶을 세밀하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중간중간 중요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과학적 발견, 과학자 간의 교류 등에 대해서 생동감 있게 소개하기 때문에 낭만주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한 편의 잘 짜여진 소설을 읽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이의 시대』의 중심에 있는 조지프 뱅크스, 윌리엄 허셜, 험프리 데이비, 이 세 사람이 모두 매력적이지만, 제가 읽을 때마다 가장 빠져 읽은 부분은 윌리엄 허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쭉 음악가의 길을 걷다가 스물일곱 살 때부터 천문 관측 일지를 쓰기 시작해 점점 천문 관측에 빠져들어 심지어 직접 금속거울을 주조하고 반사망원경을 제작한 윌리엄 허셜. 천왕성 발견을 비롯해 우주를 실험실 삼아 날씨가 좋으면 하루에 예닐곱 시간씩 천문관측에 몰입해 가늠할 수 없이 큰 우주를 서서히 개척해간 윌리엄 허셜. 그의 곁에는 낮에는 안주인으로, 밤에는 천문학 조수로 묵묵히 오빠의 손발이 되어준 여동생 캐럴라인 허셜이 있었습니다. 

 

1783년 12월 31일, 눈이 30센티미터 넘게 내렸고 하늘은 잔뜩 흐렸다. 그러나 허셜은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행사를 제쳐놓고 마지막으로 하늘을 훑어보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캐럴라인의 회고록을 보면, 허셜은 그날따라 조바심을 내면서 그녀에게 평소보다 더 크게 소리를 질렀다. "10시쯤 별 몇 개가 구름 사이로 나왔고, 우리는 최대한 서둘러 관측 준비를 했다. 오빠는 망원경의 앞머리에서 나에게 망원경을 수평 방향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그녀는 서둘러 망원경의 기단을 돌리느라고 "녹아가는 눈이 30센티미터나 쌓인 캄캄한 바닥에서 달려야 했다". 그러다 미끄러졌고 눈에 덮여 보이지 않던 나무 말뚝에 걸려 넘어졌다. 그 말뚝은 망원경의 틀을 밧줄로 고정하는 데 쓰이는 것으로, 수직으로 솟은 철제 갈고리가 "푸줏간에서 고기를 매달 때 쓰는 갈고리처럼" 달려 있었다. 

캐럴라인은 그다음 일을 고통스럽게 회고했다. "나는 그 갈고리에 오른 무릎 위 15센티미터쯤 되는 부위를 찔렸다. 오빠가 부르는 소리에―'빨리, 빨리!'―나는 비참한 외침으로―'나 찔렸어요!'―대꾸할 수밖에 없었다." 낚싯바늘에 걸린 물고기처럼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허셜은 여전히 높은 단 위의 캄캄한 더움 속에 있었으므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즉각 알아채지 못했다. 그는 어둠 너머에서 계속 "빨리, 빨리!"라고 외치고, 캐럴라인은 고통에 헐떡거리면서 "나 찔렸어요!"라는 대답을 반복했던 듯 보인다. 

결국 허셜은 사태를 파악하고 과거에 망원경의 틀을 조정했던 조수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빠와 그 기술자가 곧바로 와서 나를 들어올렸지만, 그러느라 내 살점이 거의 60그램이나 떨어져 나갔다. 기술자의 아내도 부름을 받고 왔지만 겁에 질려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캐럴라인은 집으로 옮겨졌지만, 놀랍게도 사람들은 의사를 부르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 상처를 붕대로 감고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2주 이내에 관측 작업에 복귀했다고 자랑스럽게 적었다. (189쪽)

 

그전부터 여동생을 막 부려먹는 허셜의 모습에 몇 번이나 욱했지만 특히 이 에피소드를 읽으면서 살짝 뒷목을 잡았습니다. 여동생을 병원도 안 데려가는 오빠나 혼자 털고 일어나서 다시 천문관측을 하는 동생이나 해도해도 너무한 이 오누이를 어쩌나 싶다가 결국 과학하는 남자도 못 쓰겠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물론 오늘날 우리의 우주관과 세계관은 허셜 오누이의 덕심(?)에 빚진 것이 많지만 말입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책이라고 마구 자랑하고 싶어서 책의 두께만큼 편집자의 책소개도 길어져버렸습니다. 과학 이야기가 이어져 더 큰 역사 이야기로 이어지는 『경이의 시대』. '발견'의 객관적 대리인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과학자'의 이야기가 궁금한 분들에게, 교양 있는 읽을거리를 원하는 분들께 강력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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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3-06-28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주문에 넣었을텐데~~~~~~ㅠㅠ
하루만 일찍 추천해주시징~~~~~.ㅠㅠ

이매지 2013-06-28 09:00   좋아요 0 | URL
우어어어어어어어어. 비싼 책이니까 금방 5만원 채우실 수 있어요. ㅠㅠ

라로 2013-07-04 13:10   좋아요 0 | URL
ㅎㅎㅎ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가져가는 게 문제가 그냥 포기합니다. 하지만 이매지님이 편집하신 책이라고 하니 나중에 꼭 읽어 볼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