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구경이 불구경, 싸움구경이라고 하죠. 불구경이야 안타까움에 발을 동동 굴릴 때도 있으니 마냥 재미있지만은 않지만, 싸움구경은 불구경보다 물질적/인명적 피해가 덜해서인지 정말 하나의 구경거리가 되는 듯합니다. 하지만 가만 보면 그 싸움도 아무 이유 없이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감정상의 다툼일 수도 있지만 무언가 이권을 놓고 다툴 때도 있고, 사회 구조상 다툴 수밖에 없을 때도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다 똑같으니 옛날 사람들도 싸우긴 싸웠을 텐데, 요즘 싸움이야 오가면서 또는 TV를 통해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해도 과연 옛날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싸웠을까요? 그 궁금증을 조금이나마 풀어줄 수 있는 책, 바로 <조선의 묘지 소송>입니다. 

  에헴, 하고 잰체할 것만 같은, 평소에는 직접 나서서 싸우지 않았던 양반 사대부들이 죽기살기로 싸운 소송이 있었습니다. 바로 묘지 소송인 산송(山訟)입니다. 조선시대의 3대 민사 소송 중 하나인 '묘지 소송(산송)'은 말 그래도 '묘지'를 놓고 다툰 소송입니다. 요즘에도 명당 자리를 놓고 다툰다거나 일이 잘 안 풀리면 조상 묘자리가 안 좋아서 그렇다고 이장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조선시대의 묘지 소송은 그와는 조금 다른 이유에서 시작됩니다. 단순히 풍수지리상의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 유교 이념이 확립되면서 조상의 분묘를 단장하고 묘역을 조성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면서 다툼이 시작됩니다. 묏자리는 단순한 땅이 아니라 종법질서의 확립과 부계의식 강화에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이런 유교 의식이 개입되었기 때문에 평소 토지나 노비 매매시에는 대리인을 내세워 진행했던 양반 사대부들이 패싸움까지 벌이면서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산송에 매달렸습니다. 단순한 땅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교'를 지키는 길이자 가문의 자존심이 걸린 문제였으니까요. 

 

  삼국시대 및 고려시대에도, 중국과 일본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조선 후기 사회만의 특징적인 역사 현상인 산송. 사실 처음에 <조선의 묘지 소송> 원고를 받아들었을 때는 고문서 자료가 많아서 어렵게 느껴졌는데, 원고를 찬찬히 읽어가다보니 그 속에서 생동감 있게 살아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해져 점점 빠져들었습니다. 무려 250년 동안이나 징하게 다툰 파평 윤씨와 청송 심씨의 이야기도 그렇고, 시집간 누이의 묘를 파내려고 하면서 "저희는 차라리 누님의 죄인이 될지언정 조상의 죄인은 될 수 없"다고 호소하는 형제들의 이야기의 흥미진진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재미있었던 것은 관에서 묘를 파내라고 명령을 내렸지만 어떻게든 파내지 않으려고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요즘도 그렇지만 불법적으로 투장한 무덤이라도 남의 무덤은 함부로 파낼 수 없어서(조선시대에 남의 묘를 파내는 것은 살인죄와 똑같이 처벌했다고 합니다) 본인이 직접 파내야 했는데, 이를 이용해 날이 추우니까 땅이 얼어서 못 파겠다, 농번기라 바빠서 못 파겠다, 풍수상 3월과 9월에는 묘를 옮기지 않으니까 못 파겠다 등 갖가지 꼼수를 부리며 차일피일 기한을 미루고 끈질기게 버티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당하는 사람이야 속이 터질 일이지만 제3자 입장에서 재미있는 싸움구경이 아니었나 싶었습니다. 

  2010년 론칭한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가 어느덧 열 권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재발견하는 작업" "같은 땅에 살았던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조근조근 들려주어 자연스레 책을 펼쳐볼 수 있게" 하고자 한 시리즈의 목적에 <조선의 묘지 소송>만큼 잘 어울리는 책이 있을까 합니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삶과 가치관이 반영된 싸움구경. 점잖은 양반들이 계급장 떼고 제대로 한판 붙는 모습을 함께 구경해보는 것은 어떨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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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2-02-24 2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죄를 고하여라에서 산송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읽은 기억이 나네요. 여튼 대단하네요..ㅡㅡ;

이매지 2012-02-25 00:37   좋아요 0 | URL
<네 죄를 고하여라>도 참고차 읽었는데 재미있더라구요. ㅎㅎ
이러나 저러나 대단한 사람들.

BRINY 2012-02-25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산송이군요. 교과서에 딱 한줄 나오는데, 읽어두면 수업시간에 재미난 얘기거리가 되겠네요.

이매지 2012-02-27 09:12   좋아요 0 | URL
엇. 교과서에도 산송이 나오는군요. ㅎㅎ
타깃층을 고등학생부터 잡고 있는 책이라 학생들이 읽기에도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재미난 얘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