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의학이 임상의학이라면, 사람의 권리를 다루는 의학은 법의학이다." 이 말에 매료되어 나는 당시 불모지였던 법의학의 길로 들어섰고, 이제 법의학을 시작한 지 56년이 흘렀다. 이 인터뷰집은 그간 나의 학문과 감정 실무를 통한 삶에 관한 기록이다. -5쪽
법의학적인 증거를 바탕으로 범인들을 체포한 결과를 보면, 그동안 고문과 자백으로 만든 범인들 가운데는 우리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억울한 범인'들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살인 사건을 저지른 범인들 가운데는 착하다는 평판을 받는 사람도 많았고, 험악한 인상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는 모습이거나 아주 잘 생긴 경우도 꽤 있었으며, 대개는 지능지수도 평균 이상이었다. 게다가 '좋은 직장'에 다니는 사람들도 많았다. 또 아이들을 해코지하는 범인들에는 '낯선 사람'보다는 잘 아는 친지가 더 많았으며,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최고위층 집안에서도 끔찍한 살인자가 나왔다. -12쪽
'CSI 효과'라는 말이 있다. 미국 드라마 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더 긴장할 수밖에 없다. 과학수사에 대한 지식으로 무장한 범죄자일수록 더 지능적인 범죄를 저지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반인들은 드라마에 나오는 멋진 과학수사 요원들처럼 실제 수사관이 범죄자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발휘해서,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거를 확보해 범인을 체포하기를 기대한다. 또 법정에서도 과학적인 증거에 근거해 유무죄 판결이 날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 더 있다. 그 옛날 고문과 자백으로 범인을 '만들었던 시절'에는 실제 범인이라고 해도 고위층 인사를 잡아들이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법의학적인 증거는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는다. '그들도' 옛날처럼 마음대로 범죄를 저지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8쪽
시인 고은이 그랬다죠. '감옥에 다녀오면 생각이 훌쩍 자란다. 감옥에 가면 다른 할 일도 없고, 당장 급한 걱정도 사라진다. 그러니 자연히 독서를 하고 명상에 잠기게 된다.' 역시 심심해야 독서도 하고, 생각도 하고 그러는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재미있는 일이 너무 많으니 독서하기가 쉽지 않아요. 책이 안 팔리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이에요. 나부터도 바둑 두고, 당구 치고, 비디오 보고, 사람 만나고, 원고 쓰고, 강의 나가고, 그러고도 시간이 남으면 그때 책을 읽게 돼요.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독서에 적당한 환경이 아니에요. -31쪽
이번에 대한법의학회 모임에 가면 그런 이야기를 좀 할 작정이오. 법의학문화상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그래서 <싸인>과 같은 드라마를 만든 사람들에게 상을 주자고. 그렇게 격려해줘야 더 좋은 법의학 드라마를 만들 거 아니오. 그러면 자연히 일반인들도 법의학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알게 될 거고. 그래야 제도도 만들어지는 거디요. 언제나 제도가 먼저 만들어지는 게 아니야. 세상이, 세상 사람들 인식이 바뀌어야 제도가 만들어지는 거요. 내가 왜 『새튼이』나 『지상아』를 썼겠어요. 그런 바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디요. -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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