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아이들 1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9
살만 루슈디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8월
절판


그러나 이제 시간이(이제는 내가 쓸모없으므로)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곧 서른한 살이 된다. 재수가 좋으면. 즉 너무 혹사당해 부서져가는 이 몸뚱이가 그때까지 버텨주기만 한다면. 그러나 목숨을 건질 가망은 전혀 없다. 나에게 과연 천 일 밤하고도 일 일 밤 정도라도 남아 있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다. 내 삶에 어떤 의미를-그렇다. 의미를-부여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셰에라자드보다 더 부지런히 서둘러야 한다. 솔직히 인정하겠다: 나는 그 무엇보다 허망한 죽음을 두려워한다.-26쪽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들은 대부분 우리가 없는 곳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내게는 내가 알 리가 없는 일들을 알아내는 재간이 어디선가 생긴 모양이고, 그래서 아주 세부적인 내용까지 모든 것이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데, 이를테면 이른 아침의 대기 속에서 천천히 흘러내리는 듯한 그 안개도 그렇고…… 아무튼 나는 거미줄에 뒤덮인 채 그냥 내버려두었다면 좋았을 낡은 양철 트렁크를 열었을 때 발견하게 되는 몇몇 실마리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을 알고 있다. -48~9쪽

내가 산산이 부서져간다는 사실을 믿어주기 바란다.
이 말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다. 감상적이고 알쏭달쏭하고 천박한 말재주로 동정을 얻으려는 수작도 아니다. 내 말은 다만 내 몸이 낡아빠진 항아리처럼 좍좍 갈라지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하나밖에 없는, 그러가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역사에 너무 많이 두들겨 맞고 아래위로 배수(排水) 작업에 시달리고 문짝에 찍혀 훼손되고 타구(唾具)에 맞아 머리통이 깨지는 등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이 가엾은 몸뚱이가 마침내 조각조각 쪼개지기 시작한 것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나는 문자 그대로 분해되는 중인데, 지금 당장은 천천히 진행되고 있지만 곧 가속화될 조짐도 보인다. 내가 바라는 것은 그저 내가 언젠가는 (대략) 6억 3천만 개의 고만고만한 미립자로 분해되어 결국 이름도 없고 기억도 없는 흙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을 (내가 받아들였듯이) 여러분도 받아들여달라는 것뿐이다. 내가 다 잊어버리기 전에 이렇게 종이에 일일이 적어두기로 마음먹은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우리는 건망증이 심한 족속이니까).-86~7쪽

여러분은 경악했겠지만 나는 월급 이백 루피를 받는 하찮은 요리사 나부랭이가 아니라서 나만의 네온 여신상이 번갈아 비춰주는 노란색과 초록색 불빛 아래서 혼자 일하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내가 만드는 각종 처트니와 카손디는 결국 야간의 글쓰기와도 관계가 있다. 낮에는 피클통 사이에서, 밤에는 이 종잇장 사이에서 나는 보존이라는 위대한 작업에 시간을 바친다. 그리하여 과일처럼 기억도 시간의 부패 작용을 이겨내게 된다. -88쪽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서로 스며들어야 하는 거야. 요리를 할 때 여러 가지 맛이 어우러지듯이. 예를 들자면 일제 루빈이 자살한 사건은 아담 할아버지의 가슴속에 스며들었고 할아버지가 하느님을 만날 때까지 그 속에 고스란히 고여 있었지." 나는 더욱더 진지하게 말을 잇는다. "마찬가지로 내 속에도 과거가 스며들었고…… 그래서 그 과거를 무시할 수 없으니까……"-89쪽

그녀는 날마다 아흐메드 시나이의 일부를 선택하고 완전히 익숙해질 때까지 그 부분만 골똘히 생각했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마음속에 호감이 싹트고 그것은 곧 애정으로 발전했다가 마침내 사랑이 되었다. 그런 식으로 그녀는 지나치게 시끄러워 고막을 괴롭히고 걸핏하면 부르르 떨게 만드는 그의 목소리를 사랑하게 되었고, 아침마다 기분이 좋다가도 면도만 하고 나면 곧 엄격하고 퉁명스럽고 사무적이고 쌀쌀맞게 돌변해버리는 그의 습성을, 그리고 시선이 너무 싸늘하고 불분명하지만 그 속에 선량함이 깃들었다고 믿는 독수리눈을, 그리고 윗입술보다 아랫입술이 조금 앞으로 튀어나온 모습을, 그리고 그녀에게 굽 높은 신을 신지 말라고 할 만큼 작은 키를 사랑하게 되었는데…… 어머니는 이런 생각을 하셨다. '놀랍구나, 한 남자에게 사랑할만한 부분이 백만 가지도 넘는 듯하니!'그러나 어머니는 낙담하지 않았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 따지고 보면 그 누가 한 사람을 완벽하게 알 수 있으랴?'-151쪽

그러나 물론 우연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면 상황이 또 달라진다. 만약 그렇다면 무사는-고령과 노예근성에도 불구하고-그야말로 정해진 시간이 될 때까지 조용히 째깍거리는 시한폭탄인 셈이다. 만약 그렇다면-낙관적으로 생각할 경우-모든 일이 미리 예정되었으니 우리는 저마다 의미 있는 존재인 셈이고, 따라서 우리가 한낱 우연의 산물에 불과하고 '존재이유' 따위는 없다는 끔찍한 생각은 안 해도 되니까 일제히 일어나 환호할 수도 있고, 반면에-비관적으로 생각할 경우-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든지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고 어차피 모든 일이 예정대로 펼쳐질 테니 일체의 사고 판단 행동이 부질없음을 깨닫고 그 자리에서 당장 포기해버릴 수도 있겠다.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낙관주의는 어디서 찾아야 하는가? 운명 속에서, 아니면 혼돈 속에서? 어머니가 (이미 동네 사람들 모두가 들어버린) 그 소식을 전했을 때, "내가 그럴 거라고 했잖고, 다 시간 문제라고" 그렇게 대답했던 아버지는 그 순간 낙관론자였을까, 아니면 비관론자였을까? -173쪽

기껏해야 (처음에는) 마침표만 한 크기에 불과했던 것이 점점 커지면서 쉼표로, 낱말로, 문장으로, 문단으로, 장(章)으로 성장했고, 지금은 한층 더 복잡한 발달단계를 거치면서 급속히 팽창하여 한 권의 책으로-이를테면 백과사전으로-심지어 하나의 언어 전체라고 표현해도 될 만한 규모로 성장해가는 중이었는데……-219쪽

아무튼: 무릎과 코, 코와 무릎이 있었다. 사실 우리 모두의 꿈이었던 신생국 인도 전역에서 나처럼 부분적으로만 자기 부모의 자식인 아이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한밤의 아이들은 시대의 아이들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역사가 그들의 아버지였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특히 그 자체가 하나의 꿈이라고 말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257~8쪽

"억지로 끌어내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게 인생이야."-281쪽

모든 놀이에는 교훈이 따르는 법인데, 뱀과 사다리에는 다른 어떤 놀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교훈이 있다. 이 놀이는 사다리 하나를 오를 때마다 바로 그 너머에는 뱀이 기다리고 있으며 뱀 한 마리를 만날 때마다 곧 사다리가 보상해준다는 영원한 진리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이것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단순한 논리가 아니다. 이 놀이는 모든 일에 수반되는 불변의 양면성, 즉 오르막길이 있으면 내리막길도 있고 선이 있으면 악도 있는 이원성을 암시한다. 사다리의 든든한 합리성은 뱀의 신비로운 유원성과 균형을 이루고, 계단과 코브라의 대립 속에서 우리는 알파와 오메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대립관계의 은유를 발견한다. 자, 여기 메리와 무사의 전쟁이 있고, 무릎과 코의 대결이 있고…… 그러나 나는 아주 어렸을 때 벌써 이 놀이에 한 가지 중요한 요소, 즉 양면성이 빠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앞으로 일어날 여러 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때로는 사다리를 타고 미끄러질 수도 있고, 때로는 뱀의 독을 이겨내고 기어올라 승리를 거둘 수도 있고…… -305~6쪽

그러나 나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고 마음속에 작디작은 의혹의 씨앗이 싹텄다. 어머니에게 비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우리 엄마에게! 언제나 우리에게, "마음속에 비밀을 감춰두면 그게 점점 썩는단다. 그래서 말을 해버리지 않으면 배가 아프게 되는 거야!" 하고 말하던 엄마에게!-어렴풋한 생각이었다. 이 조그마한 불꽃은 내가 빨래통 속에서 겪게 되는 일 때문에 결국 산불로 번지고 만다(왜냐하면 이번에는 어머니가 나에게 증거를 제공했으니까).-342~3쪽

현실은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과거로부터 멀어질수록 현실은 점점 더 구체화되고 그럴듯해지는 반면 현재에 접근할수록 오히려 점점 더 믿기 어려워지는 듯하다. -355쪽

아무튼 여자들이 나를 만든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의 역할이 결정적인 것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차라리 여자들이 채워주었다면 좋았을 그곳을-일찍이 내가 외할아버지 아담 아지즈로부터 물려받은 가슴 한복판의 구멍을-너무 오랫동안 수많은 목소리들이 차지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쩌면-모든 가능성을 고려해야 하니까-내가 언제나 그들을 조금은 두려워했는지도 모르겠다.-409쪽

내 말을 잘 이해하기 바란다: 1947년 8월 15일 최초의 한 시간 동안-즉 열두시와 한시 사이에-갓 태어난 독립국 인도의 영토 안에서 정확히 천 명하고도 한 명의 아이가 탄생했다. 이 사실 자체는 (물론 그 숫자의 울림이 신기할 정도로 문학적이기는 하지만) 그리 특별하지도 않다. 그 시절 우리가 사는 이 땅에서는 시간당 출생자 수가 사망자 수보다 평균 687명쯤 많았기 때문이다. 다만 이 사건이 주목할 만한 이유는(주목할 만하다니! 이 얼마나 냉정한 표현인가!) 그 아이들의 특징 때문이었는데, 생물학적 돌연변이였는지 혹은 그 순간에 어떤 초자연적 존재가 개입했는지 혹은 쉽게 생각해서 순전히 우연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물론 '동시성'이라고 해도 이 정도 규모라면 C.G. 융 같은 사람도 깜짝 놀라겠지만) 그들 모두가 한 명도 빠짐없이 그야말로 기적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색이나 재간이나 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416쪽

물론 현실이 비유적 내용을 내포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현실성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천 명하고도 한 명의 아이들이 태어났다. 일찍이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천 개하고도 한 개의 가능성이 나타났다가 천 개하고도 한 개의 막다른 길로 끝나버렸다. 한밤의 아이들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풀이할 수 있다. 가령 그들은 신화가 지배하는 우리나라에서 시대에 역행하는 온갖 구태의연한 것들의 마지막 잔재였고, 따라서 근대화를 향해 나아가는 20세기 경제의 맥락에서 그들의 실패는 오히려 아주 바람직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혹은 그들이야말로 자유의 희망이었는데 이제 영영 사라져버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횡설수설하는 한낱 정신병자의 기상천외한 망상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처음부터 끝까지 병 따위는 없었다. -425~6쪽

나는 진실을 말했을 뿐이에요. 기억 속의 진실이죠. 기억 속에는 기억만의 특별한 현실이 있으니까요. 기억은 선택하고 생략하고 변경하고 과장하고 축소하고 미화하고 헐뜯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스스로 현실을 창조하는데, 각각의 사건에 대해 나름대로 복합적이면서도 대체로 일관성이 있는 해석을 내리는 거죠. 하지만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자기 의견보다 남의 의견을 더 신뢰하는 경우는 없어요. -44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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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11-10-30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떤가요?... ㅎㅎ 궁금하네요.

이매지 2011-10-30 12:34   좋아요 0 | URL
아직 100페이지 남짓 읽었을 뿐이지만 정신없이 빠져드네요^^
가넷님도 어여 읽어보세요!

2011-11-02 1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