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훔친 여름 김승옥 소설전집 3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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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거의 '모두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자라나면서 어른들의 사랑을 충분히 받아온 동물들이다. 여기서 동물이라는 표현을 쓰는 이유는, 동물은 사랑만 받고 자라면 자기가 제일 잘난 줄로 착각하게 되고 한편 작은 꾸지람에도 샐쭉해지며 작은 비난에도 깊고 험악한 절망의 회오리바람 소리를 들어버리는 법이니까.
서울대학생들 쳐놓고 전국 방방곡곡 어느 작은 귀퉁이에서라도 어렸을 적부터 반장 한 번 안 해보거나 일등 한 번 안 해본 양반은 없다. 따라서 어른들의 사랑과 기대를 받아보지 않은 녀석이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 결과로는 자기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사람에게는 멍청할 정도로 고개를 숙이면서 머리를 내밀고, 자기의 뺨을 갈기는 사람에게는 곡괭이로 그 사람 그림자의 대가리라도 짓부숴야 속이 시원해하는 성미를 가진, 어린애로서의 상태를 유지하는 어르신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17~8쪽

그 연애란 것에 대해서 긴 얘기가 필요할까? 필요 없다. 토요일에 만나서 다방에 가고 차 한 잔씩 마시고 음악을 듣다가 지껄이다가 하는 식의 단순한 행위의 반복, 그러면서도 마음만은 어떠한 파란 많은 옛사람들의 사랑 얘기보다도 더 불탄다는 식의, 즉 서울의 대학생들 식의 연애, 그렇고 그런 연애였으니까. -20쪽

무슨 병이든지 그렇지만 말야. 병에 걸리지 않아? 그러면 참 많은 걸 알게 된단 말야. 예를 들면 그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무슨 약 무슨 약이 있고 이러이러한 처방이 있고, 아무개는 어떻게 해서 나았고, 아무개는 어떻게 잘못해서 죽어버렸고, 그때 그렇게만 했더라면 살았을 텐데 하는 식으로 말야, 굉장히 많은 것을 알게 된단 말야. 그리고 혹시 너 이해 못 할는지 모르겠지만, 영혼이란 게 따로 없구나, 아니 없구나가 아니라 있구나, 하는 것도 알게 된단 말야. 영혼이란 건 참 우스운 물건이어서, 아니 물건은 아니고 그 뭐랄까, 하여튼 그런 건데 말야, 이게 어디가 아파야 슬쩍 나타나는 물건이거든. 평소에는 어디 가 있는지 숨어 있다가 꼭 어디가 아파야 나타난단 말야. 그런데 말야. 너 혹시 아직 영혼이란 걸 보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게 영 비참한 낯짝을 하고 있단 말야. 너 내 말 알아 듣겠니? 영 비참한 낯짝을 하고 있단 말야. -31쪽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속았다, 또는 속고 있다는 것밖에 더 무엇이 있느냐. 그것도 나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해서일 뿐인데. 속여라, 그래, 날 실컷 속여라, 넌 날 속였다고 생각하고 좋아하고 있으면 되고, 난 사실은 속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고. 그러나 제발 그 영혼이 어쩌구 저쩌구는 그만뒀으면 좋겠구나. -41쪽

그런데 누가 누구와 싸우는 거지? 양심이 돌멩이와 싸우나? 천만에. 양심을 유지시키려고 애쓰는 사람이 똑같은 이유를 가진 다른 사람과 싸우는 거야. 싸우면 어느 한쪽은 지는거야. 진 사람은 그럼 모두 자살하란 말인가? 우리나라는 거의 항상 졌으니까 그럼 '자, 일동 자살!' 하고 죽으란 말인가? 괜히 민족 대 민족을 끌어들여서 거창하게 널 위협한다고 생각하진 마라. 개인 대 개인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야. 이 정도로 얘기하면 내가 어떤 사람의 양심을 얘기하는 건지 알겠지? 진 사람들의 양심이야. 진 사람들의 멍들고 찢어져서 피가 나는 양심이야. 그런데 우리는 모두가 진 사람들이거든. 우리들의 양심은 네가 생각하는 만큼 영원불변하고 순결무구한 양심이 이미 아니란 말야. 적어도 저항력이 약해진 양심이란 말야. 아무래도 결국엔 나의 식으로 말한 건지 모르지만 요컨대 네가 생각하듯이 양심이란 게 우리 몸 속에 있는 허파나 밥통처럼 우리에게 필수적으로 붙어 있는 어떤 고귀한 물건이라 해도 그런 결과란 말씀야. -49~50쪽

나는 인생을 사랑해. 그러기 때문에 나는 내 영혼을 모든 경우에 갖다놓고 시달림을 받아보게 하고 싶어. 그러면 결국 나의 영혼 속에 무언가 찌꺼기가 남을 거야. 난 그걸 양심이라고 하고 싶어. 난 우리 모두가 그래줬으면 좋겠어. 그러면 무언가 우리 시대가 정리됐을 때엔 우리 시대의 양심이 남겨질 거야.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양심이라면 그땐 그걸 지키기 위해서 정말 강력한 투쟁도 우린 피하지 않을 거야.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린 거의 모두가 주어진 인생을 그저 무사히 통과하려고만 해. 자기 집 식구들의 손에 의해서 무사히 수의가 입혀지기만 기다리고 있는 꼴이란 말야. 그런 태도로 뒤에 남겨줄 만한 양심이 만들어질까? 우리가 있는 힘을 다하여 지켜야 할 양심을 물려받지 못한 것도 억울한데 말야. 가만히 보면 회초리를 들고 '여러분, 조용히 조용히!' 하는 선생님 같은 경찰들 눈치만 슬슬 보고 사는 꼴이란 말야. 순한 양들이지. 순한 양들은 항상 주인이 있어야 해. 자기가 자기의 주인 노릇은 못 하는 법이야. -50~1쪽

영일이가 제법 부끄럼을 잘 타는 청년인 체 비죽비죽 웃으며 엉큼한 거짓말을 했다. '사나이 대 사나이', 주량, 음담패설, 대개 이런 것들이면 한국에서는 처음 보는 사내들끼리도 뭐 굉장히 서로를 잘 알고 있는 듯이 얘기를 나눌 수가 있는 것이다. -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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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YLA 2011-07-20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또 보고 싶네요 !

이매지 2011-07-20 15:29   좋아요 0 | URL
무더운 여름을 맞이해 읽었는데 아 진짜 최고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