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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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나는 한은교를 사랑했다.

사실이다. 은교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 어린 처녀이고 나는 예순아홉 살의 늙은 시인이다. 아니, 새해가 왔으니 이제 일흔이다. 우리 사이엔 오십이 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있다. 당신들은 이런 이유로 나의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변태적인 애욕이라고 말할는지 모른다. 부정하진 않겠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좀 다르다. 사랑의 발화와 그 성장, 소멸은 생물학적 나이와 관계가 없다. '사랑에는 나이가 없다'라고 설파한 것은 명저 『팡세』를 남긴 파스칼이고, 사랑을 가리켜 '분별력 없는 광기'라고 한 것은 셰익스피어다. 사랑은 사회적 그릇이나 시간의 눈금 안에 갇히지 않는다. 그렇지 않은가. 그것은 본래 미친 감정이다. 당신들의 그것도 알고 보면 미친, 변태적인 운명을 타고났다고 말하고 싶지만, 뭐 상관없다. 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의 것일 뿐이니까.-11~2쪽

그렇다. 그해 가을, 내 집에 하나의 움직이는 '등롱'이 들어왔다. 사실이다. 내 자의식에 인화된 사진 속 나의 집은 그애를 만나기 전까지 오로지 우중충한 무채색의 어둠에 싸여 있었다. 에드거 앨런 포의 허물어져가는 '어셔 가' 저택처럼. 그애가 들어오고, 비로소 내 집에 초롱이 켜졌다. 가을이 깊을 때까진 말 그대로 그애는 다만 꽃초롱, 혹은 등롱이었다. 그래서 나의 욕망은 비교적 양지바른 곳에 은거해 있었고, 특별히 포악스럽지도 않았다. 나는 눈을 감고서 그애가 아래위층으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쓸고 가는 것을, 보지 않으면서 언제나 다 보고 있었다. 그애가 움직이는 대로, 마치 어두운 동굴 속, 초롱불 하나가 오르락내리락, 내 발 앞을 밝히는 것 같았고, 그 초롱을 따라 걸으면 발바닥까지 다 따뜻했다. 나는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말을 빌려, 자주 혼자 중얼거렸다. '여름은 샹들리에, 가을은 등롱'이라고. -58~9쪽

천박한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일수록 천박한 짓과 천박하지 않은 짓을 악착같이 나누려고 한다는 것은 내가 혁명을 꿈꾸던 젊은 날 배운 것이었다. 지식인들은 더욱 그러했다. 그들은 천박한 자신의 욕망을 갖은 말로 치장해 감추면서, 세상에 대고 밤낮없이 두 개의 나팔을 불었다. 이를테면 천박한 자라고 판결을 내리는 자에겐 트럼펫을 불고, 천박하지 않은 자라고 판결을 내린 자에겐 우아하게 색소폰을 불어대는 식이다. 그런 자 중에서 자기 판결의 확고한 명분을 갖고 있는 자는 사실 드물다. 명분이야 난무하지만, 대개는 눈치로 때려잡는다. 좀더 깊이 알거나 좀더 영향력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 어떤 지점을 향해 색소폰을 불었다 하면 그제야 너도 나도 줄지어 집중포화로 포즈도 우아하지, 색소폰을 일제히 불어젖힌다. 천박하다고 판결해, 트럼펫을 불어야 할 때는, 그 짓조차 오물을 뒤집어쓸지 몰라 조심조심하다가 최종적으로, 침묵은 밑져도 본전이라는, 지식인 사회의 은밀한 불문율을 따라가고 마는 것도 그들이다. -67~8쪽

나는 늘 왜, 라고 묻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왜 너를 만났는가. 나는 왜 네게 빠져들어갔는가. 나는 왜 너를 이쁘다고 생각하는가. 아, 나는 왜 불과 같이, 너를 갖고 싶었던가.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모든 게 끝나버릴 질문이겠지. 사람들은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기 때문에, 라고 설명한다. 나는 그 말을 믿지 못하겠다. 네가 알아듣기 편하도록 쉽게 설명하지만, 사랑을 본 적도 만진 적도 없어서 나는 그 말, 사랑을 믿지 못한다. -91쪽

사람들은 내가 여자에게 선천적으로 별 관심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관심이 없다기보다 내 욕망을 주체하기가 쉬웠다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여자를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나는 그 흔한 포르노나 야동조차 거의 본 적이 없었다. 섹스의 욕망을 다스리는 건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를 다스리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 쉽다고 여겼다. 더구나 이 도시는 원한다면, 섹스로 가는 길이 얼마든지 구비되어 있었다. 그렇다고 내가 금욕주의자라는 건 아니다. 사십대까지는 유곽에 다닌 적도 있었다. 섹스는 자연이라고 나는 믿었다. 그것은 본래 자연이 만든 순환의 한 과정에 불과하다. 특히 남자들에게 섹스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 문제이다. 여자들이 종종 섹스를 통해 환상에 근접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남자들은 섹스를 통해 환상을 현실로 만든다.

그러므로 나는 섹스에 대한 아무런 환상이나 집착을 갖고 있지 않았다. -1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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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바람 2010-09-10 08: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가 만드는 책의 할아버지 입장같아요

이매지 2010-09-10 11:25   좋아요 0 | URL
하늘바람님은 요새 어떤 책을 만들고 계시길래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