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기다림의 순간, 나는 책을 읽는다 - 그리고 책과 함께 만난 그림들……
곽아람 지음 / 아트북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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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으로 종이에 쓰는 수평적 행위를 통해 한때 사랑했던 이의 심장을 겨누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마음에 담았던 이에 대한 험한 말들을 자신의 필적으로 남기고 싶은 이는 별로 없다.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는 편지는 수십 번 썼다 지우게 마련이다. 연서를 쓸 때 그러했듯, 그 편지를 쓰는 시간도 으레 밤이다. 찢어버린 종이가 수북이 쌓이는 동안 날이 새고, 날 섰던 감정의 결도 얌전히 가라앉는다. 이별을 말하는 편지가 대개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잔뜩 성난 손가락으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수직적 행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묵히지 않은 감정을 실어 매섭게 내리 꽂는 손가락들이 만들어내는 한 자, 한 자가 그대로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박힌다.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도 느껴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53~4쪽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이 나이에 누군가의 첫사랑으로 평생 가슴에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유는 물론 부담스러워서다. 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상대에 대해 갖는 기대를 생각해보라! 한 회사 동료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빨리 수능시험 보고 대학에 입학하고 싶은데, 상대는 이제 막 성문 기본 영어책을 펼쳐들었을 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이제 누군가의 첫사랑이기보다는 '마지막 사랑'이고 싶고, 연애 경험이 없는 남자보다는 다른 여자들에게 충분히 길들여져서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처럼 반들반들 묵직하게 윤나는 남자가 좋다. -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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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12-11 2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첫번째 부분 읽고 <무진기행>을 바로 장바구니로 직행시켰답니다.

이매지 2009-12-11 23:22   좋아요 0 | URL
이 책 읽을까 말까 고민하던 차에 브론테님의 페이퍼를 보고 읽기로 결심했어요 ㅎㅎ <무진기행>은 정말 좋다는 말 밖에는 :)
저는 새삼 <위대한 개츠비>가 읽고 싶어졌어요!

다락방 2009-12-12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진기행]을 가지고 있지만 읽지않고 쌓아두기만 했다는.....( '') 먼 산.

이매지 2009-12-12 01:28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이 참에 보심이 ㅎㅎ

... 2009-12-12 01:52   좋아요 0 | URL
우리 함께 <무진기행>과 <안나 카레니나>를 읽어 보아요~
이 야심한 새벽에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매우 난해한 <아우라>를 읽고 있는 1인

이매지 2009-12-12 20:06   좋아요 0 | URL
<아우라> 제목부터 아우라가 느껴지는 ㅋㅋㅋ
저는 달밤에 주말에 봐야 할 교정지를 보면서 고통스러워했지요 -ㅅ-;;;;;

2009-12-12 17: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12-12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