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 종이에 쓰는 수평적 행위를 통해 한때 사랑했던 이의 심장을 겨누는 일은 지극히 어렵다. 마음에 담았던 이에 대한 험한 말들을 자신의 필적으로 남기고 싶은 이는 별로 없다. 헤어지자고 이야기하는 편지는 수십 번 썼다 지우게 마련이다. 연서를 쓸 때 그러했듯, 그 편지를 쓰는 시간도 으레 밤이다. 찢어버린 종이가 수북이 쌓이는 동안 날이 새고, 날 섰던 감정의 결도 얌전히 가라앉는다. 이별을 말하는 편지가 대개 아름다운 것은 그 때문이다.
잔뜩 성난 손가락으로 키보드 자판을 두들기는 수직적 행위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묵히지 않은 감정을 실어 매섭게 내리 꽂는 손가락들이 만들어내는 한 자, 한 자가 그대로 비수가 되어 상대의 가슴에 박힌다. 보내는 자는 인쇄체로 찍히는 말들에 대해 너그럽다. 받는 자는 무미(無味)한 그 자형(字形) 때문에 더욱 상처받는다. 홧김에 발신 버튼을 누르는 순간 메일이 발송된다. 그 어떤 손의 온기도 느껴보지 않은 말들이 차갑게 점멸하는 모니터 화면을 통해 수신인의 동공을 찌르는 것은 순간이다. 문자나 이메일로 이별을 이야기하는 것이 예의에 어긋나는 것은 그 때문이다. -53~4쪽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내가 이 나이에 누군가의 첫사랑으로 평생 가슴에 남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이유는 물론 부담스러워서다. 처음 연애를 시작하는 사람들이 상대에 대해 갖는 기대를 생각해보라! 한 회사 동료의 표현을 빌자면 "나는 빨리 수능시험 보고 대학에 입학하고 싶은데, 상대는 이제 막 성문 기본 영어책을 펼쳐들었을 때의 기분"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이제 누군가의 첫사랑이기보다는 '마지막 사랑'이고 싶고, 연애 경험이 없는 남자보다는 다른 여자들에게 충분히 길들여져서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처럼 반들반들 묵직하게 윤나는 남자가 좋다. -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