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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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미, 우리가 서로에 대해 아는 게 정말 아무것도 없다니, 참 이상하지 않아요? 우리는 환상 속의 가상 인물을 만들어내 서로에 대한 몽타주를 작성하고 있어요. 질문을 하지만 답을 들을 수 없다는 게 그 질문들의 매력이죠. 그래요, 우린 서로의 질문에 곧이곧대로 대답하는 걸 피하면서 상대방의 호기심을 자꾸 자극하고 계속 부채질해대고 있어요. 우린 행간을 읽으려 애쓰고 낱말과 낱말, 철자와 철자 사이에 숨은 뜻을 읽으려 애쓰죠. 상대방을 정확하게 평가하려고 안간힘을 써요. 그러면서도 자신의 본질적인 면만은 드러내지 않으려고 철저하게 조심 또 조심해요. '본질적인' 것이라는 게 뭘까요? 우린 자기 생활에 대해 얘기한 적이 없어요. 자신의 일상을 이루는 것들에 대해, 자기에게 중요한 무언가에 대해 언급한 적이 없지요. -32~3쪽

우린 공허한 공간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어요. 자기가 어떤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지는 점잖게 고백했지요. 당신은 저에게 이론적으로 멋진 홈페이지를 만들어주고, 저는 그 대가로 당신에게 현실적으로 (형편없는) 언어심리 평가서를 작성해줄 수는 있겠지요. 이게 다예요. 우린 이 도시에서 발행되는 별 볼일 없는 잡지 덕에 우리가 같은 공간에 살고 있다는 것은 알지요. 그것말고 또 뭐가 있죠?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주위에는 다른 사람이 없어요. 우린 그 어디에도 살고 있지 않아요. 나이도 없고, 얼굴도 없어요. 우리에겐 밤낮의 구별도 없어요. 우린 시간 속에 살고 있지 않아요.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고는 두 개의 모니터뿐입니다. 그것도 철저하게 하나씩 각자 따로 가지고 있지요. 그리고 우린 공동의 취미를 가지고 있어요.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관심 갖기. 브라보! -33~4쪽

에미, 우리가 이메일을 사흘이나 쉬었군요. 슬슬 다시 시작할 때가 된 것 같은데요. 즐거운 마음으로 일하는 하루가 되기 바랍니다. 당신 생각을 많이 해요.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밤에도, 그리고 그사이의 시간과 그 바로 앞, 바로 뒤 시간에도. 다정한 인사를 보냅니다. 레오. -145쪽

진지하게 말씀드리면, 우리에 대해 "그 여자한테 메일 쓰는 게 자기한테 좋다면 얼마든지 써", 이렇게 말하는 여자는 제가 이해하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과는 멀어도 한참 먼 여자예요. 마를레네는 레오를 사랑하지 않아요. 레오도 마를레네를 사랑하지 않아요. 사랑하지 않는 두 사람은 상대의 사랑을 그리워하는 데서 열정을 얻는 법이에요. 저로서는 이것 이상으로 지혜로운 조언은 해드릴 수가 없네요. 이제 일해야겠어요. 곧 또 봐요. 가상의 대타, 에미. -185쪽

에미, 당신은 미아가 아니에요. 나는 미아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고, 미아도 나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어요. 미아랑 나는 어떤 두 사람이 사귈 때 대개 그렇듯 출발선에서 시작했어요. 그런데 에미, 당신과 나, 우리 경우는 달라요. 우린 골라인에서 출발하는 셈이에요. 따라서 나아갈 방향은 하나밖에 없죠. 되돌아가는 것. 우린 미몽에서 깨어나는 지난한 과정을 밟아야 해요. 우리가 쓰는 글이 우리의 실제 모습, 실제 삶일 수는 없어요. 우리가 서로를 생각하며 그렸던 많은 이미지들은 우리의 실제 모습이 대신할 수는 없어요. 당신이 내가 아는 에미보다 못하다면 실망스러울 거예요. 그런데 당신은 내가 아는 에미보다 못할겁니다! 내가 당신이 아는 레오보다 못하다면 당신도 우울하겠지요. 그리고 나 역시 당신이 아는 레오보다 못할 겁니다! 우린 만나면 미몽에서 깨어나 헤어질 테고, 일 년 동안 주린 배를 움켜쥐고 애타게 기다리면서 몇 달씩 지지고 볶았으나 막상 먹어보니 입에 맞지 않는 기름진 식사를 하고 났을 때처럼 속이 거북하겠지요. 그다음엔 어떻게 될까요? 끝나는 겁니다. 끝. 우리의 첫 만남은 곧 마지막 만남이 되겠지요. -278쪽

지나간 시절을 되풀이할 수는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어디까지나 지나간 시절이고, 새로운 시절은 지나간 시절과 같을 수 없어요. 지나간 시절은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늙고 쇠잔해요.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해서는 안 되죠. 지나간 시절을 아쉬워하는 사람은 늙고 불행한 사람이에요. -292쪽

베른하르트는 저를 한 번도 실망시키지 않았고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절대로, 절대로요! 그 사람은 저에게 온갖 자유는 다 주고 제가 원하는 건 뭐든 다 들어줘요. 아주 교양 있고, 사심이라고는 없고, 침착하고, 유쾌한 남자예요. 물론 세월이 흐를수록 틀에 박힌 일상은 사람을 숨 막히게 하죠. 프로그램 순서는 정해져 있고, 예기치 않은 깜짝쇼 같은 건 없어요. 우리는 서로를 속속들이 알고, 비밀이란 없어요. "아마 너한테는 비밀이 필요한 걸 거야. 아마 넌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과 사랑에 빠진 걸 거야." 미아는 이러더군요. 그래서 제가 그랬죠. "어떡하지? 갑자기 베른하르트를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로 만들 수도 없고" 레오, 제가 베른하르트를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로 만들 수 있을까요? 팔 년간의 가정생활을 가슴 두근거리는 비밀로 만들 수 있을까요? -32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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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09-03-03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 세시,비도 내리더군요^^

이매지 2009-03-03 22:06   좋아요 0 | URL
오후 세시, 역시 비가 내리더군요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