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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집 - 하 - 미야베 월드 제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평점 :
암만 미야베 미유키라도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한 시대소설은 왠지 어려울 것 같다는 편견도 있었고 상, 하권 다 해서 800페이지가 넘는 분량때문에 미뤄왔던 작품이지만 우연히 도서관 서가에서 발견하고 이것도 인연인데라는 생각에 빌려왔다. 하지만 호기롭게 빌려왔던 것도 잠깐, 책상에 놓고 저걸 언제 읽나 미루고 미뤄오다 발에 염증이 생겨 거동이 불편해진 걸 핑계로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읽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낮부터 시작한 이 책은 날이 선선해질 때까지 내 손을 떠나지 않았다.
염색과 고기잡이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그런대로 평온한 생활을 하고 있는 마루미 번에 정신 이상으로 아내와 자식, 부하까지 죽였다는 소문이 도는 막부의 중신인 가가 님이 유배된다는 소식이 전해져온다. 가가 님이 마루미 번에 도착하기도 전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식중독이라도 걸리면 가가 님의 저주때문이라고 두려워하기 시작한다. 한편, 이 마을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호'(바보의 의미)라는 아이는 천애고아로 온갖 고생 끝에 엉겁결에 마루미 번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호는 자신에게 자상하게 글을 가르쳐줬던 고토에님의 죽음을 경험하게 된다. 범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어느샌가 어른들로부터 '너는 귀신을 본 것이다'라고 혼쭐이 나고 결국 호는 자신이 우둔하기때문에 귀신을 본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하지만 실상은 마루미 번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건을 은폐한 것인데...
호의 말만 믿고 코토에의 죽음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 히키테인 우사,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누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던 게이치로,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었기에 더 간절했던 와타베 등 <외딴 집>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저마다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적극적으로 극복하려 들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고 아픔을 감내할 뿐이다. 정작 '외딴 집'에 갇혀 있는 가가 님 역시 이들처럼 자신의 운명을 체념한 채 받아들인다. 하지만 이들이 저마다의 삶과 맞서 싸우기보다는 그저 주어진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은 그들의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가 에도였기 때문이다. 번을 지키기 위해서 한낱 평민의 생각따위는 그저 작고 작은 티끌에 불과할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위정자들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서슴없이 공포로 밀어넣을뿐이다. 진실이 무엇인지, 왜 부당한 죽음을 당해야하는 것인지는 묵살당하고 그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한다는 명분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야기 속에서 가장 때묻지 않은 시선을 가진 것은 역시 나이가 어려 분별력이 떨어지는(하지만 바보는 아닌) '호'이다. 머리에 뿔난 귀신이라고 상상한 가가 님에게 글을 배우며 호는 다른 사람들이 꾸며낸 이미지로 가가 님을 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관점으로 가가 님을 판단한다. 모두가 귀신이라고 무서워하는 가가 님의 본성을 느끼고 그에게 충의를 다하는 호의 모습은 눈가에 눈물이 핑 돌게 만들었다. 모두가 편견없이 자신의 눈으로 사물을 꿰뚫어보고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덧없는 생각도 호를 통해 잠시나마 해볼 수 있었다.
위정자들이 만들어놓은 스토리에 속기는 쉽다. 그리고 때로는 진실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고 거짓을 진실인 채 받아들이기도 쉽다. 하지만 이 책이 보여주는 것은 결국 실제 일어난 일보다 만들어진 사실이 그럴싸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에 대한 자조가 아닐까 싶었다. 시대물이라 회피해왔지만 시대물이었기에 이 책의 메시지가 더 잘 드러난 것 같다. 상권 책 날개에 담긴 편집자의 글처럼 끈기를 가지고 읽는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 아닐까 싶다.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영화를 본 것처럼 눈 앞에 영상이 아른거렸던 작품. 역시 미야베 미유키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발은 아직 낫지 않았지만 책을 읽으며 발이 아프다는 사실조차 까먹었을만큼 재미있게 읽었다. 또 발에 염증이 나는 것은 바라지 않지만, 미야베 미유키의 시대물이라면 한 트럭을 갖다줘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