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 봤을 때는 독특한 표지(화면보다는 실제가 낫다.)와 함께 두께에 압도됐는데, 정작 책장을 넘기기 시작하니까 정신없이 빠져들었던 책이었다. 1992년 '까치글방'에서 한 번 출간된 적 있는 책으로 번역을 손봐 다시 출간된 것으로 도나 타트의 데뷔작이다. 현재 영화 판권이 기네스 펠트로의 남동생인 제이크 펠트로에게 넘어가 진행중이라고 하는데, 책을 읽고 나니 영화로 만나는 이 책은 어떨 지 벌써부터 궁금해진다. 

  고전을 인용하기를 좋아하고, 그리스어, 라틴어 등을 일상 대화에 녹여 사용하는 햄든 대학교의 고전어과 학생들. 뭔가 현실과는 동떨어져보이는 이들의 틈에 캘리포니아에서 가족으로부터 도망치듯 햄든으로 온 리처드가 끼어들게 된다. 우연한 기회에 시작하게 된 그리스어에 의외로 매혹된 리처드는 본격적으로 고전어학과 수업을 수강하려고 한다. 하지만 정작 찾아간 고전학과 담당 교수인 줄리언 모로는 자신이 가르치고 있는 학생이 (겨우 다섯임에도 불구하고) 너무 많아 받아줄 수 없다고 거절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고전어학과 학생들의 논쟁에 끼어들어 능력을 인정받아 고전어학과에 등록하게 된다. 다른 곳이었다면 절대 얽히지 않았을 다섯 명의 친구들을 만나게 된 리처드. 겉으로 보기엔 모두 리처드를 배려해주지만 리처드는 알게모르게 소외감을 느끼며 생활한다. 그리고 하나의 사건으로 말미암아 리처드는 친구들과 한 배에 올라타게 되는데...

  미스터리로 따지자면 이 책은 도서 추리소설이라 할 수 있다. 철저히 가해자의 입장에서 쓰여지고 있는 이 책을 읽노라면 왜 그 인물을 없앨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처음에는 각각의 인물들에 대한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시간을 할애한다면, 중반 이후부터는 그들을 둘러싼 첫번째 비밀이 밝혀지고, 리처드와 그들 사이에 놓여있는 장벽이 무너지며 이야기는 빠르게 진행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마침내 마지막 강둑이 무너지며 서서히 공포가 밀려온다.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힘에 의해 공범이 되어버린 화자는 사건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것도, 그렇다고 멀리서 수수방관하는 것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에서 끊임없이 죽은 친구의 환영에 시달리게 된다. 주인공 뿐만 아니라 사건과 관련된 이들은 경찰이나 FBI의 수사망이 아닌 자신 마음에 존재하는 '추억이라는 불리는 유령'과 살아가는 현실에 서서히 파멸해간다. 

  사실 이 책에서 다뤄지고 있는 첫 번째 사건의 경우에는 비현실적이라 모호하게 그려지고, 두 번째 사건의 경우에는 그저 다음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뿐 화자 스스로가 언급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인다. 여기에 애초에 모든 범죄가 공개되고 범인도 알고 있기에 반전도 기대하기 힘들다. 그렇기에 단순히 사건 자체만 두고 본다면 꽤 밍밍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이 끝까지 긴장감을 유지하며 글을 읽어가게 만드는 것은 치밀한 심리 묘사이다. 첫 번째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혹시나 사건에 대해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두 번째 사건이 일어난 뒤에는 혹시나 경찰이 눈치채지 않을까하는 불안감에 시달리며 이들은 끊임없이 긴장하게된다. 현실을 도피하기 위해 술이나 마약, 수면제 등에 의지해보기도 하지만 그들의 불안과 공포는 쉽게 떨쳐지지 않는다. 그렇게 서로 간에 균열이 일어나 서서히 무너져내려가는 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노라면 책을 읽고 있는 내게도 어떤 불안감이 생겨 내가 책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책 속에서 이들과 함께 서서히 공포에 질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강한 몰입감과 대화로 인한 빠른 전개. 그리고 책을 넘길 수록 조금씩 조금씩 더 조여오는 정신적인 압박이 인상적이었던 책이었다. 이런 책을 데뷔작으로 쓴 작가라면 다른 작품들을 기대해봐도 좋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 단순히 사건에 대해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독자까지도 모두 공범으로 만들어버리는 책이 아닐까 싶다. 

 
  덧) 전체적인 내용은 마음에 들었지만, 몇 군데 번역상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있어서 아쉬웠다. 예를 들어, 대화 부분에서는 구어체와 문어체가 섞여있었고, 홈즈와 왓슨에 대해서 언급할 때는 홈스와 웟슨이라고 표기되어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뭐 홈스, 웟슨 정도는 그럴 수도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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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07-12-2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해자의 입장에서 쓰여진 추리소설이라 흥미가 가네요.
이매지님 크리스마스네요. 즐거운 날 되세요. ㅎㅎ

이매지 2007-12-25 20:53   좋아요 0 | URL
가해자라고 하기도 뭐하고 공범자라고 하기도 뭐한 화자라서
오히려 재미있는 책이었어요 :)
바람돌이님도 즐거운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