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테스크
기리노 나쓰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11월
구판절판


미치지 않은 인간은 아무리 교묘하게 만들었다 하더라도 어차피 천재는 아니지. 그러니까 미친 인간이 만든 것은 어딘가가 확연히 다르거든. 어디가 다르냐 하면 말이지. (중략) 기운(氣韻)이 있다는 말이야. 기운, 이것이 가장 중요하단다. 사전에서 기운이라는 말을 찾아보렴. 그것은 기품이 있는 것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야. 기품이 있고, 그 기품이 작품에 생생하게 나타나 있는 것을 말한단다. 쉽게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보통 사람은 절대로 할 수가 없어. 그러니까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인간은 천재야. 그것을 이해하는 인간도 천재란다. 그러니까 나는 천재지, 기운이 있거든. -41쪽

노력은 개체 밀도가 높아짐에 따라 발육하거나, 형태와 생리가 변화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익하지. 왜냐하면 변화는 개체가 멋대로 만들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무익한 일을 우리들 교사가, 아니 교육 자체가 사토에게 강요했기 때문에 사토는 대학과, 사회에서 계속 버티다가 결국 부서진 것이고, 그 결과 가까스로 형태의 변화를 일으킨 것이겠지. 하지만 그 변화는 남자의 욕망에 맞추는 잔혹한 것이었어. -417쪽

밀도가 낮아지면 생물은 단독 생활을 하는 고독상이 되고, 밀도가 높아지면 형태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집단으로 사는 군생상이 된다. 하지만 여학생들은 고독상이 될 수 없다는 느낌이 자꾸만 든다. 생존 경쟁이 심하기 때문이야. 성적, 성격, 경제적 기반뿐이라면 또 모를까, 무엇보다도 타고난 외모라는, 어쩔 수 없는 것이 더해지기 때문이다. 이것들이 복잡한 양상으로 뒤엉켜서 하나에서 이기면 다른 것에서는 지는 치열한 경쟁이 일어나는 곳에, 내가 직접 히라타라는 슈퍼급 여학생을 집어넣은 것이다. -418쪽

실은 나는 학교에서 진실을 가르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닻'을 마음에 묻어버린 것은 아닐까 하고, 걱정이 되어서 견딜 수가 없다. 그것은 타인보다 우수하다는 절대적인 가치관이야.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세뇌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걱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노력을 해도 보답받지 못하는 학생은 '닻'이라는 존재 때문에 평생 괴롭힘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사토 가즈에가 그렇지 않았을까? 혹은 히라타의 언니가? 그녀들은 평범하지는 않았으나 학업에서는 너와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가 묻어놓은 '닻'까지도 파괴하는 어떤 본질 앞에서는 더욱 무력했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노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타고난 '아름다움'이다.
미쓰루야, 너는 옥중에서 보낸 편지에서 옛날에 나에게 호의를 품었다고 고백했다. 나는 기쁘면서도 놀랐다. 실은 난 그때 너희를 가르치면서도, 아름다운 히라타 유리코에세 마음을 거의 빼앗겼기 때문이다. 그녀가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바라보고만 있어도 행복을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타인보다 우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닻'을 무력하게, 아니 완전히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아닐까? 그 때문에 인간은 타고난 '아름다움'을 펄쩍 뛰면서 부정하고, '닻'을 강화하겨 하지. 즉, 노력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히라타 유리코는 존재 자체만으로 미움을 받고, 학교에서 추방된 것 같다는 느낌이 자꾸만 드는구나. 그리고 '아름다움'을 욕되게 하면서 따돌린 쪽도 '닻'을 풀 수 없어서 바다 속 깊이 '닻'을 가라앉힌 채, 바다 위에서 큰 파도에 농락당하고 있는 것 아닐까? -420~1쪽

넌 아무 것도 모를 뿐만 아니라, 바보야. 공기는 필요불가결한 것이라고. 넌 공기만 한 것도 못 돼. 시대가 요청한 단순한 장식물일 뿐이야. 알리바이처럼 만들어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 자연스럽게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공적으로 부자연스러운 것이란 말이야. 우리의 존재는 남자에게 필요불가결한거야. 물이나 공기 같은 것처럼 말이야. -49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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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7-09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리노 나쓰오 여사는 대단하긴 한데 읽고나면 음침하고 기분이 찝찝한 것이...그래도 저거 아직 안읽었어요.. 여하간, 전 가끔 제가 천재가 아닌지 자뻑하는데..그럴때 뭔가 저를 스캔해보면 평상시라 다른 아우라가 나올까요? (먼산)

이매지 2007-07-0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지난 번에 <아임소리마마>를 읽고 찝찝해서 다시는 안 보려고 했는데 그래도 한 번 더 기회를 줘보려구요 ㅎㅎ 이것도 찝찝할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