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5월
품절


주전자는 물이 끓자 저절로 전원이 꺼졌다. 안에서 끓어오르는 물이 언짢은 소리를 내며 가라앉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일반적인 사물들의 잔인한 자기만족에 놀랐다. 아니, 잔인한 것은 아니고, 자기 만족도 아니고, 그냥 무심할 뿐이었다. 하긴 어떻게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이제부터는 내가 상상한 대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사물을 대해야 할 터였다. 그것이 새로운 형태의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28쪽

하긴, 우리의 모든 순간들 가운데, 삶이 완전히, 완전히 바뀌지 않는 순간이 어디 있을까? 그 모든 변화 가운데 마지막, 가장 중대한 변화가 오기 전까지는. -40쪽

"과거 속에서 사시네요." 클레어가 말했다.
나는 신랄하게 대꾸하려다가 말을 끊었다. 사실 그 애 말이 옳았다. 삶, 진정한 삶이란 투쟁, 지칠 줄 모르는 행동과 긍정, 세상의 벽에 뭉툭한 머리를 들이대는 의지,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돌아보면 내 에너지의 많은 부분은 늘 피난처, 위안, 또 그래, 솔직히 인정하거니와, 그것, 아늑함을 찾는 단순한 일에 흘러 들어가 버렸다. 이것은 충격까지는 아니라 해도 놀랄 만한 깨달음이었다. 전에는 나 자신을 단검을 입에 물고 다가오는 모든 사람들에 맞서는 해적 같은 사람으로 보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이 망상이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숨겨지고, 보호받는 것,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었다. 자궁처럼 따뜻한 곳으로 파고들어 거기에 웅크리고 있는 것, 하늘의 무심한 눈길과 거친 바람의 파괴들로부터 숨는 것, 그래서 과거란 나에게 단지 그러한 은둔일 뿐이다. 나는 손을 비벼 차가운 현재와 더 차가운 미래를 털어 내며 열심히 그곳으로 간다. 하지만 정말이지 그것이, 과거가 어떤 존재를 가지고 있을까? 결국 과거란 현재였던 것, 한때 그랬던 것, 지나간 현재일 뿐이다. 그 이상이 아니다. 그래도. -66~7쪽

병은 지금 내가 있다고 느끼는 곳과 비슷하다. 어디로부터도, 누구로부터도 멀리 떨어진 곳이다. -77쪽

그러고 보면 우리는 슬픔의 작디작은 배들이 아닌가. 어두운 가을을 헤치며 이 먹먹한 정적을 떠돌아다니는 작은 배. -78쪽

어쩌면 삶의 모든 것이 삶을 떠나기 위한 긴 준비에 불과한 것은 아닌지. -103쪽

그러나 나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게 빛을 발하는 것은 신성한 그녀가 아니라 죽을 수밖에 없는 그녀다. 이미 사라진 것들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그 빛이 아무리 퇴색했다 해도, 그녀는 내 기억 속에 그녀 자신의 화신으로 존재한다. 내 기억 속 풀이 덮인 둑에 누워 있는 여자와 땅이 이제 그녀의 것으로 간직하고 있는 흩어진 먼지와 마른 골수,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더 현실적인가? 다른 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녀는 살아남아 있을 것이 틀림없다. 기억의 납 인형 진열관 속에서 움직이는 인형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그녀는 나의 그녀와, 또 서로의 그녀와 다를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사람은 가지를 치고 흩어진다. 그것은 지속되지 않는다. 지속될 수가 없다. 그것은 불멸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죽을 때까지 죽은 자를 우리와 함께 이고 갈 뿐이다. 그런 다음에는 누군가가 우리를 잠시 이고 간다. 그런 다음에는 또 누군가가 우리를 이고 갔던 자들을 이고 가고, 이렇게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먼 세대들로 이어져 간다. 나는 애너를 기억한다. 우리 딸 클레어는 애너를 기억하고 나를 기억할 것이다. 그런 다음 클레어도 사라질 것이고, 클레어는 기억하지만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생겨날 것이다. 그것으로 우리는 최종적으로 소멸한다. 물론 우리 가운데 어떤 것은 남을 것이다. 바랜 사진, 머리카락 한 타래, 지문 몇 개, 우리가 마지막 숨을 쉰 방의 공기에 들어 있던 원자 몇 개.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지금 우리이고 전에 우리였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죽은 자의 먼지일 뿐이다. -122~3쪽

어린 시절에는 행복이 달랐다. 그때는 그냥 축적하는 것, 뭔가를-새로운 경험을, 새로운 감정을- 가지는 것, 그리고 기것이 마치 광택이 나는 기와인 양 언젠가 놀랍게 마무리될 '자아'라는 누각에 올려놓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그리고 쉽사리 믿지 않는 것, 그것 역시 행복에서 큰 부분을 차지했다. 자신의 단순한 행운을 완전히 믿을 수 없는 그 행복한 상태 말이다. -148쪽

모든 것이 약간씩 균형을 잃었고, 모든 각도가 약간씩 어긋나 있었다. 계단은 더 가팔랐고, 층계참은 더 비좁았고, 화장실 창문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도로가 아니라 뒤쪽의 들판을 내려다보았다. 현실, 지독하게도 자족적인 현실이 내가 기억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휘어잡은 뒤 마구 흔들어 자신의 입맛에 맞는 형태로 맞추자 나는 거의 공황 상태에 이를 뻔 했다. 뭔가 귀중한 것이 해체되면서 내 손가락들 사이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은 그렇게 빠져나가도록 방기해 버렸다. 과거, 그러니까 진짜 과거보다는 우리가 내세우는 과거가 더 중요하다. -159~60쪽

정말이지 기억을 위한 노력만 충분히 기울이면 사람은 인생을 거의 다시 살 수도 있을 것 같다. -163쪽

나는 애너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일부러 그녀 생각을 한다. 하나의 훈련이다. 그녀는 칼처럼 내게 박혀 있는데도 나는 그녀를 잊기 시작한다. 내 머릿속에 들어 있는 그녀의 영상은 이미 가장자리가 닳고, 염료 조각, 금박 조각이 떨어져나가고 있다. 언젠가는 캔버스 전체가 텅 빌까? 내가 그녀를 얼마나 모르는지 깨닫게 되었다. 내가 아주 천박하게, 부적당하게 그녀를 알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나 자신을 탓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탁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너무 게을렀던가? 너무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가? 너무 나 자신에게만 열중했던가? 그래, 다 맞다. 하지만 그것을, 이런 잊음을, 이런 몰랐음을 꼭 탓할 일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차라리 안다는 면에서 너무 많은 것을 기대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자신도 요것밖에 모르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216~7쪽

기억은 움직임을 싫어한다. 사물을 정지된 상태로 유지하는 쪽을 더 좋아한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는 다른 많은 장면들과 마찬가지로 나는 이 장면도 하나의 그림으로 본다. -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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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6-12 2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직접 손으로 세차를 합니다. 무섭게 돌아가는 자동세차 기계 안으로 -
밀어넣고 싶지 않거든요.
매일 열심히 달리면서도 어디 아퍼도, 추운 겨울에 몸이 꽁꽁 얼어도, 더운 여름에
혼자 숨이 막혀도 말없이 나를 위해 노동을 하는 자동차에 대한 작은 감사의 표시로 -
나는 직접 손 세차를 해줍니다. 그러면 그 다음 날 가볍게 달리는 자동차의 마음을
느낄 수가 있거든요. (웃음)
모든 사물도 정령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언제나 존중하고 싶습니다.
이 책은 바다, 물에 대한 글인 것 같기는 하나.
저는 이 멋진 밑줄긋기란에서 세상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을 느꼈습니다.

이매지 2007-06-1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빠도 아침마다 꼭 직접 세차를 하고 나가세요. (택시기사하셔요^^) 차를 깨끗하게 하고 나가면 차도 좋고, 운전하는 아빠도 좋고, 타는 손님도 좋다는 마음에서요^^; 그때문인지 차가 아직 별 고장없이 잘 달려주네요^^

비로그인 2007-06-1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하하핫. 거대한 팥 아이스크림. 맛있어 보이긴 한데...혼자 먹기엔..(웃음)
(- 사실, 이 댓글을 그 페이퍼에 달고 싶었는데..에러가 나서 말입니다.=_=)
이매지님 서재가 참 깔끔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