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캉의 정신분석 정신분석과 미학총서 4
신구 가즈시게 지음, 김병준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12월
절판


인간 개체가 거울상을 마주했을 때 나타내는 강한 환희 속에는 자아의 통합과 성적인 활동이라는 양면이 혼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즉, 인간은 이 시기에 거울상으로서의 자신을 이상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자신을 성적 흥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이것이 나르시시즘의 구조이다. 거울이라는 허상의 차원 속에서 성적인 목표와 이상적인 자아가 공고히 결합되는 것이다.
머지않아 '거울의 나'는 '사회적인 나'로 급선회한다. 즉, 거울을 대신해서 사회적 가치를 담당하는 자로서의 동포의 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회적인 나로의 선회는 인간을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자로 안정시키는 방향성을 가지는 동시에 인간을 사회에 매인 몸으로 만들어 편집증적 광기의 구조적 기반을 준비한다. -52쪽

클라인의 번역 원고 분실, 면담시간 단축, 애인 실비아의 임신, 대공비의 이름 누락, SPP를 탈퇴해도 IPA에 남을 수 있다는 착각 등 일련의 실수가 거듭되면서 라캉은 라캉으로 생성되었다. 돌이켜 보면, 각각의 실수가 한결같이 한 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다는 사후적 의미 부여가 가능해진다. 정신분석에 의해 주체가 어떻게 주체성을 실현하는가에 대한 모델이 라캉 자신의 정치적 생명의 궤적 속에 나타나 있다.
정신분석에서 무의식의 욕망이 차차 드러나는 것처럼, 실수로 점철된 라캉의 궤적은 자신도 모르는 그의 욕망에 의해 지탱된 것으로 보인다. 그 욕망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희생양 게임처럼 보이는 이 고통스러운 분열극을 라캉은 어떤 기분으로 경험하고 있었을까? (중략)
라캉에 의하면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신화를 자신의 발견의 근원적인 형태로 선택한 이유는 오이디푸스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몰랐다'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라캉은 그 당시 자신이 처한 정치적 운명을 그리스 신화 속 비극의 주인공의 운명과 겹쳐서 볼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정신분석가답게 자신의 무의식의 욕망이 오이디푸스적인 운명으로 자신을 끌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것으로 보인다. -68~9쪽

정신분석가는 환자의 말의 속도를 감지하면서, 환자의 내면의 담론 속에 생겨난 이 '촉박함'을 포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는 움직이는 리듬, 시간의 변조에 자신의 귀와 보조를 맞추어야 하는데, 이 때 단시간 면담은 구획을 지향하면서 스피드를 올린다. -83쪽

단시간 면담이란 인간이 스스로를 인간으로서 파악하는 실천인데, 그 자기 의식 속에서 사람이 아닌 대상이 필연적으로 포함되고, 그것이 떠오르는 것을 전제하고 있는 실천인 것이다. -92쪽

대상-a는 내가 나 자신을 초월적인 시점에서 보게 될 때 필요한 지지대인데, 이것이 둘러싼 사람과 물건 속에 나타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초월적인 관점을 가지게 되도록 도와준다. 이 지지대가 없다면 나는 자신을 외부에서 볼 수 없다. -100쪽

나에 대한 타자의 비율로서의 대상-a는 나의 자기동일성의 지지대이다. 비율인 대상-a는 당연히 눈에 보이지 않지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문제가 뚜렷이 드러나듯이 이 비율이 조금이라도 붕괴되면 대상-a는 비율이 아닌 응시나 똥 등으로 구체성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타자를 황금수의 입장에서 볼 때, 나와 타자의 관계는 원래 불안정한 것이다. 왜냐하면 황금수는 무리수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이른바 '무리수적인 관계'로서 끊임없이 애매하게 흔들리고 있는 관계이다. -101쪽

나의 언어 활동이 진리를 포괄하기 위해 요청되는 내가 누구인지에 관한 증거를 나 자신은 내세울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증거를 요청하고 있는 언어를 향해 내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다시 던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나는 태초부터 거기에 존재하는 언어에서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의미를 얻어야만 한다. 의미를 만드는 것에 관한 능동성은 더 이상 내 안에 없다. 그것은 언어 속에 위치지워져 있다. 언어는 나에게 있어 태초부터 그곳에 있고 나에게 생존의 의미를 부여하는 자로 간주된다. (중략) 말하는 존재인 인간은 자신에 관한 이야기에 이르면 논리적 무모순성을 유지할 수 없다. 이것은 언어의 구조상 필연적이다. 말하는 존재 자체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언어 바깥의 어떤 것에 의해 지탱되어야 한다. 그 지탱은 말하는 존재의 바깥에서만 구할 수 있다. 무력한 수단으로서 타자의 담론을 받아들일 뿐인 존재는 동시에 나의 언표의 진실성을 지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런 존재는 과거의 타자의 담론 속에 흔적없이 묻혀 있다. 타자의 담론 속에서 그 대상으로서 존재를 누리고 있던 나의 실재는 타자의 담론을 통해 발견되어야 한다. -122~4쪽

욕망을 매개로 하여 주체가 타자가 되는 것은 어떤 대상에 대해 주체가 맺고 있는 관계라 주체에 대해 타자가 맺고 있는 관계로서 상징화되는 것이다. -168쪽

광기는 자유에 대한 '모독'이 아니라 가장 충실한 동반자이며, 그 움직임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닙니다. 또한 인간의 존재는 광기 없이는 이해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만일 인간이 스스로 자유의 극한으로서의 광기를 자신 안에 짊어지지 않았다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심적 인과성에 대하여')
-178쪽

사회에서 이러한 상상계의 작용을 없애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상상계의 작용은 사회의 기본적인 유대구조이기 때문이다. 다수에 끼어 보려는 게임에는 늘 절대 다수자의 상이 환상으로 떠오른다. 이 다수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군중의 의향을 구현하는 자이다. 이러한 사람의 원래 모습은 상상적 단계에서 설립된 우리 자신의 거울상이다. 나는 다수자가 구성하고 있는 전형적인 인간이라는 거울상 속에서 자기동일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작업에 힘쓰고 있다고 해야 할까?-19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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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6-06 2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열심히 라깡에 입문하고 계시는군요 :)
전 라깡은 아직입니다. 관심영역 밖에 있어요.

이매지 2007-06-07 0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관심영역 밖이긴 하지만 레포트를 써야하는 관게로 어쩔 수 없이 -_ ㅠ
읽다보니 알 것도 같은데 아직은 좀 어렵네요^^

이매지 2007-06-10 1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라캉 읽기>가 이 책보다는 괜찮았던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