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 - 반양장
피천득 지음 / 샘터사 / 2002년 8월
구판절판


수필은 흥미는 주지마는 읽는 사람을 흥분시키지는 아니한다. 수필은 마음의 산책이다. 그 속에는 인생의 향취와 여운이 숨어 있는 것이다.
수필의 색깔은 황홀 찬란하거나 진하지 아니하며, 검거나 희지 않고 퇴락하여 추하지 않고, 언제나 온아우미溫雅優美하다.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그 무늬는 읽는 사람의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
수필은 한가하면서도 나태하지 아니하고, 속박을 벗어나고도 산만하지 않으며, 찬란하지 않고 우아하며 날카롭지 않으나 산뜻한 문학이다. -17~8쪽

많은 소설의 주인공들이 성격 파탄자들이라 하여, 또는 신문 3면에는 무서운 사건들이 실린다 하여 나는 너무 상심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대부분이 건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소설감이 되고 기사 거리가 되는 것이다. 세상에는 나쁜 사람이 많다. 그러나 좋은 사람이 더 많다. 이른 아침 정동 거리에는 뺨이 붉은 어린아이들과 하얀 칼라를 한 여학생들로 가득 찬다. 그들은 사람이 귀중하다는 것을 배우러 간다. -21쪽

젊음은 언제나 한결같이 아름답다. 지나간 날의 애인에게서는 환멸을 느껴도 누구나 잃어버린 젊음에는 안타까운 미련을 갖는다.
나이를 먹으면 젊었을 때의 초조와 번뇌를 해탈하고 마음이 가라앉는다고 한다. 이 '마음의 안정'이라는 것은 무기력으로부터 오는 모든 사물에 대한 무관심을 말하는 것이다. 무디어진 지성과 둔해진 감수성에 대한 슬픈 위안의 말이다. 늙으면 플라톤도 '허수아비'가 되는 것이다. 아무리 높은 지혜도 젊음만은 못하다. -29쪽

녹슨 심장도 피가 용솟음치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건을 못 사는 사람에게도 찬란한 쇼윈도는 기쁨을 주나니, 나는 비록 청춘을 잃어버렸다 하여도 비잔틴 왕국에 유폐되어 있는 금으로 만든 새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아- 봄이 오고 있다. 순간마다 가까워 오는 봄. -30쪽

선물은 뇌물이나 구제품같이 목적이 있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그저 주고 싶어서 주는 것이다. 구태여 목적을 찾은다면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선물은 포샤가 말하는 자애와 같이 주는 사람도 기쁘게 한다. 무엇을 줄까 미리부터 생각하는 기쁨, 상점에 가서 물건을 고르는 기쁨, 그리고 선물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바라보는 기쁨, 인편이나 우편으로 보내는 경우에는 받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상상하여 보는 기쁨, 이런 가지가지의 기쁨을 생각할 때 그 물건이 아무리 좋은 물건이라도 아깝지 않은 것이다. 선물을 받는 순간의 기쁨도 크지마는 선물을 푸는 순간의 기쁨이 있다. -52~3쪽

이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다. 학문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전문 분야의 책만 해도 바로 억압을 느낄 지경이요, 참고 문헌만 보아도 곧 숨이 막힐 것 같다. 수많은 명저, 거기다가 다달이 쏟아져 나오는 시시한 책들, 그리고 잡지와 신문이 홍수같이 밀려온다. 책들의 이름과 저자를 많이 아는 것만을 뽐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문과 학생들에게 고전만 읽으라고 일러 준다. 그러나 그 고전이 너무 많다. 이대로 내려가면 고전에 파묻힐 것이다. 영문학사를 강의하다가 내가 읽지 못한 책들을 읽은 듯이 이야기 할 때는 무슨 죄를 짓는 것 같다. 그리고 읽어야 될 책을 못 읽어, 늘 빚에 쪼들리는 사람과 같다. 사서삼경이나 읽고 <두시언해>나 들여다보며, 학자님 노릇을 할 수 있었던 시대가 그립다. -58~9쪽

찝찔한 눈물, H2O보다는 약간 복잡하더라도 눈물의 분자식은 다 같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눈물의 다양함이여! 이별의 눈물, 회상의 눈물, 체념의 눈물, 아름다운 것을 바라볼 때의 눈물, 결혼식장에서 딸을 인계하고 나오는 아빠의 눈물, 그 정한이 무엇이든 간에 비 맞은 나무가 청신하게 되듯이 눈물은 마음을 씻어준다. -69쪽

전화가 주는 혜택은 받으면서 전화기를 미워하는 사람이 있다. 팬 아메리칸 여객기를 타고 앉아서 기계 문명을 저주하는 바라문 승려와 같은 사람이다. 물론 전화는 성가실 때가 많다. 한밤에 걸려오는 전화, 목욕할 때 걸려오는 전화, 독서삼매에 들어있을 때 걸려오는 전화, 게다가 그것이 잘못 걸려온 전화라면 화가 아니 날 수 없다. 그러나 그 화는 금방 가신다. 불쾌한 상대가 아니라면 잘못 걸려온 전화라도 그다지 짜증나는 일은 아니다. (중략) 전화는 걸지 않더라도 언제나 걸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점에 그 가치가 더 크다. 전화가 있음으로써 내 집과 친구들 집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자못 든든할 때가 있다. 전선이 아니라도 정의 흐름은 언제 어느 데서고 닿을 수 있지마는. -75~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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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7-05-26 17: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30쪽 글귀가 마음을 울려요.^^ 참 좋습니다.

이매지 2007-05-26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다보니 5월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더라구요^^
마침 알지에서 리뷰도서로 받어서 낼름 읽기 시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