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조선 지식인의 발견 - 조선 후기 지식 패러다임의 변화와 문화 변동
정민 지음 / 휴머니스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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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18세기에는 무언가에 단단히 미친 사람이 많았다. 이런 비정상적인 몰두와 집착을 그들 스스로는 몹시 자랑스럽게 여겼다. 벽이 없는 인간과는 사귀지도 말라고 했고, 벽이 없는 인간은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벽은 확실히 이 시기 지식인들을 특징짓는 중요한 코드였다. -20쪽

이 시기에는 이렇듯 백과전서적 지식 경영이 크게 성행했다. 주제와 목표만 정해지면 이들은 모든 정보를 조직화하고 편집해냈다. -25쪽

18세기는 정보 자체가 아니라 정보의 질이 문제되는 시대였다. 산만하고 무질서한 정보들이 우수한 편집자의 솜씨를 거쳐 새로운 저작으로 재탄생했다. 정보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도 달라졌다. 일상의 허접스런 놀이나 풍습, 시정의 이야기도 중요하다고만 생각되면 지체없이 편집되었다. 모든 지식이 편집되고 재배열되었다. -26쪽

그들의 자의식이 지향하는 가치는 옛날이 아니라 지금이었다. 중국이 아니라 조선, 관념적 도덕이 아니라 눈앞의 진실이었다. 이덕무는 자신의 시에서 "나는 지금 사람이라 또한 지금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옛것을 따르느라 참됨을 잃기보다, 눈앞의 진실을 따르겠다는 으미다. 그러자 정약용이 "나는 조선 사람이니 즐겨 조선의 시를 짓겠다"고 화답했다. 박지원은 조선 사람은 조선풍의 시를 짓는 것이 마땅하다고 목청을 높였다. -31쪽

박지원의 생각에 눈 뜬 장님은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이었다. 눈만 뜨면 뭣 하는가? 정작 자아의 주체를 세울 수 없다면 눈을 뜬 기쁨은 새로운 비극의 시작일 뿐이다. 길 잃고 헤매지 않으려거든 도로 눈을 감아라.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라. 좌표축을 세워 출발하라. 확장된 세계, 혼돈스런 정보 앞에서 주체의 확립보다 절박한 건 없다. '나' 없는 세계는 카오스일 뿐이다. 이 점은 인터넷 시대라고 다를 게 없다. -32쪽

잊는다(忘)는 것은 돌아보거나 따지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것이 먹고사는 데 도움이 될지, 출세에 보탬이 될지 따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냥 무조건 좋아서, 하지 않을 수 없어서 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18세기 정신사와 예술사의 발흥 뒤에는, 자신이 좋아하는 어느 한 분야에 이유 없이 미쳤던 마니아 집단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몰두의 바깥에는, 인간의 존재를 질곡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강한 분노와 반감이 교체하고 있었다. -108쪽

18세기 시단은 이러한 환경 아래 삶의 다양한 국면들을 정겹게 포착했다. 시 속에 인간의 체취가 스며들고 그 시대의 풍경이 떠올랐다. 일그러지면 일그러진 대로 진솔했고, 눈물겨우면 눈물겨운 대로 고마웠다. 분노를 굳이 감정의 체로 거르지도 않았다. 변치 않을 도(道)는 눈앞의 진(眞)으로 바뀌었다.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자는 것이 무슨 구호처럼 유행했다. 비슷한 것은 가짜니, 남을 흉내 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두보나 소동파에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보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웠다.

생각이 새롭고 보니, 실험도 자유로웠다. 듣도 보도 못한 육언시를 다투어 지었다. 칠언율시의 삼엄한 형식미에 대한 집착도 사라졌다. 그 자리를 산문투에 가까운 오언절구가 차지했다. 시는 관념적 풍경을 복제하지 않았다. 눈앞의 광경, 살아 숨쉬는 인간들을 관찰했다. 사진사처럼 그 시대의 장면들을 찍어내고, 역사가처럼 꼼꼼한 필치로 재현했다. 추한 것 속에도 아름다움이 있음을 알았다. 겉꾸민 아름다움은 더럽다고 외면했다. 전통적인 형식에는 미련이 없었다. 꼭 해야 할 말이라면 틀을 깨고라도 했다. 주체할 수 없는 광기와 열정이 문단을 떠돌았다. -35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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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넷 2007-04-09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서설 밖에 보지 않았는데, (전문적이긴 하지만)제법 흥미로운 것 같더라구요.:)

이매지 2007-04-09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설에 나온 부분이 바로 뒤 챕터에 또 반복되는 감이 없잖아요.
<미쳐야 미친다>와도 겹치는 부분이 꽤 되는 것 같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