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일기


셋방 부엌창 열고
샷시문 때리는 빗소리 듣다
아욱, 아욱국이 먹고 싶어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또 하루치의 일기를 쓴다
오늘은 오백원어치의 아욱과
천원어치 갱조개
매운 매운 삼백원어치의 마늘맛이었다고
쓴다. 서러운 날이면
혼자라도 한 솥 가득 밥을 짓고
외로운 날이면 꾹꾹 누른
한 양푼의 돼지고기를 볶는다고 쓴다
시다 덕기가 신라면 두 개라고 써 둔
뒷장에 쓰고, 바름이 아빠
소주 한 병에 참치캔 하나라고 쓴
앞장에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는 쓰지 못하고
해방 평등이라고는 쓰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하루살이 날파리가 말라붙어 있는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쓰린 가슴 위에
쓰고 또 쓴다
눈물국에 아욱향
갱조개에 파뿌리
씀벅 나간 손 끝
배어나온 따뜻한 피 위에
꾸물꾸물
쓰고 또 쓴다


송경동 / 꿀잠 / 삶이 보이는 창  

지금은 동네 슈퍼에서도 외상장부를 볼 수 없다. 어릴때 우리 동네 구멍가게에는 외상장부가 있었다. 날려쓴 글씨로 날짜와 이름 그리고 금액이 잔뜩 적혀있는 외상장부는 동네에서 장사하는 구멍가게에서는 필수였다. 늘 돈이 없었던 시절, 외상이 있었기에 그나마 입에 풀칠하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돈이 없는데, 요새는 카드와 마이너스 통장과 대출로 버티며 살아간다. 이것도 일종의 외상인가? 아니! 외상은 이자가 없지만, 카드와 마이너스 통장과, 대출은 고금리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그새 사회는 훨씬 더 삭막해졌다. 흔히 그 시절과 비교하여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훨씬 더 먹고 살기 어려워진 것 같다. 

가끔 엄마가 장보다가 빠뜨린 찬거리가 있으면 심부름을 시켰다. 늦은 밤 아버지의 술, 담배 심부름을 다니기도 했다. 술심부름을 시킬 때는 꼭 내가 먹을 과자도 사도록 허락하셨다. 열번중에 대여섯번은 돈도 없이 심부름을 가곤 했다. 당연히 외상이었다. 가게집 아줌마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수첩을 넘기고는 빠르게 날짜와 이름과 금액을 갈겨쓴다. 가끔은 오백원짜리 동전을 쥐어주고 이백원어치 두부를 사오라거나, 백원어치 콩나물을 사오라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남은 돈으로 외상을 제한다. 외상은 늘거나 줄거나 하지만, 절대 없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 엄마는 그 구멍가게 외상을 다 갚았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생각해보니, 경동선배를 못 본지 좀 된 것 같다. 지금쯤 다리는 다 나으셨으려나? 여전히 목발을 짚고 다니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전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읽은 선배 글에 의하면 요새는 '희망버스' 때문에 수배되었다는데, 어디가에 숨어계신 듯 하다. 평택 미군기지확장 반대 대책위 시절부터 한미FTA 범대위, 기륭 비정규직 투쟁, 용산참사 대책위 등의 활동으로 늘 수배당하고, 조사받고, 숨어계셔야 했던 날들이 참 지겹게도 이어지는 듯 하다.

이 밤 문득 소주 한병 놓고, 선배에게 이런 저런 얘기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에, 그 특유의 입담이라면 이 지겨운 밤정도는 가뿐히 지새울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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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16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가 너무 공감되고, 감은빛님의 글도 참 공감이 되네요.
화려한 겉모습때문에 종종 우린 잘 살고 있다. 되뇌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은 것 같아요.
외상장부와 동네 구멍가게는 사람 맛이라도 있지요.^^ 물가는 오르고, 외상 주는 곳은 카드회사 밖에 없어요. 예전처럼 옆집 앞집 뒷집 음식 나눠 먹는 재미도 없어지구요. 우리 모두는 뭘 위해 이렇게 살고 있는걸까 가끔 생각해요.

추석은 잘 보내셨나요?

감은빛 2011-09-17 00:03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현맘님.
추석은 뭐 그럭저럭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기차표를 구하지 못해 고향에는 내려가지 못했어요.
가까운 처가에서 조카들과 놀아주고,
성묘갈때 운전해주고 그러면서 피곤한 날들을 보냈습니다.

늘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9-16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상장부, 정말 오랜 이야기네요.
아, 맞다, 회사 초년병 때 근처 식당에 선배들이 달아놓은 외상장부는 봤네요.
정말 신기해했죠... ^^

소주 한병과 말.. 저는 완전 서울말 쓰지만, 저도 술 먹이면 말 잘하는데요.ㅋㅋㅋㅋ

감은빛 2011-09-17 00:05   좋아요 0 | URL
저는 대학 1학년때 학과 선배들이 자주가는 술집이나,
운동권 선배들이 자주 가는 술집에 맡겨진
온갖 신분증과 물건들 보면서 신기하고 재밌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느 고학번 선배는 저희들 술 사주느라,
1차때는 학생증을, 2차에서는 주민등록증을,
3차때는 시계를, 4차때는 아예 가방을 통째로 맡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

cyrus 2011-09-1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상장부가 실제로 있었다니 처음 알게 되었어요. 그런데 요즘은 외상을 해주는
가게가 없을거 같아요. 제가 마지막으로 외상이라는 것을 경험했을 때가
중학생 때 학교 근처 문구사에요 ^^;; 당시 문구사 주인 아저씨와 아주머니가
성격이 착하신데다 워낙에 많은 학생들이 애용하다보니 학생들의 이름까지
줄줄이 꿰뚫고 계셨답니다. 그래서 학생들이 외상을 해달라고하면 쉽게
승낙해주셨던게 기억이 나네요.

감은빛 2011-09-17 00:08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정말 한번도 외상장부를 본 적이 없나요?
신기하네요. 그래도 90년대까지는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아마도 동네에 따라서도 많이 다르겠죠.

그 문구점은 장부는 없었지만, 그래도 외상을 해줬군요.
그럼요. 사람사는 세상에서 외상이 없으면 너무 삭막하잖아요! ^^

파란놀 2011-09-20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키려고 힘쓰는 사람들은 안팎에서 힘들겠지요.
아예 아무런 싸움도 아픔도 없이
모두 다 함께 '권력자'와 '기득권자'만 서울에 남기고
서울하고 멀리 떨어진 시골로 간다면,
이 세상이 달라질는지 몰라요..

감은빛 2011-09-23 17:47   좋아요 0 | URL
된장님 말씀처럼 '권력자'와 '기득권자'만 남기고
모두 서울을 떠난다면 그 수많은 사람들의 이동으로 인해
또 새로운 사회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네요.
시골이 더이상 시골이 아닌 다른 어떤 공간이 되어버릴 지도.

딱 하루만 전국의 모든 자동차를 멈출 수 있다면,
세상이 완전히 바뀔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종종 해봤는데,
된장님의 이 말씀도 종종 상상해보면 재밌겠네요.
 
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
이종묵.안대회 지음, 이한구 사진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바람이 머리칼을 날린다. 미친 듯이 나풀거리는 목도리를 붙잡아 한 바퀴를 더 돌려 묶어보려 했는데,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뺨을 에이는 칼바람 덕분에 얼굴엔 아예 감각이 없다. 오직 나 혼자 외딴 세계에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들려오는 건 오직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 뿐이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겨울이었다. 유람선 2층 난간에 매달려 바람을 맞으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너무 매섭고 차가웠기 때문에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오직 한 쌍의 남녀가 나와 반대쪽 난간에 매달려 있었지만, 그들조차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곧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높은 파도에 배가 한번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있는 힘껏 난간을 붙잡고 버텼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입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뺨에 감각이 없었지만, 그래서 실제로 내가 웃고 있는지 아닌지 느낄 수도 없었지만, 난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입으로 '허허허'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 날이 생각났다. 귀를 때리는 바람소리와 배와 함께 몸을 들었다 놓는 파도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다. 그 날의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무척 슬펐다. 그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내 몸을 바람과 파도에 맡겨놓았다. 차가운 바람이 내 슬픔을 날려버리고, 난폭한 파도가 내 슬픔을 쓸어가 버리길 원했다. 이상한 건 그때 얼마나 슬픈 마음이었는지는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왜 그렇게 슬펐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속으로만 좋아하던 여성에 대한 마음의 정리였는지. 그해 여름에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나름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느낀 후회였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바람과 파도 속에서 괴롭고, 슬프고, 외롭고, 허탈했다.

유배지로 떠나는 선비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머나먼 절해고도로 가는 배 위에서 과연 무엇을 생각할까? 아무리 뛰어난 문재(文才)나 대학자라도 그 억울하고 괴로운 길에서 평정심을 갖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술에 취해 배에 오른 줄도 몰랐다는 이규보는 무척 운이 좋았다. 배의 사방에 장막을 쳐서 밖을 보지 못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제주도로 간 광해군이 가장 불안하고 먼 길을 갔으리라. 책에 실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불운했다고 봐야겠다.

책은 절해고도에서 남긴 시와 글을 통해 그들이 유배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추적해 들어가는데, 나는 자꾸만 그들이 유배지로 향하는 배 안에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궁금하다. 곧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을까? 아니면 이제 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리라 체념했을까? 각각의 인물들이 끌려가게 된 사건과 배경을 두고 추리해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한때 같은 한 공간에서 일했던 활동가들 중 두어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백령도에 점박이물범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들어가곤 했다. 이 책에서도 설명하듯이 백령도는 종종 배가 못 떠서 발이 묶이곤 한다. 그들도 가끔 섬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면 남아있는 우리는 섬에 갇힌 그들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각종 회의에, 기획안에, 보고서에 늘 바빠서 허덕이는 처지에 휴대폰조차 잘 안 터지고, 인터넷 연결조차 쉽지 않는 절해고도에 한 며칠 갇히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천국이 따로 없을 것만 같다.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씩 발이 묶였다가 돌아온 그들에게 그 꿀 같은 휴가(?)를 어찌 보냈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정말 좋았다고 했다. 당장 써야할 보고서와 회의 등의 급한 일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그냥 맘 편히 지냈다고 했다. 여관 근처에 유일한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만화를 읽기도 했다는 얘기에 듣는 이들 모두에게서 부러움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딱 이틀만 좋았단다. 삼일 째부터는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만화책도 이틀을 주구장창 읽고 나니 더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란다. 매일 아침 항구에서 오늘은 배가 뜨는지 안 뜨는지를 확인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일이 없어서 미칠 것 같더란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막상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 예상치 못한 고립이 달콤한 휴가와 휴식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발 나를 절해고도에 위리안치 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 누구나 한번쯤을 해보리라. 그런 생각이 들때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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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1 21: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3: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1 23:5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14 13: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실수 없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 관계와 사랑의 심리학
세르주 에페즈 지음, 배영란 옮김 / 황소걸음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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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당신은 늘 남을 가르치려고 들어요. 나는 당신의 애인이지, 학생이 아니예요.' 기억 속 어느 여성이 말했다. '오빠가 제일 자주 하는 말이 뭔지 알아? 누군가가 무슨 말만하면 곧바로 그게 아냐! 라고 말해. 일단 먼저 그렇게 말해놓고, 이유를 붙이는데, 솔직히 그 이유를 들어도 왜 그게 아닌지는 잘 모르겠어.' 기억 속의 또 다른 여성이 말했다. 그리고 또 다른 목소리는 '아유! 이 운동권 말투! 정말 재수없어!' 이렇게 짜증을 내기도 했다.  

기억을 더듬다보면 구체적인 상황까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내 태도와 말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다. 대부분 나와 아주 가까웠던 사람들이다. 나는 종종 섬세하고, 남을 배려하는 편이라는 평을 듣는데, 이런 경우 대부분 나와 약간의 거리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사실 그리 친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내 본심을 내보이며 상처를 줄 이유는 없다. 누구에게든 약간의 가식적인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아끼고, 좋아하고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왜 상처를 주는 걸까? 아마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나의 진심을 다 말해서 말하게되고, 있는 그대로의 태도로 대하게 된다. 그러다보면 내가 갖고 있는 성격 혹은 성향 중에 공격적이거나, 자기 중심적이거나, 혹은 마초적인 면이 나도 모르게 드러나게 된 것일지도 모른다. 앞서도 말했듯이 구체적인 상황들이 생각나지는 않지만 대부분 정치적 성향이나, 내가 갖고 있는 나름의 신념에 관계된 일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들과 상처를 주고받는 상황이 벌어진 것 같다.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조금 더 거리를 두고 객관적인 입장에서 대했다면 저런 실수를 안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실수였다고 뒤늦은 변명을 던져보아도, 말그대로 버스 떠난 후에 손 흔드는 격이다.

사랑 혹은 관계

사랑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일까? 내게 사랑이 의미하는 바는 무얼까 궁금해하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내렸던 결론은 가슴을 뛰게 만드는 어떤 감정이었다. 지금은 어떨까?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면 여전히 똑같을까? 잘 모르겠다. 사랑이 무얼 의미하는지를 생각하기 이전에 먼저 아내와 아이들 그리고 부모님이 떠오른다. 그 사람들이 내가 갖고 있는 관계망에서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고, 또 실제로든 단지 표면적으로든 나와 사랑이란 감정으로 얽혀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나는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평이 좋은 편이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들일수록 그닥 평이 좋지는 않다. 뭐 내 태도로 보아 어찌 생각해보면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그만큼 내가 실제로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에 대해 그닥 신경을 안쓰고 살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들과의 관계와 소통에 좀 더 신경을 쓴다면 뭔가 달라질수도 있을까? 

한때 사랑과 결혼 등에 대해 생각하면서 개인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사회적 관계때문에 혼란과 어려움을 겪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해봤다. 그때 읽은 책이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이란 책이었다. 당시 이 책의 도움을 받으면서 현재 우리나라에서 결혼이라는 것이 얼마나 개인에게 희생을 강조하는 제도인가를 알 수 있었다. 그런 생각이 결혼 후에 가사노동과 육아 등 흔히 여성들의 일로만 생각되는 소위 집안일을 적극적으로 나눠하는 계기가 되었다. 

매일매일 벌어지는 가족간의 소소한 일들이 때로는 갈등이 되기도 하고, 때로는 행복이 되기도 한다. 내가 어떤 말과 행동을 하기 전에 그들의 심리에 대해 좀 더 잘 이해하게 된다면, 실수를 줄일 수 있을까? 

심리학 

'관계와 사랑의 심리학'이란 부제를 단 이 책은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과연 이 책을 읽으면 나는 실제로 '실수 없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을까?' 생각을 하며 책장을 넘겨보았다. 일단 흥미로운 건 사진이나 그림, 만화 등의 시각적 이미지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다. 둘째로 각 장마다 시작하기 전에 한페이지짜리 만화가 나오는데, 프랑시라는 이름의 설치류가 주인공이다.(쥐처럼 보이는데, 정확하게 어떤 류의 동물인지 구분하기는 조금 어렵다.) 한 페이지, 6컷짜리 만화로 늘 시작하는 장면은 주인공 프랑시가 들판을 산책하는 장면이다. 이게 프랑스식 유머인지 가끔 이해안되는 장면이 나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만화이기 때문에 일단 재밌다. 

책은 세 부분으로 나눠져있다. '너'를 (이해하길) 원하는 '나' 라는 제목의 1장은 나라는 존재에 대해 심리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2장은 인간에게 어떻게 사랑이 올까? 라는 제목으로 나와 나외의 존재와의 관계에 대해 접근하고 있다. 3장 사랑은 어떻게 모든 걸 복잡하게 만드는가? 과 4장 사랑, 가족, 민족 은 사랑, 결혼, 가족 등의 주제로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나는 이 책의 구성 순서가 마음에 든다. 먼저 나를 이해하고, 그다음으로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와 사랑에 대해 알게되고, 그 다음에 그런 사랑과 관계들로 인해 벌어지게 될 다양한 일들에 대해 살펴보는 순서가 체계적이다. 각 장에는 저자의 의견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으로 다양한 텍스트들이 인용되어 있다. 이 인용문들이 이 책의 가장 독특한 부분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솔직히 조금 산만한 느낌이 들고, 흐름이 자꾸 끊겨서 그리 효율적이지 못한 느낌이다. 게다가 가장 아쉬운 건 번역인데, 이 글이 심리한 전공자들만 읽는 전문서가 아니라면 좀 더 어휘 선택에 신경을 쓰고, 문체에 신경을 써야할 것 같다. 

결론적으로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내가 '실수 없이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지만, 심리학적으로 나와 타인의 관계, 나와 연인의 관계, 나와 가족의 관계에 대해 어떻게 접근해야할지에 대한 재미있는 지식을 얻은 것 같다. 특히 아직 어린 아기를 키우는 입장에서 유아기의 행동양태에 따른 심리학적 분석에 대한 내용이 많아서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저자가 강조하듯이 인간관계에 촛점을 맞추고 접근하는 새로운 일상을 한번 만들어 보고 싶은 의욕이 생긴다. 지금까지 나 자신으로만 향해있던 촛점을 이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로 한번 옮겨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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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1-09-08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구에게든 약간의 가식적인 친절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오래전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

매우 공감하는 리뷰에요. 특히 위 부분은! 그래서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이 아직도 독자들의 많은 사랑을 받는 거 같아요..

리뷰를 읽으니, 저도 지난 악몽과도 같은 일이 떠오르네요....말...어떤 말을 내뱉느냐가 매우 중요한 것 같습니다.

좋은 글 잘봤어요~^^

감은빛 2011-09-09 03:21   좋아요 0 | URL
야무님! 아휴, 좋은 글이라 말씀하시니 부끄럽네요!
디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은 아직 인연이 닿지 않았는지 읽지 못했습니다.
꽤 오래전부터 보관함에 갇혀있답니다.
야무님의 덧글을 보았으니, 조만간 장바구니를 통해 해방시켜주어야겠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제가 곧바로 그 책을 읽을 확률은 많지 않습니다.
다시 책장 어느 구석에 갇혀있는 신세가 될 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보관함에서 해방시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을 거 같습니다.

늘 고맙습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08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잘 지내셨어요? 글을 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드네요.. 저 역시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해내지 못하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종종 들어요. 나를 편안하게 내보일 수 있는 관계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면 참 행복하겠단 생각도 드네요.. 쉽지 않지만요

감은빛 2011-09-09 03:24   좋아요 0 | URL
솔직히 잘 지내지는 못했지만,
현맘님의 안부인사에 빈말이라도 무척 잘 지냈다는 답을 하고픈 심정입니다.
네, 무척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습니다.
그 편안하게 내보인다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불편함을 의미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노력하다보면 언젠가는 나아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녀고양이님 글을 읽고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3학년으로 기억된다. 제대하고 복학한지 한 학기쯤 지났을 것이다. 동기들보다 한해가 늦은 터라, 같은 학년 중에 홀로 최고학번이었다. 한참 어린 여자후배들과 한살 혹은 두살 어린 남자후배들과 함께 수업을 들었다. 전공 중에 가장 어렵기로 소문난 과목은 '정치사회학'이었다. 첫시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학생들의 발표수업으로 진행되었고, 필기시험 점수보다는 발표와 과제 점수가 학점에 반영되는 비중이 더 높았다. 여학생 비율이 많았고, 대부분의 여학생들은 그런 발표 수업을 무척 어려워했다. 나는 상대적으로 발표 수업에 익숙했다. 1학년때는 학년대표를 했고, 2학년때는 단대 학생회 간부 일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학원 강사 일을 해서 등록금을 마련하느라 동기들보다 1년이 늦은 터였다. 학원 강사 경험 때문에 나는 아주 자연스럽게 발표 수업을 진행했다. 덕분에 우리조는 아주 높은 점수를 받았다. 물론 같은 조에 있던 여자후배들도 기본 자료 조사라던가, 과제 작성에 많은 역할을 했다. 나중에 발표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같이 MT를 갔는데, 그때 MBTI 강사님이 오셨다. 그런 검사를 받아보는 건 처음이었다. 

검사 결과 나는 INTP 유형으로 분류되었다. 이상하게 그 유형에 해당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딱 한명 있었는데, 나와 친하게 지내던 한 학번 아래 후배였다. 평소 공부를 열심히 하고, 학점 좋기로 소문난 녀석이었다. 솔직히 1학년 때부터 늘 학점이 좋지 않았고, 한때 쌍권총(학사경고)도 받아보고, 선동렬 방어률과 유사한 학점을 받곤 했던 나와는 영 딴판인 녀석이었다. 돌아가면서 유형을 밝힌 후에 강사님이 각 유형에 대해 설명하는데, 내가 속한 유형을 설명할 때 맨 마지막에 가끔 잘난척 하는 경향이 있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많은 후배들이 모두 적극적인 공감의 반응을 보여왔다. 좀 당황스러웠고, 좀 충격적이었다. 그때까지 단 한번도 내가 잘난척 하는 편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사실 별로 잘난 것도 없었기 때문에, 잘난 척을 하고 싶어도 할 게 없지 않나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누군가의 충고 덕분에 알게 되었는데, 내가 관심 갖고 있고, 또 잘 아는 어떤 주제에 대해 말할 때 무척 집중해서 말하는 편이고, 그럴 때 잘난 척 하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글쎄, 정말로 그런건지, 아니면 실제로 잘난 척하고 다닌 건지 잘 모르겠다. 

마녀고양이님 덕분에 추억 하나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면 성격유형도 변한다는데, 내가 느끼기에도 그때와 비교하면 내 성격이 많이 변한 듯한데, 지금 하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유료 검사를 따로 받을 여유는 없으니, 인터넷으로 검색해서 아주 간략한 검사를 한번 해봤다. 결과는 마찬가지로 INTP 유형이 나왔다. 기분상으로 둘째 항목에서 예전에 비해 N 에서 S 쪽으로 많이 옮겨온게 아닌가 싶었다. 어쨌거나 그래도 N 성향이 더 강해서 그때와 같은 결과가 나왔다.  

내 유형의 특징을 설명한 글을 한번 옮겨본다. 그날 그 선생님이 설명한 거랑 거의 완전히 똑같은 것 같다. 바로 이 문구 '때로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은근히 과시하는 수가 있기 때문에 거만하게 보일 수 있다.'는 말이 그 선생님이 마지막에 덧붙인 부분이다.

 

>> 접힌 부분 펼치기 >>


 
이 유형의 일반적인 특징 중에서 나와 가장 비슷하다고 느껴지는 부분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 조용하고 말이 없으나 자기의 관심 분야에서는 말을 많이 한다
- 충동적이다
- 꼭 필요한 것 아니면 잊어버린다. (건망증)
- 남들 좋아하는 연예인, 악세사리 등에 관심 없다

특히 건망증에 대한 부분은 매우 심각하다. 나는 꼭 필요한 것 조차 자주 잊어버린다. 그것이 숫자인 경우에는 기억하는게 거의 기적에 가깝다. 나는 내 전화번호 외에 어느 누구의 전화번호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아내의 전화번호도 기억하는데 아주 오래 걸렸는데, 가끔 헷갈린다. 집전화번호도 당연히 기억못한다. 몇 년전에 전화기를 잃어버려서 전화번호를 바꿨을 때는 내 전화번호조차 기억을 못해서 곤란했던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리고 남들이 주로 관심갖는 주제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다. 우리 집에는 벌써 몇 년째 TV가 없다. TV를 볼 시간도 별로 없는데, 달마다 내는 시청료와 유선방송요금이 아까워서 없애버렸다. 드라마나 오락프로그램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기 때문에 하나도 불편함이 없다. 뉴스는 대부분 검색으로 알 수 있고, 보고 싶은 교양프로그램이나 영화도 컴퓨터를 이용해서 다 찾아볼 수 있다. 가끔 사람들이 술자리에서 드라마 얘기나 연예인 얘길 하면 나는 꿀먹은 벙어리가 될 수 밖에 없는데, 그런 때에도 별로 상관없다. 어차피 관심없는 주제에 대해서는 끼지 못한다고 아쉬울 거 하나도 없다. 그 시간에 나는 그냥 조용히 뭔가 생각할 꺼리를 찾아내어 머리속으로 정리를 하거나,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기도 한다. 

암튼 생각보다 나랑 비슷한 특징들이 많아서 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다만 나는 I 와 E 중에서 E 에 해당하는 성향들도 좀 갖고 있고, 앞서 말한 것처럼 N 과 S 중에서 S 에 가까운 성향들도 갖고 있는 것 같다. 뒤의 T 와 P는 거의 확실한 것 같다. 다른 성격 유형들도 한번 읽어볼까 잠시 생각했다가 그냥 귀찮아졌다. 별로 관심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이런 성향도 INTP 의 특징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럴 거라고 우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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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8-26 09: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하하, INTP셨군요.
그렇다고 반드시 해당 성향만 가지고 계신 것은 아니고, 다만 그 성향을 더 선호하시는 것 뿐이니 상황에 따라 다르시겠죠... 저두 감은빛님의 매일 술과 모임 타령(?)에 E일거라고 생각했는데, 감은빛님의 성찰에 가까운 글과 상황을 큰 범위 내에서 핵심적으로 파악하시는 경향을 보면 I와 N이 맞겠구나 싶어요. S는 사물을 관찰할 때, 하나하나 사실을 먼저 보는 스타일이거든요. 만일 사과를 본다면, 저는 아 빨갛고 사각거리겠군 이라고 말하지만, 감은빛님께서는 오 빌헬름 텔 이라고 말씀하실지도 모른다는거죠. ^^

여하간, 자신에 대해서 안다는 자체가 흥미로와요, 저는 그렇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1-08-26 09:08   좋아요 0 | URL
그런데 INTP라,,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믿음직스러우면서도 무서울 수 있겠는걸요...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직관에 따라 숲을 보면서도 사고적으로 판단하고 그러나 자신의 결론이 마무리된 이후 천천히 말씀하시는 스탈이실테니까요.. 이야.

감은빛 2011-09-08 17:32   좋아요 0 | URL
에구구 댓글이 많이 늦었네요.
8월말과 9월초에 엄청 바쁘고 정신없는 일들이 있었어요.

INTP가 왜 무서울 수 있다는 건지 여쭤보고 싶은데,
지금 상황이 많이 안좋으시니.

부디 힘을 내시길 바랍니다!

마녀고양이 2011-09-16 12:05   좋아요 0 | URL
무섭다는 표현은 조금 과장한거구요,,
제가 INTJ인데, 감은빛님은 INTP이신거죠.
둘 다 우리나라에서 흔한 유형은 아니예요. 그리고 두 유형 모두
통찰과 사고가 뛰어난 유형이죠. 다만 어느 쪽을 먼저 활용하는가의 문제인데
감은빛님은 사고력을 먼저 사용하여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먼저 이성적으로 파악하고 분석하고 문제 해결을 위해 논리적으로 나아가실거예요, 거기다 통찰의 능력까지 있으니, 문제 해결에 있어 숲을 보는 능력이 막강할거구요. ^^

잘난척 한다든가, 초연하다든가 하는 면은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
'타인과의 공감'이 가장 약한 지표라서 그래요. 타인의 감정에 휩싸이기보다
일단 사고가 먼저 발동하거든요, 그래서 다소 객관적인 면이 발휘되구요.

아, 글로 쓰려니 영 어설프네요. ㅎㅎ
나중에 얼굴로 보면, 우리의 심리에 대해 한번 이야기를 나누어볼까요?
(날만 잡으면 되겠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감은빛 2011-09-17 00:00   좋아요 0 | URL
그럼 마녀고양이님과 저는 맨 마지막 P와 J만 서로 다른거네요!
그렇다면 다른 유형에 비해서는 비교적 비슷한건가요?
그런데 열심히 설명을 해주셨는데도,
저는 잘 이해가 안되네요.
역시 직접 얼굴을 보면서 설명을 들어야 하나봐요! ^^

그럼 이제 날만 잡으면 되나요?
소주 한병 놓고~~~ ^^

비로그인 2011-08-26 2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감은빛님 저도 MBTI 검사할 때 그 유형의 대표자? 가 된 적이 있습니다.
그 강사선생님이 마지막에 덧붙인 말 덕분에 한동안 동기들이 저를 기피하던 일이 생각나 좀 웃음이 나네요.

그 이후로 교직과목 수업때문에 두 번정도 더 하게 되었는데 결과는 늘 같았습니다.당시엔 틀림이 아니라 다름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었던 것 같습니다. 훌쩍 넘어 생각해 보면 대학 신입생때 한 그 검사는 아무리 생각해도 참 잘 한 거 같아요.

감은빛 2011-09-08 17:33   좋아요 0 | URL
앗! 바람결님 저와 같은 유형이신가요?
게다가 저와 비슷한 경험을 하셨다니
왠지 바람결님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드네요.

저도 그 검사 두어번 했는데, 늘 같은 결과가 나왔어요.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6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흔치 않은 유형같은데..그죠?ㅎㅎㅎ
제가 회사 다닐때 팀장님이 이 유형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평소엔 과묵하고 딴 일이나 사람에 관심 없는 듯 보이는데, 자신의 일이나 관심 분야에선 말도 많아지고 카리스마가 대단했죠. 전 그런 사람을 보고 '나쁜 남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나름 매력 있었어요..ㅎㅎ

감은빛 2011-09-08 17:40   좋아요 0 | URL
흠. 제 생각에도 흔치 않은 것 같은데,
의외로 가끔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이 유형인 경우가 있던데요.

'나쁜남자'가 어떤 뜻인지 모르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나쁜남자' 이미지는 저와는 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암튼 매력있다는 말씀은 제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겠습니다! ^^

yamoo 2011-08-28 0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둘째 문단에서 뻥~~터졌어요...ㅋㅋㅋㅋ

전, 내향직관형이에요..ㅎ

그나저나...정치사회학 수업을 들으셨었군요...^^
지식사회학하고 예술사회학 그리고 정치사회학.. 이해사회학 등과 같은 강좌를 들었는데...학부 당시에는 죄다 어렵고 빡센 과목들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근데, 아직도 이해가 안되는 것이 제 전공도 아니었는데, 저런 과목을 왜 들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오리무중입니다...ㅋㅋ

감은빛 2011-09-08 17:43   좋아요 0 | URL
내향직관형이 뭔지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그런데 사회학 전공한 저보다 사회학 수업을 더 많이 들으신 것 같은데요!
저는 국문과 복수전공을 하다가 나중에 졸업학점을 맞추는 과정에서
결국 국문과를 포기했어요.

학구열이 많으신 것 같아요! 멋지세요!

아이리시스 2011-08-28 0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저 왔어요!

저도 인터넷 뒤져서 검사해봤었어요. 이 페이퍼 너무 재밌어요.ㅋㅋㅋ 저보다 다른사람 성격분석하는 거 듣는 거 모두 재밌네요. 뭐 나야 이런 거 안해도 내가 제일 잘 알테니까요.(정말?)

감은빛 2011-09-08 17:44   좋아요 0 | URL
오랫만이예요.
검사 결과는 안 알려주시는 군요! ^^
저는 이런 검사 할 때마다 저에 대해서 더 잘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요.

답글이 많이 늦었네요.
즐겁고 편안한 한가위 되시길 바래요!
 

화요일에 책읽기 모임 장소인 '사직동 그 가게'라는 곳을 찾아갔다. 아담하고 아늑하고 꽤 맘에 드는 장소였다. 친구라는 뜻을 가진 '록빠'라는 티벳 난민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가게이다. 문제는 그날 저녁 록빠에서 만든 잡지 '발밤발밤'의 발행을 축하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책읽기 모임에서 사전에 예약을 해두었을 텐데, 중간에 착오가 생겨서 행사가 겹쳤던 것. 결국 우리는 장소를 옮겨서 '길담서원'에서 책 모임을 해야했다. 

사전 공지가 원활하게 되지 않아서, 오기로 한 사람들이 다 도착할 때까지 '사직동 그 가게'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가게 안은 좀 답답했다. 오후 내내 걸어다닌 덕분에 땀도 많이 흘렸고, 더웠다. 가게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록빠 쪽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과 우리 책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도착하는 사람들도 길 가에 자리잡고 서거나 앉았다. 나는 가방을 길가에 내려놓고 서서 오늘 책에 대한 얘기꺼리를 검색했다. 알라딘 서평들도 찾아보고,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고, 내 생각을 정리도 해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한 두 사람이 오지 않아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한 분이 내 등이 다 젖어있다고 말을 걸어오셨다. 나는 매일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름에는 항상 그렇다. 아침 출근길에 벌써 등이 다 젖고, 오전에 앉아 있는 동안 말랐다가, 오후에 외근을 나가면 다시 다 젖는다. 퇴근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을 오를 때 가장 많은 땀을 흘리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을 벗겨서 씻기면서 나도 함께 씻는다. 

딱히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날에는 낮동안 땀흘릴 일은 별로 없다. 퇴근 길에는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 약 20여분을 걷고, 도중에 둘째 녀석을 안고, 젖병 등이 든 무거운 짐을 들고, 첫째 녀석의 손을 잡아 끌고 등산하는 기분으로 언덕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땀을 안흘릴 수가 없다. 늘 집에 들어오면 셔츠가 완전히 젖어 몸에 달라붙어서 옷을 벗기도 쉽지 않다. 

땀 흘리는 얘기를 하다보니 생각나는데, 딱 작년 이맘때였다. 8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한창 더운 날이었다. 땀을 엄청 많이 흘린 날이 있었다. 아마 평생가도 이날 만큼 많은 땀을 흘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때 사무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4층에 있었다. 10시 무렵 책이 도착했다. 두꺼운 책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두꺼웠고, 더 무거웠다. 상자가 30여개였는데, 상자 하나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엄청 무거웠다. 그리고 그날따라 함께 책을 옮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자 두명은 전날 밤새 일을 하고 그날은 아예 못나오는 상황이 되었고, 편집장님께서는 면담 및 취재 일정이 잡혀있었다. 혼자서 그 많은 책을 다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런 사실을 출근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전주에 냉방병으로 시작된 감기가 채 낫지 않아 몸이 썩 좋지 않았고, 옷도 육체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정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기준에서는 아주 포멀한 옷차림이었다. 그날 오전에 책이 들어오면 오후에 거래처를 방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막노동도 좀 해봤고, 나름 육체노동에는 자신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편집장님께서는 혼자서 도저히 다 옮길 수 없는 양이라고 판단하시고, 어디 근처에 이삿짐 센터를 통하거나 해서 짐을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자고 했다. 나는 일터의 재정 상황을 너무도 뻔하게 잘 알고 있어서 그럴 수 없다고 판단내렸다. 그냥 혼자서 쉬엄쉬엄 올리겠다고 말씀 드렸다.

처음에는 수량이 많으니까 한번에 두개씩 나르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다. 누가 등으로 상자를 올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 이래저래 해서 두개를 들어보려다가 자칫 허리를 다칠 뻔 했다. 도저히 두개를 한꺼번에 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 상자 하나를 사무실까지 올려놓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올 때는 그래도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상자를 올리고 나서는 '이거 장난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세번째 상자를 올리면서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에서는 이를 악물고 겨우 버텨냈다. 4층 복도 바닥에 상자를 털썩 내려놓고, 나도 털썩 무너졌다. 죽을 것 처럼 힘들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도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쉬다가 일어서는데, 이미 셔츠와 팬티가 땀으로 다 젖어있었다. 물 속에 담갔다가 꺼낸 느낌이었다. 좀 더 일하기 편한 복장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땀을 닦으며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네번째 상자를 들어보려다가 좀 더 쉬기로 했다. 계단에 앉아서 한참을 더 쉬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뿐인데. 남아있는 상자들을 보면서 난감했다. 아까 편집장님의 말씀을 들을 걸 그랬다. 후회가 막심했다. 

2개나 3개를 겨우 겨우 안간힘을 다해 올려놓고, 한참을 쉬고 또다시 몸을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새삼 '이렇게 계단이 많았구나.' 싶었고, '이 낮은 단 하나가 이렇게 높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그랬다.', '나도 이제 늙었나보다. 이렇게 힘을 못 쓰는 구나!' 등등 별 의미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대략 3분의 1쯤을 올려놓고 찬 물을 두잔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뺨으로, 목으로, 등줄기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1층으로 돌아와서 남은 수량을 세어보다가 다시 한번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사람을 쓰자고 말하고 싶은 강한 유혹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이미 다 젖어버린 옷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만큼 흘린 땀이 아까워서라도 내 힘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근육을 다시 움직였다. 점심시간까지는 다 끝내고 밥을 먹어야 할텐데,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처음엔 세 상자를 올려놓고 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지쳤다면, 이젠 한 상자만 올려도 지쳐서 바로 다음 상자를 올리지 못하고 쉬게 되었다. 갈수록 속도는 떨어졌다. 무게가 조금만 더 가벼웠거나, 층수가 일 층만 더 낮았어도 벌써 끝냈을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쌓여있는 상자들이 하나씩 줄어들고 있으니 내려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책을 거의 대부분 올렸을 무렵, 면담을 끝내고 손님들을 돌려보낸 편집장님께서 합류하셨다. 남은 수량이 몇 안되었는데, 둘이 하나까 의외로 빨리 끝났다. 사실 계속 혼자였다면, 마지막에 몇 개 남았을 때부터 정말 지쳐서 엄청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다 올린 후의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편집장님께서 안쓰러운 마음에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처음 가보는 샤브샤브 집에 데려가셨다. 맥주도 한잔 시켜주셨다. 밥보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오후엔 편집장님도 외근나가시고,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옷이 다 젖어버려서 거래처 방문은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았으니, 젖어서 찝찝한 셔츠는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했다.   

 

땀이란 단어는 어감이 좋다. 바느질을 할때 쓰는 '한 땀 한 땀' 표현도 참 느낌이 좋다. 위에 언급한 책모임에서 예전에 회원들끼리 대안화폐를 썼는데, 그 화폐 이름이 '땀'이었다. 달마다 모임때 서로 나눌꺼리를 갖고 와서 나누고 나중에 땀을 정산하는 방식으로 대안화폐가 통용되었다. 모임을 준비하거나, 진행하거나, 발제를 하는 것도 다 땀으로 해서 정산을 했다.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도움을 구하고, 그 수고를 땀으로 쳐서 정산하기도 했다.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서 참 재밌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계속 통용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작년 연말쯤부터 안쓰게 된 듯하다. 아쉽다.  

안타깝게도 그날 책모임을 '사직동 그 가게'에서 하지는 못했지만, 거기 다녀온 후에 '록빠'라는 단체와 티벳에 대해 새삼 관심이 생겼다. 티벳하면 생각나는 책은 <사자의 서>다. 언젠가 한번 읽어야지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사두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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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6 0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8-2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모임, 참으로 좋은 모임인거 같아요, 뭐 술 모임도 좋지만요 ^^;;
책이나 독서 모임 뒤에는 뒷풀이도 좋았고요 ㅎㅎ

감은빛 2011-08-26 03:07   좋아요 0 | URL
저를 두고 책을 핑계로 모임에 나가지만, 사실은
술을 마시는게 진짜 목적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그리고 저는 한 달에 두번씩이나,
책모임을 나가서,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신답니다! ^^

blanca 2011-08-2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하실 때 정경이 그려집니다. 나중에 아이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겠지요? 안 그래도 어느 사이트에서 죽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얘기에 댓글로 이 책 추천을 많이 해 놓았더라고요. 그래서 검색해 보았더니 분량의 압박이-..-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해 놓았어요.

감은빛 2011-08-26 03:04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예전부터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 언젠가가 과연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생각난김에 확 질러버릴까 고민중입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5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무거운 박스를 다 옮기셨단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그런게 감은빛 님의 성품을 알려주는 것 같아요. 아이들 손을 잡고 매일 집으로 퇴근하시는 모습도 그려지구요~
<땀>이 화폐의 단위라니...왠지 어감도 뜻도 좋네요. 흐르는 땀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페이퍼 보고 나니 <땀>이라는 단어가 좋아 보이네요~

감은빛 2011-08-26 03:07   좋아요 0 | URL
성품이랄 것 까지 없고,
그냥 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

아, 매일 아이들을 돌보는 건 아닙니다.
아내와 번갈아서 보는 편이고,
아내가 아이를 보는 날에는 주로 술약속을 잡습니다.

'땀' 이란 단어 은근히 어감이 좋아요!
대안화폐를 함께 쓰는 공동체 왠지 재밌을 것 같은데,
계속 이어져왔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