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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해고도에 위리안치하라 - 절망의 섬에 새긴 유배객들의 삶과 예술
이종묵.안대회 지음, 이한구 사진 / 북스코프(아카넷) / 2011년 8월
평점 :
바람이 머리칼을 날린다. 미친 듯이 나풀거리는 목도리를 붙잡아 한 바퀴를 더 돌려 묶어보려 했는데, 뜻대로 잘 되지 않는다. 뺨을 에이는 칼바람 덕분에 얼굴엔 아예 감각이 없다. 오직 나 혼자 외딴 세계에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들려오는 건 오직 철썩이는 파도소리와 귀를 때리는 바람 소리 뿐이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나지 않지만, 한겨울이었다. 유람선 2층 난간에 매달려 바람을 맞으며 먼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겨울바람이 너무 매섭고 차가웠기 때문에 밖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오직 한 쌍의 남녀가 나와 반대쪽 난간에 매달려 있었지만, 그들조차 배가 심하게 흔들리자 곧 계단을 내려가 버렸다. 높은 파도에 배가 한번 심하게 요동쳤다. 나는 있는 힘껏 난간을 붙잡고 버텼다. 가슴이 철렁했지만, 입은 오히려 웃고 있었다. 뺨에 감각이 없었지만, 그래서 실제로 내가 웃고 있는지 아닌지 느낄 수도 없었지만, 난 웃고 있다고 생각했다. 입으로 '허허허' 헛웃음을 흘리고 있었으니까.
이 책을 읽으면서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꾸만 그 날이 생각났다. 귀를 때리는 바람소리와 배와 함께 몸을 들었다 놓는 파도의 감각이 그대로 살아나는 것 같다. 그 날의 나는 어떤 이유 때문에 무척 슬펐다. 그 슬픔을 감당하기 어려워 내 몸을 바람과 파도에 맡겨놓았다. 차가운 바람이 내 슬픔을 날려버리고, 난폭한 파도가 내 슬픔을 쓸어가 버리길 원했다. 이상한 건 그때 얼마나 슬픈 마음이었는지는 생생하게 기억나는데, 왜 그렇게 슬펐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게 속으로만 좋아하던 여성에 대한 마음의 정리였는지. 그해 여름에 돌아가신 할머니에 대한 그리움이었는지. 나름 파란만장했던 한 해를 돌아보며 느낀 후회였는지 알 수 없다. 그저 나는 바람과 파도 속에서 괴롭고, 슬프고, 외롭고, 허탈했다.
유배지로 떠나는 선비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머나먼 절해고도로 가는 배 위에서 과연 무엇을 생각할까? 아무리 뛰어난 문재(文才)나 대학자라도 그 억울하고 괴로운 길에서 평정심을 갖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술에 취해 배에 오른 줄도 몰랐다는 이규보는 무척 운이 좋았다. 배의 사방에 장막을 쳐서 밖을 보지 못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제주도로 간 광해군이 가장 불안하고 먼 길을 갔으리라. 책에 실린 이들 중에서도 가장 불운했다고 봐야겠다.
책은 절해고도에서 남긴 시와 글을 통해 그들이 유배지에서 어떻게 지냈는지를 추적해 들어가는데, 나는 자꾸만 그들이 유배지로 향하는 배 안에서 어떤 심정이었을까 궁금하다. 곧 다시 조정으로 복귀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을까? 아니면 이제 가면 다시 나오지 못하리라 체념했을까? 각각의 인물들이 끌려가게 된 사건과 배경을 두고 추리해보는 것도 나름 재미있다.
한때 같은 한 공간에서 일했던 활동가들 중 두어 명이 한 달에 한 번씩 백령도에 점박이물범의 생태를 조사하기 위해 들어가곤 했다. 이 책에서도 설명하듯이 백령도는 종종 배가 못 떠서 발이 묶이곤 한다. 그들도 가끔 섬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그러면 남아있는 우리는 섬에 갇힌 그들을 한없이 부러워한다. 각종 회의에, 기획안에, 보고서에 늘 바빠서 허덕이는 처지에 휴대폰조차 잘 안 터지고, 인터넷 연결조차 쉽지 않는 절해고도에 한 며칠 갇히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만으로도 천국이 따로 없을 것만 같다. 짧게는 이삼일, 길게는 일주일씩 발이 묶였다가 돌아온 그들에게 그 꿀 같은 휴가(?)를 어찌 보냈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정말 좋았다고 했다. 당장 써야할 보고서와 회의 등의 급한 일정이 걱정되기도 했지만, 어차피 걱정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니 그냥 맘 편히 지냈다고 했다. 여관 근처에 유일한 만화방에서 하루 종일 만화를 읽기도 했다는 얘기에 듣는 이들 모두에게서 부러움의 탄식이 새어나왔다. 그러나 딱 이틀만 좋았단다. 삼일 째부터는 지루해 죽는 줄 알았다고 한다. 만화책도 이틀을 주구장창 읽고 나니 더 읽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란다. 매일 아침 항구에서 오늘은 배가 뜨는지 안 뜨는지를 확인 하는 것 외에는 달리 할일이 없어서 미칠 것 같더란다. 과연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지만, 막상 실제로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서는 그 예상치 못한 고립이 달콤한 휴가와 휴식이 되어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제발 나를 절해고도에 위리안치 해준다면 좋겠다는 생각. 누구나 한번쯤을 해보리라. 그런 생각이 들때 읽어보라 권하고 싶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