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상일기
셋방 부엌창 열고
샷시문 때리는 빗소리 듣다
아욱, 아욱국이 먹고 싶어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또 하루치의 일기를 쓴다
오늘은 오백원어치의 아욱과
천원어치 갱조개
매운 매운 삼백원어치의 마늘맛이었다고
쓴다. 서러운 날이면
혼자라도 한 솥 가득 밥을 짓고
외로운 날이면 꾹꾹 누른
한 양푼의 돼지고기를 볶는다고 쓴다
시다 덕기가 신라면 두 개라고 써 둔
뒷장에 쓰고, 바름이 아빠
소주 한 병에 참치캔 하나라고 쓴
앞장에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라고는 쓰지 못하고
해방 평등이라고는 쓰지 못하고
피골이 상접한 하루살이 날파리가 말라붙어 있는
슈퍼집 외상장부 위에
쓰린 가슴 위에
쓰고 또 쓴다
눈물국에 아욱향
갱조개에 파뿌리
씀벅 나간 손 끝
배어나온 따뜻한 피 위에
꾸물꾸물
쓰고 또 쓴다
송경동 / 꿀잠 / 삶이 보이는 창
지금은 동네 슈퍼에서도 외상장부를 볼 수 없다. 어릴때 우리 동네 구멍가게에는 외상장부가 있었다. 날려쓴 글씨로 날짜와 이름 그리고 금액이 잔뜩 적혀있는 외상장부는 동네에서 장사하는 구멍가게에서는 필수였다. 늘 돈이 없었던 시절, 외상이 있었기에 그나마 입에 풀칠하고 살았던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돈이 없는데, 요새는 카드와 마이너스 통장과 대출로 버티며 살아간다. 이것도 일종의 외상인가? 아니! 외상은 이자가 없지만, 카드와 마이너스 통장과, 대출은 고금리의 이자를 물어야 한다. 그새 사회는 훨씬 더 삭막해졌다. 흔히 그 시절과 비교하여 먹고 살기 좋아졌다고들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훨씬 더 먹고 살기 어려워진 것 같다.
가끔 엄마가 장보다가 빠뜨린 찬거리가 있으면 심부름을 시켰다. 늦은 밤 아버지의 술, 담배 심부름을 다니기도 했다. 술심부름을 시킬 때는 꼭 내가 먹을 과자도 사도록 허락하셨다. 열번중에 대여섯번은 돈도 없이 심부름을 가곤 했다. 당연히 외상이었다. 가게집 아줌마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서 수첩을 넘기고는 빠르게 날짜와 이름과 금액을 갈겨쓴다. 가끔은 오백원짜리 동전을 쥐어주고 이백원어치 두부를 사오라거나, 백원어치 콩나물을 사오라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남은 돈으로 외상을 제한다. 외상은 늘거나 줄거나 하지만, 절대 없어지지는 않는다. 결국 우리 엄마는 그 구멍가게 외상을 다 갚았을까?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시를 다시 읽으며 생각해보니, 경동선배를 못 본지 좀 된 것 같다. 지금쯤 다리는 다 나으셨으려나? 여전히 목발을 짚고 다니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얼마전 오마이뉴스 기사에서 읽은 선배 글에 의하면 요새는 '희망버스' 때문에 수배되었다는데, 어디가에 숨어계신 듯 하다. 평택 미군기지확장 반대 대책위 시절부터 한미FTA 범대위, 기륭 비정규직 투쟁, 용산참사 대책위 등의 활동으로 늘 수배당하고, 조사받고, 숨어계셔야 했던 날들이 참 지겹게도 이어지는 듯 하다.
이 밤 문득 소주 한병 놓고, 선배에게 이런 저런 얘기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구성진 전라도 사투리에, 그 특유의 입담이라면 이 지겨운 밤정도는 가뿐히 지새울 수 있으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