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내리고, 우리는 달리고


지난 글의 끝에 적은 것처럼 지난 주 일요일 아침에 달리기 대회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일기예보에서는 그 아침에 제법 많은 비가 내릴 거라고 했다. 그리고 대회 전날 주최측인 마라톤연맹에서 많은 비가 예상되니 대비를 잘 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작년 9월 초에 첫 10킬로미터 대회에 나간 후로 이번 대회는 다섯번째 대회였다. 그리고 비를 맞으며 뛰는 것은 처음이었다. 아주 가늘게 내리는 비를 잠시 맞으며 뛴 적은 있지만, 제법 많이 내리는 비를 계속 맞으며 뛴 적은 없었다. 첫 경험이다. 뭐든 처음이라면 뭔가 두렵기도 하고 약간은 설레기도 한다. 나는 마라톤 풀코스와 며칠씩 걸리는 산악 달리기를 경험한 친한 형에게 문자로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경우에 뭔가 대비할 것이 있는지 물었다. 한참 후에 그는 "강인한 정신력~~~~ 안전하게 달리기~~~~" 라고 답을 보냈다. 답장을 보는 순간 바로 웃음이 나왔다. 딱히 뭐가 더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뜻으로 알아듣기는 했는데, 물결 모양 표시를 막 붙여 놓은 것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진 것이다. 


어쨌거나 비가 많이 온다고 하니 평소 다른 대회에 참가하거나 마음 먹고 장거리를 뛸 때와는 달리 좀 더 많이 챙겨야 했다. 일단 갈아입을 여벌 옷이 무조건 필요하고, 몸을 닦고 옷을 갈아입어야 할테니 수건도 필요하겠지. 그리고 우비. 나중에 더워서 벗더라도 출발 전에 몸을 풀 때부터 처음 한 2킬로미터 정도까지는 우비를 입고 뛰어야 할 것이다. 언젠가 집회나 야구장 같은 곳에서 입으려고 마련해 둔 우비를 찾아냈다. 일회용으로 쓰는 얇은 비닐 우비보다는 훨 두껍고 좋은 것으로 여러번 사용해도 찢어지지 않는 제품이었다. 나는 가능하면 이 우비를 다음에 또 쓰기 위해 버리지 않고 잘 챙겨오고 싶었는데, 달리다 보니 도저히 더워서 더는 입고 있을 수가 없었고, 아무리 가벼운 우비여도 들고 뛰는 것은 너무 번거로운 일이었다. 허리에 감고 뛰어보기도 했는데, 마찬가지로 달리기에 방해가 될 정도로 거슬렸다. 결국 급수대를 만나서 거기 자원봉사하시는 분께 좀 버려달라고 부탁하고 계속 뛸 수 밖에 없었다.


지금까지 참여했던 네 번의 대회는 모두 아침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고, 무릎과 발목이 아파서 진통제를 먹고 달렸다. 그럼에도 대회 전에 길게는 두 달, 짧게는 삼 주 이상 준비를 했었기 때문에 그래도 기록이 그럭저럭 괜찮았었다. 하지만 이번 대회는 전혀 대비를 하지 못했었다. 이렇게 아무런 대비 없이 대회에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도저히 대회 준비를 할 여력이 없어서 그냥 이번 대회는 평소 실력을 알아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더해 비까지 많이 내린다고 하니, 솔직히 이번 대회는 완전히 망했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어쨌거나 대회는 대회라 당일 좋은 컨디션으로 나가고 싶어서 전날부터 시간 관리와 몸 관리를 나름 했고, 잠도 잘 자려고 노력했다. 아주 잘 잔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에 비하면 괜찮았다. 일찍 일어나서 짐을 잘 챙겨놓고, 속을 비우고, 준비를 마쳤다. 비가 오니 현장에서 하기 어려우리라 생각해서 배번호표와 기록칩도 미리 옷과 신발에 부착해두었다. 이제 조금 일찍 가서 준비 운동과 워밍업을 하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창 밖에선 점점 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대회 장소는 야외라 달리 비를 피할 장소가 없을 것이다. 일찍 가서 워밍업을 한다는 것은 그만큼 더 긴 시간 비를 맞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워밍업을 하면서 비를 맞으면 몸에 열이 오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식어버릴텐데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다. 나는 준비를 다 마친 상태로 계속 창 밖의 비 듣는 소리를 들으며 비가 조금이라도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대회장까지 이동 시간은 넉넉잡아 40여분. 그래도 준비운동을 하긴 해야 할테니 출발시간 1시간 전에는 집에서 나갈 생각으로 시계를 보며 기다렸다. 빗줄기가 조금은 약해지는 듯 하다가 다시 강해지기를 반복했다. 


사실 비를 맞으며 뛰어야 한다는 것이 아주 조금은 설레고 재미있을 것 같은 기대가 들기도 했지만, 아주 힘든 일이 되리란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굳이 비를 맞으며 뛰어야 하나 하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나가기가 싫었다. 그냥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 더 자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래도 나가야지. 그래도 달려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은 것은 참가비가 아까웠기 때문이다. 4만5천원이었던가? 5만원이었던가?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정도 냈었다. 그리고 첫 장거리 달리기 대회 이후 1년 만에 5번째 대회라는 의미를 살리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결국 나는 너무 너무 너무 너무 나가기 싫은 기분을 뿌리치고 빗 속에 집을 나섰다. 


대회장에 도착해보니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요즘 달리기 열풍에 어지간한 대회는 온라인 등록 시작 후 10분도 안 되어 마감되곤 한다는데, 내가 지금까지 뛰어본 대회 중에 가장 참가자가 적어 보였다. 아마 비 때문이겠지. 이렇게 비가 오는데도 참가한 사람들이 정말 대단한 사람들이겠지. 이왕 참여했으니 나도 최선을 다해서 나쁘지 않은 성적을 거두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아, 요 앞의 앞에 문단에서 쓰려고 했다가 깜빡했는데, 지금까지 네 차례의 대회 모두 관절 통증과 컨디션 난조로 당일 몸 상태가 좋지 않았었는데, 이번에는 컨디션이 나쁘지 않았다. 관절도 무릎 통증은 약하게 있었지만, 발목은 괜찮았다. 하지만 이번에는 사전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했고, 이렇게 비가 제법 오고 있었다. 이 변수를 과연 극복할 수 있을까?


비가 제법 내려서 휴대전화기를 손에 쥐고 있기가 어려웠다. 금방 물에 젖어서 혹시라도 물이 들어가 고장이 나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달리기 시작하기 직전에 러닝앱을 켜서 시작 버튼을 눌러야 해서 어쩔 수 없이 계속 손에 쥐고 있었다. 폰은 금방 젖어 버렸고, 급한대로 손바닥으로 물기를 닦아 내며 우비 안으로 손을 넣어두고 출발 시간을 기다렸다. 드디어 사회자가 출발선으로 이동하라고 말했고, 갑자기 대기 장소에 있던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출발선을 향해 움직였다. 나는 출발선에서 가볍게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을 풀며 동시에 긴장을 떨쳐내려 했다. 그러다 시간이 거의 되었다고 생각하고 러닝앱을 열어 시작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전화기를 허리 뒤쪽 숨겨진 주머니에 넣고 지퍼를 잠궜다. 그런데 사회자가 아직 출발까지 7분 남았다며 계속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을 풀라고 주문했다. 아! 너무 일찍 눌러버렸구나. 왜 시간을 안 보고 시작 버튼을 눌렀을까? 이제와서 다시 끄고 어쩌고 하려니 너무 귀찮았고, 아까처럼 손에 쥐고 있으면 또 금방 젖어서 물이 들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그냥 이렇게 가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앱으로 알려주는 페이스가 정확하지 않겠지만, 그냥 평소 내 몸이 기억하는 페이스를 믿어보기로 했다.


드디어 출발. 사람들이 일제히 앞으로 달려나갔다. 몇몇 사람들은 얇은 비닐 우비를 걸치고 있다가 출발하면서 벗어서 버려버렸다. 처음에는 이렇게 춥고 비가 계속 내리는 상황에서 왜 우비를 안 입고 그냥 달리는 것인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그런데 나중에 한 3킬로미터 지점부터 더워서 우비를 벗고 싶어졌는데, 막상 벗고 나니 아무데나 함부로 버릴 수도 없고 이걸 들고 뛰는 것이 너무 귀찮았다. 다행히 그리 오래 가지 않아서 급수대를 만나 버려 달라고 부탁을 드릴 수 있었지만, 아니었다면 기록에 조금은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비를 맞으며 달리는 것은 생각보다 어렵고 힘들었다. 일단 옷이 젖기 시작하면서 축 쳐지며 무거워졌는데, 이 무게가 생각보다 많이 무겁게 느껴졌다. 특히 반바지. 허리에 있는 끈을 꼭 쪼아매지 않고 느슨하게 두고 달리고 있었는데, 옷이 완전히 물에 빠진 것처럼 젖으면서 축 쳐지기 시작했다. 마치 똥 싼 바지처럼 축 늘어져서 벗겨지려고 해서 엄청 신경이 쓰였다. 허리에 넣어둔 전화기 무게 때문에 더 그랬다. 어쩔 수 없이 달리다 잠시 멈춰서 허리끈을 꽉 묶어야 했다. 그리고 젖은 양말과 신발도 무겁게 느껴졌다. 평소라면 가볍디 가벼운 런닝화인데, 이게 이렇게 무겁게 느껴질 수 있다니.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미끄러운 바닥이었다. 아스팔트나 흙 바닥은 그렇게 아주 미끄럽지는 않았지만, 타일 형태로 포석을 박아놓은 바닥은 엄청 미끄러웠다. 조금만 방심하면 미끄러져 크게 다칠 수도 있었기 때문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발목에 힘을 주고 속도를 줄여 조심해서 뛰어야 했다. 그리고 얼굴로 들이치는 빗물 때문에 안경이 자꾸 흐려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경을 벗으면 시력이 너무 나빠 앞을 보기 어렵고, 안경을 끼면 안경 알에 자꾸 맺히고 흘러 내리는 빗방울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저 앞에서 말했듯이 출발 7분 전에 앱을 시작해놓고 그동안 제자리 뛰기를 하며 몸을 풀었기 때문에 앱이 알려주는 페이스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평소 아무 생각없이 그냥 뛰면 530에서 540 페이스로 뛰는 편이라 이 몸의 감각을 믿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처음에는 확실히 오버페이스였던 것 같다. 선두 그룹이 치고 나갈 때 그걸 그대로 뒤쫓아 가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일정 간격을 두고 꾸준히 따라가고 있었기에 그 정도가 적정한 페이스라 생각했는데, 중간에 생각보다 너무 빨리 지친 것을 보면 확실히 초반부터 오버페이스였다. 몇 번인가 과호흡이 오는 것을 속도를 줄이며 어떻게든 호흡을 되찾으며 극복해냈다. 지쳐서 속도가 확 쳐졌다가 한참 후에 천천히 뛰면서 비축한 체력으로 다시 속도를 내고 그러다 다시 지쳐서 속도를 줄이기를 반복했다. 점점 시간이 가고 거리가 늘어나면서 페이스가 내 평소 페이스와 비슷해졌다. 530 정도. 


아, 이번 대회 코스 중에 경사가 그리 급하지는 않지만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구간이 있었는데, 이게 반환점을 향해 갈 때에도 그렇고 결승선으로 돌아올 때에도 무척 힘들었다. 이 구간에서 내 저질체력을 원망하며, 확실히 대회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티가 난다고 느꼈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내리막 길에서 좀 편하게 달렸을텐데, 비 때문에 바닥이 미끄러워 내리막이 오히려 더 힘들었다. 무릎과 발목을 다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고 종종 걸음으로 속도를 확 줄여서 내려와야 했다.


이번 대회의 가장 신기한 점 하나는 대회 운영진들(코스 여기저기 배치되어 길 안내를 하거나, 차량이나 자전거를 통제를 하는 분들)이 아주 열성적으로 참가자들을 응원했다는 점이었다. 지금까지 겨우 네 번 밖에 대회를 나가보지 못했지만, 단 한번도 운영진들이 참가자들에게 이렇게 열심히, 적극적으로 화이팅을 외치는 것을 보지 못했다. 전체 코스에서 어쩌다 한 두 명이 그럴 수는 있다. 그런데 거의 대부분의 지점에 배치된 거의 모든 운영진들이 정말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목청으로 우리를 응원했다. 게다가 다수의 운영진이 달려오는 우리들의 배번호표에 적힌 이름을 읽고, 한 사람 한 사람을 호명하며 응원했다. 나는 늘 혼자 대회에 참여했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서서 자신들의 지인들(아마도 러닝크루 멤버들 혹은 친구들)을 응원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매번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그들이 외치는 파이팅이 마치 나를 향한 것인 양, 생각하며 나도 힘을 내려고 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이 정말 나를 향해 응원을 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번 대회에서는 여러 명의 운영진이 달려오는 내 배번호표를 읽고 내 이름을 부르며 나를 응원해줬다. 이렇게 누가 나를 응원해준 것도 또 처음 겪는 일이라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응원들은 생각보다 효과가 좋았다. 나도 모르게 없던 힘이 막 솟았다. 특히 한 9킬로미터 지점, 그러니까 이제 1킬로미터 정도 남았을 즈음에 나는 완전히 지쳐 자세도 막 무너지려고 하고 있었다. 비에 쫄딱 젖은 생쥐 꼴로 간신히 천천히 뛰고 있기는 했지만, 마음은 계속 포기하고 싶다. 정말 포기하고 걷고 싶다. 아니 그냥 누워버리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전체 구간에서 한 세 번 정도 오버 페이스를 했기 때문에 체력이 완전히 바닥나 있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형광색 경광봉을 흔들던 운영진 한 사람에 내 이름을 부르며 힘 내시라고. 이제 거의 다 왔다고. 결승선이 바로 저 앞이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가 보기에도 내가 정말 많이 지쳐 보였나 보다. 그는 나에게 파이팅을 세 번이나 외치고 다시 내 뒤에 따라오던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응원을 듣고 갑자기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아 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갑자기 어디서 났는지 모를 힘이 났다. 나도 모르게 속도가 다시 빨라졌다. 얼굴로 내리치는 비바람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정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며 미친 것처럼 달렸다. 


아, 이번까지 5번의 10킬로미터 대회를 완주하며 전체 구간의 상황을 떠올려보면, 한 5~6킬로미터 구간에서 첫번째 위기가 오고, 7~8킬로미터 구간에서 조금 힘을 내서 만회하다가 다시 지쳐 쳐지기를 여러번 반복한다. 결국 9킬로미터 즈음에 완전히 지쳐서 호흡도 자세도 다 무너져 언제라도 포기할 정도 상황이 되곤 했다. 사실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초반부터 절반 이상까지, 그러니까 한 7킬로 정도까지 자기 페이스보다 조금 더 천천히 달리며 힘을 비축했다가 거기서부터 조금씩 속도를 올리고 결국 9킬로 지점에서 남은 힘을 다 짜내어 앞서 가던 사람들을 제치는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알고는 있지만, 나는 늘 초반에 오버 페이스를 하고 중반 즈음에 자기 페이스를 찾았다가 후반에 지쳤다가 힘을 짜냈다가 다시 지치기를 반복한다. 이게 다 아직은 내가 원하는 만큼 충분히 체력이 받쳐주지 못하기 때문이겠지. 더욱 체력을 기를 수 밖에.


나는 이번 대회 결과가 정말 만족스러웠다. 기록증을 온라인으로 받아보고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작년 9월 초 첫번째 대회에서는 그날 아주 더웠던 날씨와 대회 전 약 한 달 정도를 발목 부상으로 인해 제대로 달리지 못한 점 등의 이유로 그리 만족스러운 결과를 받지는 못했었다. 처음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날 실제로 정말 많은 사람들이 중도 포기를 했을 정도로 더워도 너무 더웠었으니까. 라고 생각하며 다음 대회를 기약했다. 그리고 작년 11월 말, 이번에는 제법 추웠던 날씨 조건에서도 그럭저럭 만족할만한 기록을 올렸다. 올해 봄 세번째 대회에서는 작년 11월의 두번째 대회보다 약 1초 정도 더 줄이는 것이 목표였는데, 최악의 컨디션으로 참가해 결국은 초 단위까지는 같고 그 이하에서는 오히려 조금 더 시간이 늘어난 결과를 받아들었다. 그럼에도 초단위까지는 같은 성적을 올렸으니 결국 괜찮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세번째 대회로부터 약 2주 후에 참가한 네번째 대회에서 개인 신기록을 올렸다. 주 이삼회씩 꾸준히 달리면서 한번도 올려보지 못한 기록을 세웠었다.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를 못한 평소 실력으로 제법 많은 비를 맞으며 달렸음에도 개인 신기록에서 2초 밖에 늘지 않은, 두번째와 세번째 대회 기록보다는 무려 1초나 줄인 기록으로 들어왔다.


올해 늦여름에 열릴 예정이었던 대회에 동네 사람들 여러명과 함께 신청을 해놓았었는데, 그 대회가 갑자기 취소되어 참가비를 돌려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최근 갑자기 그 대회를 다시 열게 되었다며 다시 신청해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때 당시에는 10명도 넘는 동네 사람들이 함께 신청했었는데, 이번에는 신청이 무척 저조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어쨌거나 나는 의리로 이번에도 신청을 했다. 그래서 11월 중순에도 또 대회를 나가게 되었다. 6번째 대회가 될 것이다. 이제 한 달 반 정도 남은 기간동안 대비를 잘 해서 네번째 대회 기록에서 다시 1초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해볼 생각이다. 다시 개인 신기록을 갱신할 수 있도록 죽어라 노력을 해 볼 생각이다.


작년 가을에 나는 정말 열심히 달렸었다. 10킬로미터 정도는 그냥 마음만 먹으면 뛰었고, 12, 14, 15, 17, 18, 19, 20까지 거리를 늘였다 줄였다 하면서 꾸준히 뛰고 또 뛰었었다. 올해는 일 때문에 그 정도로 뛰기는 어렵겠지만, 그래도 휴식 주기를 잘 활용해 가능한 한 효율적으로 훈련을 한 번 해봐야겠다.


아, 이번 대회에서 큰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내 평소 페이스와 호흡에 딱 맞는 적절한 리듬을 정확히 알게 되었다. 평소 혼자 달리기를 하면 대체로 음악을 듣는다. 음악에 빠져 있거나 아니면 아예 딴 생각에 빠져 있는 편이다. 평상시의 고민이나 잘 풀리지 않는 일들, 인간관계에 따른 어려움들 등등 생각은 언제나 꼬리에 꼬리를 물고 멀리 넓게 퍼져 나갔다가 다시 짧은 한 점으로 모이곤 했다. 즉, 달리기 자체에 집중한 적이 거의 없었다. 대회에 나가는 경우에는 여러 변수들에 대응하기 위해 음악을 듣지 않았다. 언제 주변 사람들과 부딪힐지 모를 일이었고, 혹 자전거나 차가 튀어나올 수도 있으니까. 귀를 열어두어야 안전하기 때문이다. 이번 대회에서는 비가 와서 빗소리와 함께 젖은 도로를 자박자박 밟는 발소리와 함께 내 호흡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렇게 호흡과 발소리가 일정한 리듬을 유지하며 들리는 것을 듣다보니 나만의 페이스를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임의로 속도를 늦추거나 올리면 호흡과 발소리도 그에 맞춰 일정하게 느려지거나 빨라졌다. 이걸 깨닫고 나니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케이던스에 대해 말하곤 했던 것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신기하게 딱 내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은 그리 힘이 들지 않던데, 거기서 조금만 속도를 더 올리면 금방 지치고, 그렇게 되면 금방 페이스가 떨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것에 오를 때에도 떨어질 때에도 호흡과 발걸음이 일정한 리듬을 이룬다는 것을 깨달았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달리기를 마치고 간식과 메달을 받아 화장실을 다녀오고 짐을 찾았다. 달릴 때에는 비가 내 몸을 식혀주어 시원했지만, 이젠 계속 비를 맞고 있으니 급격하게 몸이 식어 너무 추웠다. 얼른 옷을 갈아입으려 남자 탈의실이라 적혀 있는 천막 안으로 들어갔는데, 너무 좁고 작은 천막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게다가 가방과 갈아입을 옷을 놓아둘 테이블은 중간에 고작 하나 밖에 없었다. 아! 정말! 이번까지 다섯 번의 대회 중에 여기 탈의실이 역대 최악이었다. 중간에 하나 밖에 없는 테이블 위엔 도저히 더 가방이나 옷을 올릴 수가 없었고, 사람들은 젖은 땅 바닥에 비닐을 깔아놓고 아슬아슬하게 옷을 벗고 또 입었다. 나는 옷을 갈아입을 공간을 찾을 수 없어서 한 동안 멍하니 기다렸다. 누군가 옷을 다 갈아입고 나가면 공간이 생기겠지 하고 생각했지만, 누군가가 나가는 속도보다 다른 누군가가 더 들어오는 속도가 훨씬 더 빨랐다.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안쪽으로 더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입구 근처 바닥에 비닐을 깔고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자리를 잡았다. 누군가 나가거나 들어올 때마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내 맨 엉덩이가 보이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위치였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젖은 옷을 짜서 여벌 비닐에 넣을 수도 없었고, 옷을 벗은 후에 젖은 몸을 수건으로 닦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그냥 젖은 몸위로 얼른 새 옷을 입어야 했다. 당연히 새 옷은 금방 다시 젖어버렸다. 어차피 바지는 지나가는 사람이 툭 치는 바람에 바닥에 떨어져서 절반 이상 젖어 있었다. 내가 옷을 거의 다 갈아입을 즈음에 들어온 아저씨 두 사람은 크게 웃으며 막 떠들어댔는데, 들어보니 실수로 여자 탈의실이란 글씨를 보지 못하고 그 천막을 열고 고개를 넣었던가 보다.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이상해서 밖에 나와보니 여자 탈의실 천막이었다고. 그래서 남자 탈의실 천막을 찾아 들어왔는데, 여기는 발 디딜 틈도, 가방 하나 올려놓을 틈도 없는 상황이니. 크게 떠들어 댈만도 하다. 사실 대회 시작 전에 대기하면서도, 달리기를 하면서도 여성 참가자들을 많이 보지 못했었다. 여성 참가자들이 너무 적어서 여자 탈의실은 비어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들이 생각하기에 이 탈의실이라는 천막이 너무 열악해서 아예 아무도 옷을 갈아입지 않았던 것일까? 그런데 어쨌거나 탈의실이란 용도로 설치한 천막인데, 여자 탈의실을 남성들이 쉽게 젖히고 들어갈 수 있도록 관리한 것도 참 어이없는 짓이긴 하다. 만에 하나 누군가 안에 있었다면, 옷을 입었던 벗었던 상관없이 여성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성범죄자가 되는 상황이다. 아무도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옷을 갈아입고 나서야 나는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서 간식으로 받은 쥬스와 빵을 허겁지겁 먹었다. 간식을 먹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이 좀 들었다. 나는 온라인 기록증을 보고 너무 기분이 좋아졌고, 정말 망한 줄 알았던 대회 결과가 이렇게 마음에 들어서 얼른 아는 사람들에게 자랑하고 싶었다. 친한 사람들 몇 명에게 메달과 기록증 이미지를 보냈다. 그리고 처음으로 비를 맞으며 대회에 참가해 달렸다는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으려고 했다. 아,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딱 짧게 줄여지지가 않았다. 남들은 뭐라고 하나 싶어서 기억을 더듬어보니 '우중런'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인스타그램과 스레드를 뒤져보니 역시 우중런과 우중러닝 이란 단어들이 나왔다. 이 정체 불명, 국적 불명의 단어가 좀 웃겼다. 우중은 한자고 런은 영어다. 차라리 영어로 running in the rain 이라고 하던가 아님 한자로 우중...... 음 달리기는 중국어로 跑步 인데, 이건 중국식 표현이고, 저 앞의 우중은 우리말식 한자 표현인데. 음 그럼 아예 중국어로 빗 속 달리기, running in the rain 을 찾아봐야겠네. 아, 그런데 오랫동안 비를 맞아서 몸이 추워서 야외에서 그걸 찾고 있기는 힘들었다. 일단 집으로 가는 버스를 찾아 정류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버스를 타고 얼른 자랑은 하고 싶은데, 마땅한 표현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냥 비를 맞으며 달렸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여러 사람들에게 자랑하려는데, 이 말을 반복해서 쓰기엔 너무 길었다. 결국 나도 우중러닝이란 표현을 한 번 썼다. 음, 뭐 뜻이 통하기는 하니까.


나중에 이 표현으로 여러 나라 말로 찾아봤다. 일단 영어는 앞서 언급한 running in the rain 이 맞았다. 이 표현은 그 유명한 노래 singing in the rain 덕분에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그 다음 중국어 표현을 알아보았다. ​在雨中跑步 (zài yǔzhōng pǎobù) 였다. 내 예상대로 跑步가 들어가는 것은 맞았고, 그 앞에 두 글자도 우리식으로 읽으면 우중이 맞다. 맨 앞에 무엇무엇을 하고 있다는 뜻인 ​在를 빼면 내 예상이 맞았다. 그럼 일본어로는 뭘까? 雨の中を走る (あめのなかを はしる) 였다. 오! 이것도 내 예상이 그대로 맞았다. 한자 우중은 여기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그럼 우리말로는? 내 생각에 우리말이 제일 어색하고 길었다. 빗 속 달리기? 비 맞으며 달리기? 비를 뚫고 달리기? 뭐가 제일 간결하고 적절한지 모르겠다. 구글 재미나이를 이용해 그 외에도 여러 나라 언어로 찾아봤는데, 재미있었다.


한가위


어제(일요일) 밤 11시 반쯤부터 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12시가 넘었으니 오늘은 월요일 추석이다. 아까 11시쯤 올려다 본 하늘은 흐려서 달을 찾기 어려웠는데,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다. 얼른 이 글을 마무리하고 한번 더 달을 찾아봐야겠다. 이 글을 읽으시는 서재 이웃님들 모두 평등하고 평안한 한가위 맞으시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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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5-10-06 0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고생하셨습니다. 비를 맞으면서 달린 경험, 평생 잊지 못할 거예요. 제가 군인이었을 때 처음으로 행군했던 날에 비가 내렸어요. 정말 힘들었어요. 그날 무리하게 행군하다가 발을 다쳤고, 봉와직염까지 생겨서 서러운 이등병 생활을 했어요.. ^^;;

감은빛 2025-10-10 14:28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이 댓글 보니 저도 군대에서 비나 눈 맞으며 행군 했던 기억들이 나네요. 조금씩 오는 비를 맞았던 건 셀 수도 없이 많았고, 폭우나 폭설을 맞으며 걸었던 적도 있었어요. 제일 기억 나는 건 폭우가 내리는 도중에 밥차가 와서 식판에 밥을 받아서 길바닥에 앉아서 먹었던 날이었어요. 길바닥에 당연히 비를 피할 곳은 없었고, 폭우가 식판 위로 떨어져 밥과 국과 반찬들이 모두 비에 말아놓은 상태가 되었고, 그 비에 말아놓은 밥과 국을 퍼먹었던 기억이예요. 이걸 안 먹으면 다시 걸을 수가 없으니 어쩔 수 없이 그걸 퍼먹고 있었는데 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이 들었어요.

hnine 2025-10-07 03: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 산소 다녀오는 길에, 비 오는 중에 달리시는 분을 보았어요.
외국에선 흔히 보던 일인데 이미 routine 이 된 일에 대해서는 비도 눈도 문제가 되지 않는거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라는 말의 참뜻을 그때 알았어요.
비가 오는데 달리려면 다른 것보다도 우선 길이 미끄러워 넘어질까봐, 저는 그게 제일 먼저 걱정이 되는데 괜찮으시던가요?
‘우중런’이란 말이 짧아서 입에 금방 들어오긴 하는데, 더 멋진 표현이 뭐가 있을까요.

감은빛 2025-10-10 14:30   좋아요 0 | URL
요즘 비가 와도 맞으며 달리는 사람들이 제법 많더라구요.
제 주위에도 몇 분 계시더라구요.
저는 이번 대회 전까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만,
시작이 반이라고 이제 비가 온다고 안 달리고 그러지 않으려 합니다.
그래서 오늘도 가벼운 비 맞으며 달리고 왔어요. ^^

적절한 표현이 아쉽네요. 그죠?

잉크냄새 2025-10-06 22:1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비를 맞으며 운동을 한 기억은 고등학교 체육 시간 때의 축구 시합입니다. 오래된 기억인데도 그때 느낀 해방감과 자유로움은 평생 잊히지 않더군요.
저도 며칠 전 싸이클 반환점부터 약 15킬로의 거리를 비를 맞으며 달려왔는데 가슴이 그렇게 뻥 뚫리고 환희에 휩싸인 건 참 오랜만의 일입니다.
가끔은 비를 맞아야 해요. ㅎㅎ

감은빛 2025-10-10 14:33   좋아요 0 | URL
저 위에 시루스님 댓글 덕에 군대에서 비 맞으며 걸었던 수많은 행군들이 생각났는데, 잉크냄새님 댓글 덕분에 저도 비 맞으며 축구 했던 기억들이 생각났어요. ㅎㅎㅎㅎ

싸이클 반환점에서 15킬로미터라면 30을 달리신 거군요. 와우!
비 맞으며 달리는 건 오히려 시원하고 좋더라구요.
다만 신발이 젖는 건 좀 문제네요.
오늘도 비 맞으며 달리고 왔어요.

페크pek0501 2025-10-09 13: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추석 다음날 가족이 모여 식사를 하고 서울대공원에 가서 코끼리 열차를 탔어요. 비가 계속 내려서 우산을 쓰고 걸었는데 힘들더라고요. 그 넓은 곳에서 빗속을 걷는 것 자체가 피로한 일이더라고요. 그런데 빗속에서 달리기를 하기란 얼마나 힘드셨을지 짐작이 됩니다. 그러나 이불 속에 있고 싶은 유혹을 떨치고 나갔다는 것, 자신과의 약속을 이행하기 위해 비 맞으며 달렸다는 것, 참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좋은 추억이 될 거예요. 감은빛 님의 달리기를 응원합니다!!!^^

감은빛 2025-10-10 14:37   좋아요 0 | URL
성질 급한 놈이라 달리기는 늘 좋아했어요.
작년 여름 이전에는 1~2킬로미터 정도씩 짧게 끊어서 달리고 좀 쉬다가 또 달리고
이런 식으로 달렸는데, 작년 여름부터 장거리 달리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했죠.
1년 하고 두어달 정도 지났어요.
그 전까지는 사람이 3킬로미터 이상 달려야 할 일이 뭐가 있어?
라고 생각하며 굳이 장거리 달리기를 할 필요를 못 느꼈어요.
그런데 요즘은 뒤늦게라도 장거리 달리기를 시작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좋은 걸 왜 이렇게 늦게 했나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