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보낸 과거 쓴 글


지난 글에서 언급했던 13년 전에 썼던 눈오는 날에 대한 글. 다시 보니 제목을 [빙판길]이라 적었더라. 그 [빙판길] 글을 아이들과 셋이 대화하는 방에 보내봤다. 아빠가 눈을 보고 글을 하나 쓰다가 아주 옛날에 그러니까 13년 전에, 썼던 글을 보게 되었는데, 너희들 어릴때 이런 날이 있었다고 시간 나면 한번 읽어보라는 투로 툭 던지듯 보냈다.


다음날 작은 아이가 먼저 반응했다. 그 글 말미에 작은 아이를 한 팔에 안고, 다른 한 손으로 큰 아이 손을 잡고 빙판길을 걸으며, 작은 아이가 그새 많이 자라서 무거워졌다는 표현이 적혀 있었다. 녀석은 그 표현이 마음에 걸렸던 것인지, 자기가 겨우 2살에 무거웠다는 걸 가장 먼저 적었다. 만으로 2살이고, 우리 나이로 3살이었다. 그냥 무겁다고 쓴 것이 아니라, 빙판길에서 양손을 모두 아이들을 붙들고 가며 아마 나도 모르게 힘이 딸렸던 느낌이 들었을 것이고, 그걸 아기가 그새 더 자라서 무거워졌네 하는 방식으로 썼던 것인데, 아이에겐 그런 맥락이 와닿지 않을 것이다. 그저 내가 저렇게 아기였을 때에도 많이 먹어서 무거웠구나. 하는 그런 생각만 들었겠지. 이걸 대화방에 글로 남기는 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 나중에 만나면 설명해 줄 예정이다. 큰 아이는 그 글 마지막 즈음에 아침 등교길 교문 근처에서 결국 빙판길에 미끄러져 넘어졌고 울었다는 내용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자신이 아침부터 교문 앞에서 엉엉 울었었구나 하고 생각했겠지. 확실히 누구나 자신에 관한 내용이 가장 눈에 잘 띄고, 거기에 더 잘 집중하게 되는 것 같다.


한참 후에 큰 아이는 자신과 비교하며 아빠가 나보다 에세이 스타일의 글을 훨씬 더 잘 쓴다며 놀라워했다. 큰 아이가 중학생이었을 때, 예고 문창과를 가고 싶다고 해서 애들 엄마가 글쓰기 과외를 시킨 적이 있었다. 그때 내가 한두번 뭘 어떻게 배우냐고 묻고, 아이의 대답을 듣고, 아빠가 볼 때는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는 피드백을 줬던 적이 있었다. 글 선생을 못 믿어서 참견을 했다기 보다는 글이란 것 자체가 무조건 잘 쓰는 어떤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기에, 당장은 시간에 쫓겨 예고 입시를 준비해야 하니 선생에게 급하게 배우는 것이지만, 앞으로 긴 시간 글을 쓰며 살아갈 인생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였다. 암튼 그 후로 아이는 예고에 다니는 동안 종종 나와 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점 아이가 자신이 쓴 시를 내게 보여주지 않고, 학교에서 실습으로 쓴 산문 이야기를 들려주지 않게 되었다. 아마 아이가 이런저런 백일장에서 상을 타오기 시작하며 그랬던 것 같다. 지금 대학교 문창과에 다니면서는 아마 아예 아빠와 그런 대화를 나눴던 일들을 기억 못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사실 에세이와 같은 글을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잘 쓰고 못 쓰는 걸 따지는 건 의미 없는 일이다. 그냥 누구나 자신의 진솔한 삶 이야기를 적으면 되는 일이니. 아이와 비교해 내가 더 잘쓴다는 표현은 그래서 맞지 않다. 그저 내가 아이보다는 이런 글을 훨씬 더 많이 썼기 때문에 좀 더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 뿐. 아이는 아마 문창과에 다니는 나보다 우리 아빠가 더 글을 잘 쓰네. 하고 생각한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이겠지. 요 건도 대화방에 글을 남기기보다는 나중에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는 게 좋을 것 같다.


예전에 블로그에 이런저런 잡다한 삶의 흔적들을 두드려 놓은 것도, 지금 이렇게 이 알라딘 서재에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들을 주저리 주저리 두드려 놓는 것도 모두 글 쓰는 일 그 자체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는 누가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오래 전부터 글을 읽고 쓰는 것이 좋았기 때문이다. 예전에 블로그에 남겼던 많은 글들은 블로그 서비스가 종료되면서 모두 사라졌다. 아마 서비스 종료 전에 언제까지 내용을 옮기라는 안내가 있었을텐데, 그때 바빠서 모르고 지나쳤고, 그 많은 내용들을 하나도 저장해두지 못하고 날렸다. 그 후로 가끔 이 알라딘 서재에 일상의 이야기들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가끔 드는 생각은 언젠가 아이들이 이 서재에 대해 알게 된다면 과연 아빠의 잡다한 글들을 읽어볼까? 하는 궁금증이다. 큰 아이는 아마도 나처럼 평생 글을 쓰며 살 것 같으니까 읽을 것 같다. 작은 아이는 어떨까? 궁금해서 읽어보긴 하겠지만, 양이 워낙 많을테니(알라딘에 자주 들어오지도 않고 아주 가끔씩만 써도 이렇게 많기는 하구나.) 다 읽지는 못하겠지. 하긴 그렇게 보면 큰 아이도 본인 일상이 있을 테니 짧은 시간에 다 읽지는 못 하겠구나.


어쩌면 나이가 더 들어 내가 아이들에게 이 서재의 존재에 대해 말해줄 날이 올 수도 있고, 어쩌면 내가 죽고 나서 우연히 이 서재를 발견할 수도 있고, 어쩌면 영영 아이들이 이 서재를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아주 가끔 아이들 어렸을 때 내가 썼던 글들, 그 중에서 좀 재미있을만한, 추억이 될만한 이야기들을 골라 아이들에게 툭 던져주면 어떨까 생각 중이다. 한두번 그렇게 보내보면 아이들이 아빠는 이걸 어디서 찾아서 주는 거예요? 하고 궁금해 할 수도 았고, 아닐 수도 있겠지.




몇 해 전이었던가 우리 동네 작은 도서관에 대해 동네 언니들이 쓴 책이 나왔을 때, 그 출판기념회 이야기를 이 서재에 썼었다. 그 책의 리뷰는 아니었고, 그냥 표지만 집어넣었었는데, 그 책의 정보 페이지에서 내 글을 찾아 읽은 동네 언니들이 생겼었다. 감은빛 이란 덧이름은 동네에서도 쓰는 거라 당연히 나라는 걸 알았을 그 언니들이 내 서재에서 딱 그 글만 읽지는 않았고, 그 글 전후로 내가 쓴 글들도 읽었을 것이다. 어떤 분들은 더 많이 과거까지 거슬러 가며 읽었을 것이고. 그래서 한동안 내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많이 오르내렸다고 들었다.


훨씬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면 자주 쓰지는 않았지만, 내가 쓴 서평이나 글 덕분에 신간 홍보가 된다고 선배 영업자들이 신간이 나오면 나에게 책을 쥐어주며 간단히 소개 좀 해달라고 부탁했던 적도 있었다. 어떤 경우엔 반대로 내가 먼저 책을 사서 읽고 쓴 글을 나중에 그 출판사 영업자가 알게 되어 고맙다고 전했던 적도 있었다. 어느 경우던 내가 출판사나 사람을 보고 일부러 어떤 특정한 책을 소개한 적은 없었다. 무조건 내가 마음이 동하는 책이어야만 소개했었다. 물론 그때도 지금도 나는 알라딘에서 큰 영향력이 없는 그저 일개 독자일 뿐이라 내 소개가 어떤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그닥 없다. 


이렇게 현실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이 이 서재를 방문했다가 내 존재를 알아보고 나중에 이야기 하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어떤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는 경우도 있었고, 특정한 주제로 검색하다가 들어왔다는 경우들도 있었다. 앞서 소개한 것처럼 책으로 걸리는 경우들이 사실 가장 흔한 경우였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는 책 이야기 외에 내 일상 이야기도 읽었고, 그에 대한 느낌이나 상황 등에 대해 내게 물어보거나 조언을 하기도 했었다. 


내가 이렇게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두드리는 일이 어떤 식으로 현실에서 영향을 주는 지를 생각하면 재미있기도 하다. 내가 비록 혼자 단행본을 내지 못해(공저자로 참여한 책이 두 권 있기는 하지만) 작가라고 부르기는 민망하지만, 작가로서 독자를 상정하고 쓴 글이 아니라 그저 글을 쓰고 싶어 이렇게 두드리는 것이 누군가에게 읽히고, 그 누군가가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 재미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글도 언젠가 누군가 나를 아는 사람이 읽게 되겠지. 그럼 또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날이 춥다. 겨울이라 추운 것이 당연하지만, 그뿐 아니라 지금 나를 둘러싼 여러 복잡한 상황들이 나를 더울 춥게 만든다. 계절의 겨울 말고 나를 둘러싼 상황으로서의 겨울은 언제 끝나려나? 얼른 끝나버렸으면 좋겠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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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12-10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라딘에 쓴 제 글을 아직 들킨 적이 없어서...저를 아는 누군가가 읽는다면 어떤 기분일지 문득 궁금해집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