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에 책읽기 모임 장소인 '사직동 그 가게'라는 곳을 찾아갔다. 아담하고 아늑하고 꽤 맘에 드는 장소였다. 친구라는 뜻을 가진 '록빠'라는 티벳 난민 구호단체에서 운영하는 가게이다. 문제는 그날 저녁 록빠에서 만든 잡지 '발밤발밤'의 발행을 축하하는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우리 책읽기 모임에서 사전에 예약을 해두었을 텐데, 중간에 착오가 생겨서 행사가 겹쳤던 것. 결국 우리는 장소를 옮겨서 '길담서원'에서 책 모임을 해야했다. 

사전 공지가 원활하게 되지 않아서, 오기로 한 사람들이 다 도착할 때까지 '사직동 그 가게' 앞에서 하염없이 기다려야 했다. 가게 안은 좀 답답했다. 오후 내내 걸어다닌 덕분에 땀도 많이 흘렸고, 더웠다. 가게 밖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록빠 쪽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속속 도착하는 사람들과 우리 책모임에 참여하기 위해 도착하는 사람들도 길 가에 자리잡고 서거나 앉았다. 나는 가방을 길가에 내려놓고 서서 오늘 책에 대한 얘기꺼리를 검색했다. 알라딘 서평들도 찾아보고, 저자의 다른 책들도 찾아보고, 내 생각을 정리도 해봤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전히 한 두 사람이 오지 않아 더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주위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때 한 분이 내 등이 다 젖어있다고 말을 걸어오셨다. 나는 매일 그렇다고 대답했다. 여름에는 항상 그렇다. 아침 출근길에 벌써 등이 다 젖고, 오전에 앉아 있는 동안 말랐다가, 오후에 외근을 나가면 다시 다 젖는다. 퇴근 길에 아이들을 데리고 언덕을 오를 때 가장 많은 땀을 흘리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을 벗겨서 씻기면서 나도 함께 씻는다. 

딱히 땀을 많이 흘리는 체질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많이 걷고, 많이 움직이기 때문에 땀을 많이 흘리는 것이다. 사무실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 날에는 낮동안 땀흘릴 일은 별로 없다. 퇴근 길에는 지하철 역에서 집까지 약 20여분을 걷고, 도중에 둘째 녀석을 안고, 젖병 등이 든 무거운 짐을 들고, 첫째 녀석의 손을 잡아 끌고 등산하는 기분으로 언덕을 올라야 하기 때문에 땀을 안흘릴 수가 없다. 늘 집에 들어오면 셔츠가 완전히 젖어 몸에 달라붙어서 옷을 벗기도 쉽지 않다. 

땀 흘리는 얘기를 하다보니 생각나는데, 딱 작년 이맘때였다. 8월 중순으로 기억한다. 한창 더운 날이었다. 땀을 엄청 많이 흘린 날이 있었다. 아마 평생가도 이날 만큼 많은 땀을 흘릴 일은 별로 없을 것 같다. 그때 사무실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건물 4층에 있었다. 10시 무렵 책이 도착했다. 두꺼운 책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예상보다 더 두꺼웠고, 더 무거웠다. 상자가 30여개였는데, 상자 하나를 들었다가 깜짝 놀랐다. 엄청 무거웠다. 그리고 그날따라 함께 책을 옮겨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기자 두명은 전날 밤새 일을 하고 그날은 아예 못나오는 상황이 되었고, 편집장님께서는 면담 및 취재 일정이 잡혀있었다. 혼자서 그 많은 책을 다 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더 문제는 그런 사실을 출근하고 나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는 그 전주에 냉방병으로 시작된 감기가 채 낫지 않아 몸이 썩 좋지 않았고, 옷도 육체노동에 적합하지 않은, 정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내 기준에서는 아주 포멀한 옷차림이었다. 그날 오전에 책이 들어오면 오후에 거래처를 방문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막노동도 좀 해봤고, 나름 육체노동에는 자신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그래도 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편집장님께서는 혼자서 도저히 다 옮길 수 없는 양이라고 판단하시고, 어디 근처에 이삿짐 센터를 통하거나 해서 짐을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을 구하자고 했다. 나는 일터의 재정 상황을 너무도 뻔하게 잘 알고 있어서 그럴 수 없다고 판단내렸다. 그냥 혼자서 쉬엄쉬엄 올리겠다고 말씀 드렸다.

처음에는 수량이 많으니까 한번에 두개씩 나르면 어떨까 생각을 해봤다. 누가 등으로 상자를 올려줄 사람이 있으면 좋을텐데, 이래저래 해서 두개를 들어보려다가 자칫 허리를 다칠 뻔 했다. 도저히 두개를 한꺼번에 들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첫 상자 하나를 사무실까지 올려놓고 터덜터덜 계단을 내려올 때는 그래도 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두번째 상자를 올리고 나서는 '이거 장난이 아니다!' 싶었다. 그리고 세번째 상자를 올리면서부터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마지막 계단에서는 이를 악물고 겨우 버텨냈다. 4층 복도 바닥에 상자를 털썩 내려놓고, 나도 털썩 무너졌다. 죽을 것 처럼 힘들었다. 손가락 하나 꼼짝할 힘도 없었다. 한참을 멍하니 쉬다가 일어서는데, 이미 셔츠와 팬티가 땀으로 다 젖어있었다. 물 속에 담갔다가 꺼낸 느낌이었다. 좀 더 일하기 편한 복장이었으면 좋았을텐데, 땀을 닦으며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네번째 상자를 들어보려다가 좀 더 쉬기로 했다. 계단에 앉아서 한참을 더 쉬었다. 이제 겨우 시작일뿐인데. 남아있는 상자들을 보면서 난감했다. 아까 편집장님의 말씀을 들을 걸 그랬다. 후회가 막심했다. 

2개나 3개를 겨우 겨우 안간힘을 다해 올려놓고, 한참을 쉬고 또다시 몸을 움직이기를 반복했다. 계단을 오르면서 별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새삼 '이렇게 계단이 많았구나.' 싶었고, '이 낮은 단 하나가 이렇게 높게 느껴지기도 하는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평소에 운동 좀 해둘걸 그랬다.', '나도 이제 늙었나보다. 이렇게 힘을 못 쓰는 구나!' 등등 별 의미없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대략 3분의 1쯤을 올려놓고 찬 물을 두잔이나 벌컥벌컥 들이켰다. 뺨으로, 목으로, 등줄기로 쉴새없이 땀이 흘러내렸다. 1층으로 돌아와서 남은 수량을 세어보다가 다시 한번 지금이라도 그만두고 사람을 쓰자고 말하고 싶은 강한 유혹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이미 다 젖어버린 옷을 보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만큼 흘린 땀이 아까워서라도 내 힘으로 해결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근육을 다시 움직였다. 점심시간까지는 다 끝내고 밥을 먹어야 할텐데, 다시 마음이 급해졌다. 그런데 처음엔 세 상자를 올려놓고 더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지쳤다면, 이젠 한 상자만 올려도 지쳐서 바로 다음 상자를 올리지 못하고 쉬게 되었다. 갈수록 속도는 떨어졌다. 무게가 조금만 더 가벼웠거나, 층수가 일 층만 더 낮았어도 벌써 끝냈을 수도 있을텐데. 그래도 쌓여있는 상자들이 하나씩 줄어들고 있으니 내려올 때마다 기분이 좋았다. 책을 거의 대부분 올렸을 무렵, 면담을 끝내고 손님들을 돌려보낸 편집장님께서 합류하셨다. 남은 수량이 몇 안되었는데, 둘이 하나까 의외로 빨리 끝났다. 사실 계속 혼자였다면, 마지막에 몇 개 남았을 때부터 정말 지쳐서 엄청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다 올린 후의 내 몰골이 얼마나 엉망이었는지, 편집장님께서 안쓰러운 마음에 맛있는 거 사주겠다고, 처음 가보는 샤브샤브 집에 데려가셨다. 맥주도 한잔 시켜주셨다. 밥보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오후엔 편집장님도 외근나가시고, 혼자 사무실에 남았다. 옷이 다 젖어버려서 거래처 방문은 다음날로 미뤄야 했다. 사무실에 혼자 남았으니, 젖어서 찝찝한 셔츠는 벗어버리고, 맨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아서 일을 했다.   

 

땀이란 단어는 어감이 좋다. 바느질을 할때 쓰는 '한 땀 한 땀' 표현도 참 느낌이 좋다. 위에 언급한 책모임에서 예전에 회원들끼리 대안화폐를 썼는데, 그 화폐 이름이 '땀'이었다. 달마다 모임때 서로 나눌꺼리를 갖고 와서 나누고 나중에 땀을 정산하는 방식으로 대안화폐가 통용되었다. 모임을 준비하거나, 진행하거나, 발제를 하는 것도 다 땀으로 해서 정산을 했다.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일과 관련해서 도움을 구하고, 그 수고를 땀으로 쳐서 정산하기도 했다. 하나의 작은 공동체로서 참 재밌는 사례라고 생각된다. 계속 통용되었으면 좋았을텐데, 작년 연말쯤부터 안쓰게 된 듯하다. 아쉽다.  

안타깝게도 그날 책모임을 '사직동 그 가게'에서 하지는 못했지만, 거기 다녀온 후에 '록빠'라는 단체와 티벳에 대해 새삼 관심이 생겼다. 티벳하면 생각나는 책은 <사자의 서>다. 언젠가 한번 읽어야지 생각만 갖고 있었는데, 이 기회에 사두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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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5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26 03: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8-25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모임, 참으로 좋은 모임인거 같아요, 뭐 술 모임도 좋지만요 ^^;;
책이나 독서 모임 뒤에는 뒷풀이도 좋았고요 ㅎㅎ

감은빛 2011-08-26 03:07   좋아요 0 | URL
저를 두고 책을 핑계로 모임에 나가지만, 사실은
술을 마시는게 진짜 목적이 아닐까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

그리고 저는 한 달에 두번씩이나,
책모임을 나가서, 새벽 늦게까지 술을 마신답니다! ^^

blanca 2011-08-25 2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퇴근하실 때 정경이 그려집니다. 나중에 아이들은 아련한 추억으로 남겠지요? 안 그래도 어느 사이트에서 죽음에 대해 알고 싶다는 얘기에 댓글로 이 책 추천을 많이 해 놓았더라고요. 그래서 검색해 보았더니 분량의 압박이-..-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생각만 해 놓았어요.

감은빛 2011-08-26 03:04   좋아요 0 | URL
이 책 재미있을 것 같아요.
예전부터 언젠가는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그 언젠가가 과연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
이번에 생각난김에 확 질러버릴까 고민중입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8-25 2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무거운 박스를 다 옮기셨단 이야기가 무척 인상적이네요. 그런게 감은빛 님의 성품을 알려주는 것 같아요. 아이들 손을 잡고 매일 집으로 퇴근하시는 모습도 그려지구요~
<땀>이 화폐의 단위라니...왠지 어감도 뜻도 좋네요. 흐르는 땀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 페이퍼 보고 나니 <땀>이라는 단어가 좋아 보이네요~

감은빛 2011-08-26 03:07   좋아요 0 | URL
성품이랄 것 까지 없고,
그냥 지고는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

아, 매일 아이들을 돌보는 건 아닙니다.
아내와 번갈아서 보는 편이고,
아내가 아이를 보는 날에는 주로 술약속을 잡습니다.

'땀' 이란 단어 은근히 어감이 좋아요!
대안화폐를 함께 쓰는 공동체 왠지 재밌을 것 같은데,
계속 이어져왔으면 좋았을텐데, 아쉬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