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을 보내며
또 정신없이 한 달이 지나갔다. 이번 달은 정말 정신이 없었다. 일터에서 직책이 바뀌었다. 긴 시간 실무 책임자를 맡고 있었는데, 이제 임원이 되었다. 작년 가을부터 나를 임원으로 추천하면서, 반대하거나 딱히 의견이 없는 다른 임원들을 설득하고, 또 나를 부추겨 더 열심히 활동하도록 지원해준 몇몇 분들이 계시다. 그 분들 덕분에 무사히 임원이 되기는 했는데, 딱히 큰 변화를 느끼지는 못하겠다. 당장 함께 일하는 동료 활동가들이 호칭을 바꿔야 하는데, 이미 긴 시간 입에 붙어버린 예전 직책 때문에 난감해 하는 정도가 변화라면 변화라 하겠다. 사실 위치가 바뀌어 업무도 바뀌어야 하고, 태도도 바뀌어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이 작은 조직에서 실무자라고 해봐야 몇 명 되지도 않는데, 뭐 얼마나 큰 변화가 생기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암튼 훨씬 더 큰 책임감을 가져야 할 자리인데, 나는 자꾸만 일을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부터 먼저 든다. 작년 가을부터 정말 일을 그만두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었다. 주위에서 계속 격려해주고 응원해주는 분들이 아니었다면 지금 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업무 메일을 쓰거나 전화를 걸면서 직함을 밝혀야 할 상황이 오면 나도 모르게 어색함을 느낀다. 한 2주 전쯤에 그러니까 총회에서 임원으로 선출되고 난 직후에, 어느 회의 자리에서 처음 뵙는 분이 계셔서 소개를 했는데, 새로운 직함을 말하자마자 친하게 지내는 선배들 몇 분이 엄청나게 웃었다. 나는 그 분들이 왜 웃는지 몰라 조금 당황하다가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려 남은 소개를 마저 끝냈는데, 내가 어색하게 말해서 웃었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도 모르게 내 경상도 억양이 나와서 특정한 단어를 강조한 것처럼 들렸다고 했다. 서울 산 지 20년 정도 되었고,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에도 특정한 말을 할 때는 제외하고 사투리를 안 쓰는 편이라는 말을 듣곤 했는데, 이 억양은 갑자기 문득 이렇게 튀어나오긴 하나보다.
지난 주에는 또 누군가에게 멋 부린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음, 외모에 신경을 안 쓰고 산 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멋 부린다는 말을 듣게 될 줄이야. 아마도 머리카락을 길러서 그런 느낌을 준 것 같은데, 머리카락은 멋 부리려고 기르는 것이 아니라 그냥 40년이 훌쩍 넘게 사는 동안 한번도 장발을 해본 적이 없어서, 죽기 전에 한 번은 해보고 싶어서였고, 마침 교통사고로 휴직하는 동안코로나 등을 핑계로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았기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사실은 막상 머리카락을 길러보니 내가 생각했던 스타일이 나오지 않기도 하고, 여러모로 불편한 점도 많아서 그냥 확 잘라버릴까 하는 생각도 가끔 하는데, 이미 기른 것이 아깝기도 하고, 좀 더 많이 길러서 다른 스타일이 되면 뭔가 좀 달라질 것 같기도 해서 그냥 버티는 중이다. 여러가지 불편한 점도 많지만, 한 가지 좋은 점은 이발소나 미용실을 가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예전처럼 짧은 머리였다면 한 달에 한 번은 무조건 머리카락을 자르러 다녀야 했다. 나는 예전부터 미용실 같은 곳에 앉아 있는 것이 무척 불편했다. 어떻게 잘라 드릴까요? 라고 묻는 것도 불편하고, 가위질을 하면서 자꾸 고개를 숙여라, 들어라 하는 것도 불편하고 특히 다 자른 후에 뭔가 어색한 내 모습을 거울로 확인하면 옆에서 기대하는 듯한 표정으로 지켜보는 모습이 가장 불편했다. 요즘 MBTI 가 엄청 유행이고 나의 이런 모습은 전형적인 I 의 모습이라고 얘기하는 것 같다. 평소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은 내가 I 인 것에 대해 대체로 고개를 끄덕이지만, 업무상 아는 사이이거나 그렇게 친하지 않은 사람들은 E 라고 생각했다고 들었다. 암튼 다른 공간보다 유독 미용실에서 불편함을 느끼곤 했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양한 사람들
두어달 전부터 매장을 보는 시간이 늘었다. 매장에 앉아 있다보면 정말 사람들은 다양하구나 하고 새삼 깨닫는다. 외모도, 목소리도, 말투도, 성격도 모두 다 각자 독특하고 특별하다. 그런 다양한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재미있다고 여긴다. 불과 이삼주 전까지만 해도 다들 겨울 옷을 입고 들어오시던 분들이 요즘은 다양한 옷차림으로 들어오셔서 그런 것도 재밌다고 생각했다. 오늘 낮에는 반팔에 짧은 반바지를 입은 여성 분이 들어오셨는데, 한쪽 팔과 반대쪽 다리에 크게 문신이 있었다. 일부러 쳐다보면 실례가 될 것 같아 슬쩍 보고 말았는데, 요즘은 저렇게 문신을 드러내고 다니는 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하긴 문신을 새긴다는 건, 누군가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일부러 숨길 이유는 없는 거겠지.
판매하는 상품들에 대한 문의를 하거나, 리필 스테이션 이용 방법을 묻거나, 어떤 특정한 상품이 있는지 묻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질문을 하는 방식도 모두 다 다르다.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나타나는 반응도 모두 제각각이다. 어떤 분들과는 길게 대화를 이어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들은 대답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없이 상품을 들고 계산대로 가져오기도 한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고 매장 여기저기를 열심히 찍어가는 분들도 있다.
우리 매장에서는 현재 우리나라 재활용 시스템에서 제대로 재활용 되지 않고 있는 종이팩(우유팩과 멸균팩)과 플라스틱 병 뚜껑 등을 모아서 제대로 재생해 사용하는 업체로 갖다주고 있다. 그냥 모아오라고 하면 별 호응이 없을 것 같아서 자원을 모아오는 수량을 체크하여 리워드로 작은 선물(화장지 1롤)을 드리고 있다. 작년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이제 1년 반이 넘었는데, 이 화장지를 얻기 위해 자주 방문하시는 분들이 계시다. 대부분 어르신들인데, 일주일에 두 세번 정도 오시기도 한다. 일반 가정에서 모아서는 절대 그 정도 양을 모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시는 거냐고 물어보니 남들이 재활용품을 내놓은 걸 자신이 수거해서 가져온다고 했다. 재활용으로 내놓아도 전혀 재활용이 되지 못하는 현 시스템에서는 저렇게라도 모아주셔서 재활용이 되면 그것도 다행이긴 한데, 막상 딱 숫자에 맞춰 가져온 자원들을 꺼내놓고 화장지만 받아서 바로 가시는 그 분들을 보면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분들은 그 화장지를 받기 위해 또 얼마나 거리를 다니며 고생을 하실까 싶기는 한데, 한 편으로는 인정을 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비밀번호
나는 어려서부터 유독 숫자를 잘 외우지 못했다. 가족 생일은 물론이고 집 전화번호도 잘 외우지 못했고, 휴대전화를 처음 만들었을 때나 번호가 바뀌었을 때에는 내 전화번호도 못 외웠다. 당연히 가족들의 휴대전화번호나 친구들 번호도 못 외웠다. 연애할 때에는 연인의 번호를 외우지 못해 구박을 받기도 했다. 이럴 때는 다행이다 싶은 것이 헤어지니 후에 예전 연인의 번호를 폰에서 지우고 나면 그 번호를 다시 떠올리지 못해서 실수로라도 다시 연락하지 못하는 것. 암튼 정말 숫자를 못 외우는 내가 최근 가장 괴로운 일이 여기저기 현관 비번을 외워야 하는 일이다.
일단 우리집 건물 1층 현관 비번과 우리 집 비번은 당연히 외워야 한다. 잊으면 집에 갈 수가 없으니. 그리고 일터의 비번, 일터 건물의 공동현관 비번도 외워야 한다. 그리고 아이들 집의 비번, 아이들 집 건물 비번도 외워야 한다. 이것만 해도 벌써 6개다. 여기에 더해 노트북 비번, 이메일 계정 비번, 은행 계좌 비번 등을 따로 외워야 한다. 물론 이건 숫자만 있는 건 아니고 문자와 특수문자도 외워야 한다. 이메일은 개인 메일과 업무용 메일이 다르고, 각종 포털 사이트와 자주 가는 곳들(유튜브, 넷플릭스 등)의 비번도 외워야 하고, 일터 노트북도 내 것 뿐 아니라 공용 노트북 비번도 알아야 한다. 현대인들은 이 수많은 비번들을 다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갈까 나는 그것이 궁금하다. 나는 가끔 일터 건물 공용 현관 비번을 누르려다가 곧바로 떠올리지를 못하고 숫자 키의 배열을 한참을 쳐다보곤 한다. 숫자를 잘 못 외우는 내가 억지로 기억하는 방법은 숫자 자체를 외우기 보다는 키패드 상에서 그 숫자의 위치를 순서대로 기억하는 것이다.
이메일 계정의 비번이나 각종 사이트의 비번은 주로 좋아하는 영어 단어나 문장을 만들어서 기억한다. 예를 들어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이나 애칭을 넣거나 뭔가 의미가 있는 물건을 넣거나 한다. 예전에는 이렇게 비번을 만든 적도 있다. 고등학교 시절 내 별명이었던 '호랑나비'의 학명을 찾아서 그 긴 학명의 단어 하나를 가져다가 비번으로 쓴 적도 있었다.
여행
내일은 친한 사람들과 동해안으로 1박2일 여행을 가기로 했다. 2019년 오키나와를 다녀왔던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그때 같이 가지는 못햇지만, 평소 친하게 지내는 분들이 몇 번 더 포함되었다. 맨 처음 놀러가자고 의기투합한 건 4명이었는데, 중간에 계속 사람들이 들어와서 지금은 10명 정도가 되었다. 오키나와 여행 멤버가 7명 모두 성씨가 달랐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많은 성인 김, 이, 박이 모두 다 있는데도 그랬다. 그 사실이 좀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어서 앞으로 이 여행 멤버에 포함할 사람은 모두 성이 달라야 한다는 원칙을 만들었다. 앞으로 우리랑 같이 놀러가고 싶은 사람 중에 김, 이, 박은 일단 무조건 못 들어온다. 이번에 같이 가는 사람들도 모두 성이 다르다. 기존 멤버들 외에 새로 들어온 사람들이 모두 기존 멤버들과 겹치지 않고 달랐다는 의미다. 사실 나중에 정말 친하고 좋은 사람이 원한다면 성이 겹친다고 굳이 내치지는 않겠지만, 아직은 이 원칙이 지켜지고 있다는 사실이 재밌다.
오늘 저녁은 조금 바쁠 예정이다. 8시에 매장 문을 닫고 나면 걸어서 20분 거리에 안경을 찾으러 가야하고(눈이 좀 더 나빠져서 새로 맞췄다.), 집에 가서 저녁을 먹고, 세탁기를 돌려 빨래를 해놓고, 짐을 싸야 한다.
짧은 강의
담주 월요일에 동네 주민센터에서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1시간이란 짧은 시간 안에 이것저것 해달라는 요청이 많았다. 강의자료를 만들어야 하는데, 조금 만들다가 하기 싫어서 지금 이 글을 두드리고 있다. 강의자료를 만드는 일이 어려운 건 아닌데, 1시간짜리로 만드는 일은 어렵다. 무엇을 덜어내고 무엇을 남길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내게는 어렵다. 글도 짧은 글은 쓰기 어렵지만, 긴 글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강의도 서너시간짜리 강의는 준비할 것도 없지만, 1시간짜리 짧은 강의는 너무 어렵게 느껴진다.
4월에만 잡혀 있는 강의가 3개나 있는데, 이거 모두 1시간짜리 짧은 강의다. 아!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다. 얼른 강의자료 만들고 다른 일도 해야 하는데, 어느새 매장 문을 닫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손님이 자주 찾지 않는 매장에 혼자 앉아 있는 일은 좀 힘이 빠지는 일이다. 그렇다고 그 시간이 일이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가끔 들어와서 그냥 구경만 하고 가는 사람들도 있고, 위에 언급한 재활용품들을 갖고 와서 도장을 찍거나 화장지를 받아가는 분들도 있다. 매출은 안 오르는데 드나드는 사람은 계속 있으니, 다른 업무에 집중할 분위기는 또 아닌 것이다. 정말 그냥 매장 일만 해야하는 거라면 그건 그것대로 또 괜찮은데, 매장도 보면서 다른 일들도 엄청 많이 해야한다는 사실이 문제다.
오늘은 야근을 할 수도 없으니 이제 어서 강의자료를 만들어야겠다. 3월의 마지막 날이다. 안녕, 3월. 어서 와 4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