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터뷰
어느 연구소의 연구원이 재생에너지 현장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고 인터뷰 요청을 했다. 한참 바쁠 때여서 좀 미루자고 했는데, 그쪽도 보고서 마감일이 촉박하다고 해서 그제 만났다. 사전에 보내온 질문지는 의외로 간단하길래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고, 오래 걸리지도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런데 막상 자리에 앉자 그 연구원은 질문지에 없던 질문들을 포함에 아주 구체적인 질문들을 많이 했다. 난 언론사 기자나 대학원생들의 인터뷰에 응할 때면 말이 많아진다. 아니 강의할 때도 말이 많고, 발표할 때도 말이 많은 걸 보면, 그냥 원래 말이 많은 사람인가보다. 암튼 되도록이면 더 많은 정보를 주고 싶어서 받은 질문 내용에 덧붙여 추가 정보를 더 말하는 편인데, 이 사람은 그걸 듣고 이어서 또 질문을 연결해가다보니 점점 인터뷰가 길어졌다. 말을 한참 하다보니 어느새 목이 아프기 시작했다. 질문을 계속 던지던 연구원은 죄송하다고, 감사하다고 말하면서도 질문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 떠드느라 잘 몰랐는데, 인터뷰를 다 마치고 나니 어느새 2시간 반이 훌쩍 지나있었다. 어쩐지 목이 엄청 아프더라.
긴 인터뷰 때문에 약간 진이 빠진 기분이 들었다. 연구원과 헤어지고 그의 이메일로 보내주기로 약속한 자료들을 전송하고 나서 일을 시작하려다가 머리가 멍하고 힘이 없음을 깨달았다. 우선 따뜻한 차를 한 잔 마시며 SNS에 접속하여 머리를 좀 식혔다. 한참 후에 해당 연구원이 미안하다며 문자를 보냈다. 보고서를 위한 조사 차원이기도 하지만, 본인이 평소 관심이 많아서 궁금한 점이 많았다며, 너무 긴 시간을 뺐어서 미안해 했다. 시간은 어차피 내기로 했으니 괜찮은데, 말을 많이 하는 것이 그렇게 피곤한 일인 줄은 몰랐다. 이것도 다 나이 탓일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3시간이나 4시간짜리 강의를 해도 이렇게 피곤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암튼 피곤하다는 핑계로 그날 저녁에는 거의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매장 문 닫을 시간까지만 가벼운 일들만 처리하고 퇴근했다.
반가운 목소리
9시가 다 되어 매장을 정리하고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중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하고 전화를 받으니 갑자기 높은 톤으로 내 이름 두 글자를 크게 외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 이름만 부를 정도라면 무척 친한 사이일텐데, 왜 내 폰에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하면서 "네, 누구세요?" 라고 물었다. 그러자 여전히 높은 톤으로 자신의 이름을 크게 말했다. 이름을 듣고 나서야 어쩐지 조금 익숙한 목소리였어.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 17년 전쯤 시민단체에서 함께 일했던 활동가였다. 나보다 한 두살 정도 어려서 그는 나를 오빠 혹은 그냥 이름으로 불렀고, 우린 서로 말을 놓고 지냈었다. 당시 그와 동갑인 여성 활동가가 두세명 정도 더 있었는데, 그 중에 다른 친구들과는 그렇게 친하지 않았는데, 유독 그와는 친했었다. 그 단체를 그만두고 나서는 서로 연락이 끊겨서 긴 시간 연락이 없던 사이였는데, 갑자기 전화가 온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전화해놓고, 그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편하게 내게 말을 이어갔다. 뭐 언론 기사를 봤는데, 너무 반가웠다며, 머리도 길렀더라 막 이러면서 같이 기사를 찾아봤던 사람에게 나 이 사람 알아. 나 이 사람하고 친해. 이렇게 말했다고 전했다. 음,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어떤 기사를 봤을지 대충 짐작이 갔지만, 나는 모른 체하고 그냥 응. 응. 대꾸만 했다. 내 이름을 보고 너무 반가워서 보니까 전화기에 내 번호가 남아있었다고 했다. 나도 어지간하면 전화번호를 잘 지우지 않는 편인데, 왜 내 전화기에는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지 않았을까. 암튼 그는 반가운 마음에 그냥 바로 전화를 걸었다고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용건을 말했다. 어떤 프로젝트에 관해 소개하면서 관련해서 한번 미팅을 하자고 했다. 나는 지난 주에 그 내용을 메일로 받아봤기 때문에 듣자마자 바로 알아들었다. 그리고 다음 주 정도에 한번 찾아오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이름을 듣는 순간 같이 일했던 당시의 어떤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녀석과는 유독 힘들게 땀 흘리며 일했던 기억들이 많았다. 더운 여름날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다가 잠시 쉴 때 그가 차가운 음료수를 갖고 와 내 뒷목에 갖다대어 깜짝 놀랐던 기억. 좁은 공간에서 움직이다가 서로 몸을 부딪혔던 기억. 하루종일 힘들게 일하고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놀았던 기억 등등. 아, 이렇게 적어놓고 나니 같은 나이의 다른 후배들과 달리 유독 이 녀석과 친해졌던 이유가 있긴 있었네.
갑작스런 만남의 기억
몇 해 전이었나? 여기 서재에 글을 썼던 이야기인데, 예전에도 환경단체 동기(교육기수로 동기라 나이도 지역도 모두 다름)가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사무실로 찾아온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에도 아마 그 친구를 못 본지 한 15년 정도는 되었을 때였을 것이다. 그 즈음 나는 정말 일이 많고 바빴다. 그 전날 밤새 일하고 씻지도 못하고 꼬질꼬질한 상태였다. 아니 이틀 연속 밤샘에 집에도 못 들어갔던 것 같다. 게다가 피곤에 쩔어서 멍한 상태였다. 누군가 공동사무실로 들어선 후 입구 쪽 비어있는 자리들을 지나서 내게 다가올 때까지 나는 굽은 허리에 거북 목 상태로 모니터를 쳐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내 자리 근처까지 다가와서야 말을 걸었다. 인기척을 느낀 내가 문득 고개를 돌렸을 때 배시시 웃는 그가 있었다. 아마 첫 마디가 "오빠, 진짜 오랜만이지?" 였던 것 같다. 나는 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한발 다가서긴 했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감탄사 외엔 말도 나오지 않았고, 뭐라고 말을 해야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저 어색하기만 했다. 그런데 그는 팔을 벌리며 나를 안으려고 다가왔다. 순간 이틀이나 집에 못 들어가서 담배 냄새, 땀 냄새에 쩌들어 있을 내 옷과 몸 상태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십 수년만에 만나 반갑다는 그 포옹을 피할 수도 없는 일. 에라 모르겠다 하는 생각에 그냥 가볍게 포옹을 하고 빠르게 뒤로 물러나 그에게서 멀어졌다.
그 친구는 까무잡잡한 피부색 덕분에 언제나 눈에 잘 띄었고, 꽤 귀여운 얼굴과 작은 키 때문에 보고 있으면 나도 모르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만들었다. 또 목소리가 좀 독특했다. 반가운 마음은 엄청 컸지만, 마감에 쫓기는 일 때문이기도 하고, 어색한 상황 때문이기도 해서 나는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 친구는 내가 바쁜 상황임을 짐작하고, 잠시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테니 급한 일 마무리하고 자신에게 잠시 시간을 내어달라고 했다. 나는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공동사무실 바로 밖에 있는 홀에서 조금 기다리면 최대한 빨리 이것만 끝내고 나간다고 했다.
서로 만나지 못한 시간은 엄청 길었지만, 간혹 페이스북을 통해 소식은 접하고 있었다. 결혼 소식은 아마도 누군가에게 전해들었던 것 같고, 자주는 아니지만 아주 가끔 페이스북에 아이와 함께 있는 사진이 올라오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내 소식도 가끔 접했다고 했다. 내가 여기 이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다 미리 알고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사전에 아무런 연락도 없이 찾아온 것도 내 일과 관련해 제안할 것이 있어서였다고 했다. 그렇게 갑자기 찾아온 그 녀석과 프로젝트 하나를 함께 하면서 몇 번 만났고, 계획했던 행사를 무사히 마쳤고, 종종 연락하자고, 언제 친했던 동기들끼리 한번 보자고 약속을 했지만, 그 후로 다시 몇 년이 흐르도록 만나지는 못했다. 언젠가 또 불쑥 찾아와 오랜만이라고 반갑다고 말할지도 모르지만.
시험과 재미
큰 아이와 통화하면서 학교 이야기를 물었더니 모의고사를 쳤다고 했다. 수능과 같은 방식이었냐고 물었더니 똑같은 방식이라고 답이 왔다. 나는 재미있었겠네 하고 말을 했는데, 아이는 황당해하면서 어떻게 시험이 재미있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학창시절에 중간고사나 모의고사는 성적 압박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고 힘들었지만, 모의고사는 재미있었다. 그건 따로 시험 범위가 정해진 것도 아니라서 막 닥쳐서 공부할 필요도 없고, 그냥 평소 실력을 테스트하는 것이라, 내가 정말 수능을 치면 어느 정도 성적이 나올지 알아보는 것이니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아니 실제로 재미있었다. 어쨌든 시험이니 잘 보기는 해야했고, 나름 긴장도 하고 열심히 풀었는데, 그런 일들이 내게는 재미였다. 게다가 신기하게 모의고사는 성적이 잘 나오는 편이었다.
아이에게 이런 내용을 설명하면서 스스로 깨달았다. 나는 적당한 긴장감과 적당한 압박을 즐기는 사람이었구나. 떠올려보면 내가 가장 즐겁다고 느낄 때는 강의를 하거나, 발표를 하는 순간인데, 그때 많은 사람들 앞에 서서 모두가 나를 주목하고 있는 시선을 느끼면 적당히 긴장도 되고, 내가 준비한 내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속으로 잘 해야지 하는 마음도 든다. 그런 마음 상태가 나는 즐거운 것 같다. 내게 재미있는 일은 그렇게 적당한 긴장감과 실수를 저지를 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과 혹시 완전히 망쳐서 실패하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드는 순간의 어떤 일인 것 같다. 그리고 더 재미있고 즐거운 건 그렇게 중요한 일을 잘 해내고 성취감을 느끼는 순간이리라.
운동도 그렇다. 나는 고립운동을 잘 하지 않고 주로 전신운동을 하면서 새로운 동작과 어려운 동작들을 계속 시도하는데, 그 무게나 그 강도를 버티기 위한 온 몸의 긴장감을 즐기고, 혹시 실수로 다칠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두려움을 즐기며, 이걸 결국 해냈을 때의 느낄 짜릿한 성취감에 대한 기대감을 가장 즐기는 것 같다. 그래서 긴 시간 지루하게 운동하지 않는다. 준비운동을 통해 몸을 충분히 풀어준 다음에는 짧은 시간 고강도로 몸을 움직여 그 순간의 아드레날린을 확 늘리는 방식으로 운동하는데, 그런 운동이 내게는 재미있고 즐거운 일인 것 같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이 났는데, 노래방에서도 그런 재미를 가끔 느낀다. 결코 노래를 잘 하는 편은 아니지만, 노래 부르는 걸 워낙 좋아해서 그래도 좋아하는 노래들을 잘 부르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예전에는 고음을 부르지 못해서 스스로 자책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친한 후배에게 두성을 배운 이후로는 어느 정도의 고음에도 조금은 자신이 생겼고, 그래서 노래 부르는 일이 더 즐거웠다.
며칠 전에 여러 사람들과 함께 노래방을 가서 노래를 불렀다. 내 차례가 되어 마이크를 넘겨 받으면 항상 긴장된다. 그 방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모두 내 노래만 주목하고 있는 것도 아닌데도,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별로면 어쩌지, 혹시 음정 박자가 틀리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든다. 그리고 노래를 시작하면 늘 실망부터 먼저 든다. 하! 내 목소리는 왜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가! 나도 남들처렴 멋진 목소리로 노래하고 싶은데. 하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다 노래가 점점 크라이막스를 향해가고 음이 높아지고 두성을 쓰기 시작하면 조금씩 만족감이 들기 시작한다. 그래도 이 노래를 이 정도로 부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이 정도면 제법 괜찮은 거 아니겠어. 뭐 이런 마음이 드는 거다. 노래가 끝나고 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엄지 손가락을 세우거나, 좋았다고 한 마디씩 던지면 성취감과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오늘은 금요일. 야근을 하다 말고 글을 썼고, 이제 퇴근을 해야겠다. 누군가를 불러 맛난 것을 먹고 노래도 부르고 싶다 생각이 들었다가도, 집에 가서 샌드백을 두드리고 케틀벨과 바벨 그리고 불가리안백이랑 같이 놀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뒷정리를 시작하고 고민을 다시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