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보면 책으로 인해 생활이 바뀌는 경우가 많다. 문학, 인문학, 사회과학 책을 주로 읽는 나는 하나의 책을 읽을 때마다 조금씩 생각이 변하고 그로 인해 삶의 방식을 바꿔가고 있다. 이런 일이야 말로 책을 읽는 즐거움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 책을 읽다가 우연히 '우리텃밭 제철 꾸러미'(지금은 '언니네텃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에 직접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로컬푸드에 대한 부분을 읽다가 허남혁 선생이 추천한 방송프로그램을 찾아보게 되었고, 이 프로그램에서 소개한 내용을 보고 알게 되었다. 

매주 한차례 텃밭에서 나온 것들을 모아서 보내준다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게다가 어떻게 요리해서 먹으면 좋다라는 것까지 알려준다. 방송에서 '고향에 계신 엄마가 보내주는 것 같다!'라는 평을 했는데, 진짜 그런 기분이 들 것 같았다. 

곧바로 검색해서 우리텃밭의 카페와 홈페이지를 찾았다. 여기에서는 또다른 동영상을 볼 수 있었다. '제철 꾸러미'를 신청하기 전에 반드시 보라고 되어있었다. 방송에 나온 것 보다 좀 더 자세하게 소개해주고 있었다. 할머니들이 각자 텃밭에서 기른 다양한 채소와 각종 나물들을 갖고 와서 함께 수다를 떨면서 신문지로 싸고, 묶고, 포장하는 장면이 재밌었다. 특히 우리나라 토종닭의 계란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뽀얀 색깔의 계란은 어린 시절 보았던(사먹는 계란 중에는 한번도 본 적이 없었던) 바로 그 계란이었다. 

아내와 상의해서 곧바로 신청을 했다. 우리집에선 매주 생협에서 찬거리를 사먹기 때문에 일단 한 달에 두 번. 격주로 받는 꾸러미를 신청했다. 앞으로는 생협 주문을 줄이기로 하고, 어서 지역 배정이 되어서 꾸러미를 받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모든 지역에서 토종닭의 계란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동영상에 소개된 생산자 공동체는 순천이었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우리텃밭 프로그램은 되도록 가까운 지역에서 보내주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것 같았다. 서울은 거의 대부분 횡성공동체에서 받는 것 같았다. 아! 정말 저 뽀얀 토종 계란을 꼭 먹어보고 싶었는데! 아내도 아이에게 꼭 먹여보고 싶었다고 아쉬워했다! 

알고보니 한 친구가 '제철 꾸러미'를 한동안 받았다가 그만두었다고 했다. 그 친구는 거의 집에서 밥을 안 해먹는데, 처음에 지인의 권유로 가입했다가 자꾸만 남은 음식을 버리게 되어서 그만두었다고 했다. 친구도 횡성공동체에서 받았는데, 전라도 쪽에서 받는 사람들의 경우 좀 더 풍성하고 다양한 꾸러미를 받는다며 부러워했다. 

알라딘에서도 고고씽휘모리님  이 '제철 꾸러미'를 받고 계시던데, 나주에서 받고 있다고 하셨다. 내심 횡성이 아닌 나주에서 꾸러미를 받기를 기대하며 어서 지역배정이 되기를 기다렸다. 며칠전 문자로 지역배정을 받았다. 역시 횡성이었다. 뭐 조금은 아쉽지만 횡성 공동체 만의 장점도 많을거라고 생각하고 어서 꾸러미를 받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오늘은 드디어 그 꾸러미가 도착하기로 예고된 날이다. 과연 뭐가 들어있을까? 궁금하다. 어서 집에가서 꾸러미를 풀어보고 맛난 반찬을 해서 아이들에게 먹여주고 싶다. 며칠 전에 아내가 최근엔 왜 예전처럼 자주 맛난 음식을 해주지 않냐고 투덜대던데, 그런 아내의 불평도 쏙 들어가게 만들어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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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2-09 11: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 제철꾸러미는 우리 텃밭을 검색하면 찾을 수 있나요?
어쩐지.. 내용을 알 수 없는 선물상자 꾸러미 같아서 마음이 막 끌리는데요.
지금 찾아보러 갑니다~ 일산은 어디서 받을까요?

'언니네텃밭'이 맞는거죠? 열심히 헤매는 중이랍니다. ^^

감은빛 2011-02-10 16:19   좋아요 0 | URL
앗! 제가 너무 불친절하게 소개를 했군요! 죄송!
잘 찾으셨나 모르겠네요.
저는 어제 처음으로 꾸러미 받았습니다.
알차게 보내주셨더라구요! ^^

2011-02-09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10 16: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따라쟁이 2011-02-09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럼 감은빛님은, 아이도 봐주고, 재워도 주고, 게다가 음식까지 해주시는 그런 남편이란 말씀이신거죠?

제철 꾸러미 보고 나셔서 맛난 음식 드시면, 그것도 후기 이야기를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감은빛 2011-02-10 18:24   좋아요 0 | URL
지난 번 댓글에 답으로 그뿐만 아니라 목욕도 시켜주고 반찬도 만들어주고 밥도 차려주고 등등 이런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
어제 받긴 했는데, 너무 늦게와서 뭔가 해먹지는 못했습니다.

후기는 글쎄요. 요즘 시간여유가 없어서.... ^^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2-09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횡성이면 저희 집이랑 가까운데...저도 알아봐야겠네요.
알면 알수록 감은빛님 참 대단한 아빠이자 남편이세요!
많이 배웁니다^^

감은빛 2011-02-10 18:25   좋아요 0 | URL
아, 강원도에 계신가봐요.
좋은 곳에 사시네요!
아유.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고맙습니다!

쉽싸리 2011-02-10 1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채소꾸러미 하는 데가 몇 군데 있을겁니다. 주로 전여농(전국여성농민회연합)에서 하는것 같더라구요. 일본에서 예전에 했던 방식인데 지금은 잘 안된다고 하는것 같어라구요. 아무래도 소비자가 많이 참여를 해야 유지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저도 닭 몇 마리 키우는데(아마도 토종닭?)알이 다르더라구요. 크기도 작고, 색도 흰것에 가깝고, 토종닭들은 성질이 너무 예민하고, 단도리 못해서 우리에서 나오면 거의 날아다닙니다. 지붕위로 올라가더니 앞집까지 근 20~30미터를 논스톱으로 날아가더군요.ㅎㅎ

감은빛 2011-02-10 18:27   좋아요 0 | URL
네, 제가 소개한 이 '언니네텃밭'이 바로 전국여성농민회에서 하는 사업입니다.
예전에 일본에서 했던 방식이군요. 몰랐던 사실입니다.

닭을 키우시다니! 그것도 토종닭을!
흐흐 한번 보고 싶은데요! ^^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역시 아이들 어릴 때는 데리고 다니기가 넘 힘들어. 특히 겨울엔 추워서 맘놓고 돌아다니지도 못하고, 움직일때마다 애들 챙기느라 시간이 두세배가 더 걸리고. 여행이라는 말에 욕심 부리지 말고, 차라리 푹 쉬다 오는 거에 더 무게를 뒀으면 좋았을 것을. 제대로 본 것도 없이 피곤하기만하고, 맘껏 놀거나 쉬지도 못하고 돌아와버렸네. 

2박3일. 짧은 겨울 여행. 그닥 기대를 갖고 간 것은 아니지만, 내 생각과는 너무 다른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다. 뭐 인생이 늘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지만, 이런 상황이 좀 맘에 안든다. 하필 일이 많은 때에 하루를 쉰 덕분에, 밀린 일을 붙들고 앉아 있다. 

머리에 들어오지도 않는 숫자 붙들고 끙끙대는 동안, 자꾸만 겨울 바다가 생각난다. 칼바람이 뺨을 베고 지나친다. 머리칼이 흩날린다. 천둥처럼 귀를 때리는 파도소리가 멋진 음악처럼 느껴진다. 밝은 달이 뜬 겨울 밤바다라면 더 좋겠다. 파도에 일렁이는 달 그림자를 넋놓고 밤새 쳐다보며 서 있고 싶다. 

전화벨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수화기를 집어든다. 애써 친절한 척 목소리를 가다듬어 전화를 받는다. 이건 나인가? 좀 전에 바닷가에서 파도소리를 듣고 있던 나 어떻게 된 건가? 전화를 끊고 다시 바다로 돌아가보고 싶지만, 이미 내 머리는 손에게 전화 통화한 내용을 처리하도록 명령을 내려버렸다. 손은 바삐 움직여서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클릭하고, 볼펜을 쥐고 글씨를 쓰고 있다.

겨울 바다가 보고 싶다. 몰아치는 차가운 바람과 쉼없이 때리는 파도와 휘어청 밝은 달을 벗삼아 밤을 지새우고 싶다.  

 

그리운 바다


내가 돈보다 좋아하는 것은
바다
꽃도 바다고 열매도 바다다
나비도 바다고 꿀벌도 바다다
가까운 고향도 바다고
먼 원수도 바다다
내가 그리워 못 견디는 그리움이
모두 바다 되었다


끝판에는 나도 바다 되려고
마지막까지 바다에 남아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바다가 삼킨 바다
나도 세월이 다 가면
바다가 삼킨 바다로
태어날 거다   
이생진 / 그리운 바다 성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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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1-01-2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바닷가가 집이예요.
고등학교 시절 새벽에 등교를 하면 바로 코앞도 안보이게 해무가 껴요.
조용한 새벽에 그렇게 걷는게 참 좋았어요. 조금은 외롭지만.

감은빛 2011-01-27 13:15   좋아요 0 | URL
저도 꽤 오랫동안 바다 근처에 살았습니다.
바로 해변근처는 아니었지만,
늘 바다와 함께 했죠.

새벽에 해무를 뚫고 걷는 길.
생각만해도 좋을 것 같아요.
그런 추억을 가진 모리님이 무척 부러워요! ^^

섬사이 2011-01-26 10: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데리고 다닐 땐, 특히 겨울엔,
입힐 옷 벗길 옷만 해도 한 짐이죠.
한겨울 야근이라,,
귓가에 겨울바다의 파도소리가 들려올 법도 하죠.
너무 추워요.
기운내세요.

감은빛 2011-01-27 13:17   좋아요 0 | URL
네, 아이들 특히 둘째아가의 짐이 엄청났죠.
저나 아내는 여벌옷도 거의 못 챙겼어요.

응원말씀 고맙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1-26 1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없어도, 겨울바다는 추워요... 아하하.
이젠 젊지 않다니까요(!!!), 뼛속에 바람들어요, 감은빛님.
(감은빛님두 저랑 통째로 중년으로 넣어버렸다눈... 크크)

그래도 이 페이퍼를 보니, 은은한 달빛 아래 파도 소리.. 그립네요.

감은빛 2011-01-27 13:19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중년 아니예요!!
(아직 이십대라고 믿고 싶은 사람입니다! ^^)

파도소리 참 그립죠.
잠 못 드는 밤 문득 귓가에 파도소리가 들리면 미칠 것 같아요. ^^

cyrus 2011-01-26 15: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미혼인데 첫 문장부터 남일 같지 않네요,, ^^;;
아무도 모르게 혼자서 어디 떠나고 싶은데 날씨가 따라주지 않네요.
여유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은데 말이죠, 시간이 된다면
겨울바다에 가야겠어요 ^^

감은빛 2011-01-27 13:21   좋아요 0 | URL
아무도 모르게 혼자 떠나고 싶다면,
겨울이 제일 좋은 것 같아요.
왠지 저는 겨울하면 혼자 떠나는 여행이 생각나요.
어딘가에 쳐박혀서 책과 음악과 고독을 즐기다 오는 여행.
겨울바다에서 혼자 한나절만 보내다 오고 싶네요.

따라쟁이 2011-01-27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저도 가고 싶어요. 겨울바다.
머리아픈거 좀 접고 다녀오고 싶어요.

감은빛 2011-01-27 13:23   좋아요 0 | URL
머리아픈 일상에서 좀 벗어나고 싶어요.
겨울바다가 딱 탈출구가 되어줄 수 있을텐데.
다 팽개치고 확 떠나고 싶어지는 요즘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1-28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말 하려니까 아이러니 컬 하기도 하지만요~
힘들어도 아이들 데리고 다닐 때가 좋은 거예요.
조금 머리가 크면 말이죠, 부모 안 따라다닐려고 해서여.
저절로 혼자 원없이 여행하실 수 있는 날이 온답니다.

전 바다도, 산도 필요없고...뜨뜻한 아랫목에 배 깔고 누워 2박3일이요~^^

감은빛 2011-02-07 10:54   좋아요 0 | URL
답이 많이 늦었죠! 죄송합니다.
1월말에 정신없이 바빴습니다.
연휴전날까지 일터 일 하느라 정신없고,
연휴 돌입하자마자 먼 길 떠나서, 애들 돌보랴, 집안 일하랴,
피곤하고 정신없는 날들이었습니다.

남겨주신 말씀 공감합니다.
애들 보면서 빨리 자라서 같이 이것저것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또 막상 너무 빨리 크는 것 같아서 막 아깝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뜨뜻한 아랫목에 배깔고 2박3일 저도 해보고 싶어요! ^^

비로그인 2011-01-29 16: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겨울 바다.

2년 전인가 다녀왔는데 바다도 그렇지만 그걸 보고 있는 내가 너무 외롭게 느껴지더라고요. 이상하게 훨씬 오래 전에 다녀왔을땐 안 그랬는데 말이죠.

그래도 봄이 익는 계절의 바다는 참 멋있을 것 같습니다. 거기 보이는 달 아래에서 혼자 술 한잔에 달 띄워 놓고 놀아도 좋을 것 같고요 ^^

감은빛 2011-02-07 10:57   좋아요 0 | URL
저는 늘 바다 가까이에서 살았어요.
사회생활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부터,
바다가 없는 곳에서 살다보니, 답답하더라구요.
겨울 바다를 참 좋아했습니다.
혼자 몇 시간씩 걷다오기도하고, 멍하니 바라보고 서있다 돌아오기도 하구요.

이젠 그렇게 혼자 바다를 다녀올 기회가 거의 없을 것 같네요.

2011-02-01 04: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감은빛 2011-02-07 10:58   좋아요 0 | URL
아, 저 위에 먼저 댓글에 짧게 적었습니다.
한마디로 정신없이 보냈습니다! ^^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은데, 하루는 또 왜 이렇게 길고 힘든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아이와 전쟁을 치르듯 준비를 시켜 집을 나서고, 달동네답게 해가 잘 비치지 않는 골목길은 늘 얼어있어서 조심조심 아이손을 꼭 잡고 걷는다. 어린이집 앞에서 뽀뽀와 포옹을 하고 들여보내고나서 시계를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뛰지 않으면 지각! 뛴다. 한겨울 칼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리고, 귀를 때린다. 

일터에선 맡고 있는 일의 종류가 많아서, 늘 정신이 없다. 이걸 조금 하다가, 또 저걸 조금 하다가, 다시 또 다른 일을 손을 댔다가, 우왕좌왕 이랬다가 저랬다가. 정신없는 하루가 또 굴러간다. 

퇴근시간을 딱 맞추지 않으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보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기에, 가급적이면 칼퇴근을 해야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더구나 요즘은 아내가 급하게 끝내야 하는 일 때문에 자주 밤 늦게까지 일을 해서, 아이 둘을 다 맡아야 한다. 둘째를 안고, 첫째를 걸려서 집으로 데려온다. 간단한 반찬거리를 준비해서 첫째녀석 저녁을 먹이고, 둘째 이유식을 먹이면서, 틈틈히 내 입에도 밥과 반찬을 집어넣는다. 

잠시 아이들과 놀다보면 아가가 기저귀에 응가를 한다. 녀석은 꼭 저녁때 응가를 해서, 딱 목욕할 시간을 정해준다. 신기하다. 오늘따라 양이 많아서 응가가 다 새버렸다. 응가가 잔뜩 묻은 옷을 조심조심 벗기고, 따뜻한 물을 받아서 목욕을 시킨다. 춥지 않도록 신경써서 닦아주고, 아기용 로션과 크림을 바르고, 응가 후에 속이 비어서 보채는 녀석에게 분유를 타서 먹인다. 아기를 겨우 재워놓고, 이번에는 첫째아이를 목욕시킨다. 요녀석은 요즘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반항이 심하다. 어떨 때는 달래고, 어떨때는 장난으로 넘기고, 어떨때는 혼내고, 어떨때는 화가나서 소리도 지르면서 목욕을 마친다. 로션과 크림을 바르고 머리칼을 말려주면 나는 씻기도 귀찮을만큼 녹초가 된다. 

이쯤 되면 둘째아가가 깬다. 달래고 어르고 다시 재우려하는데, 잘 안잔다. 엄마의 부재를 느껴서 그런건지 곧잘 울고, 한번 울면 쉽게 안그친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기를 다시 재워야 한다. 아기를 간신히 재우면 첫째녀석도 재운다. 

둘을 다 재우고나면 11시쯤 된다. 대개 11시 반쯤 아내가 돌아오니, 한 삼십분만 자유시간을 갖는다. 책을 읽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아내가 돌아오면 잠시 서로 얘기를 나누고 설겆이를 시작한다. 젖병도 씻어서 삶는다. 그사이에 아기의 응가가 묻은 옷을 아내가 빨았다.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나면 1시 반. 

컴퓨터를 켠다. 내일까지 원고를 넘겨야 하는데, 아직 단 한 줄 밖에 쓰지 못했다. 빈 화면에 커서만 깜박인다. 안써진다. 아직 충분히 생각이 정리되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머리를 쓰지도 않았으면서, 머리를 식히러 알라딘에 접속한다. 서재 이웃들을 방문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어느새 새벽 3시가 넘었다. 에라 모르겠다. 원고는 내일 어떻게든 넘기고, 지금은 자야겠다. 근데, 막상 자려고 맘먹고 나니 뭔가 허전하네. 원고는 못 썼지만 서재에 뭔가 끄적이고 자고 싶다. 

달마다 뭔가 부족한, 맘에 안드는 원고를 넘기면서, 다음 달에는 꼭 일찍 원고마감을 해서 두세번씩 꼼꼼하게 살펴보고 넘겨야지 생각하지만, 한번도 여유있게 넘겨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감이 닥쳐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마감날까지도 글을 단 한 줄밖에 못 썼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다. 시험공부는 늘 벼락치기로, 다음날 칠 과목 전부를 밤새 붙들고 앉아있었다. 나는 이런 내 삶의 태도를 '배수의 진'이라고 불렀다. 양초가 다 타서 뜨거운 촛농에 손을 데이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진심으로 일을 시작하는 내게 결과는 늘 맘에 안들고, 부족하기만하다. 그래놓고 늘 큰소리는 뻥뻥 친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지금은 좀 부족해도 이건 결코 내 100%가 아냐. 이런 말들로 위로해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 것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도저히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하겠고, 내일 마감을 해치우려면 이제는 슬슬 눈을 좀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럼 쓸데없는 수다는 이만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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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1-1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바쁜 삶. 진심으로 존경스럽네요.
두 아이를 엄마의 손길 없이 돌볼 수 있는 분이라니!!

<배수의 진> - 이거 맘에 드는 말이네요. 저도 그래요.
근데 미리미리 해 놓는 사람들이 아마도 훨씬 소수가 아닐까요?
미리 해 놨는데도 별로 결과가 안좋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니까(ㅋㅋ)
진 쳐 놓는것도 정신건강에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요? (이것도 자기 변명이겠죠? 아하하)

감은빛 2011-01-15 02:04   좋아요 0 | URL
아뇨, 존경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제 입장에서 노력할 뿐입니다.

미리 해놓는 사람들이 훨씬 소수일까요?
그래도 저처럼 대책없는 인간은 아직 못 본 것 같아서요.
언제까지나 배수의 진에 기대 살수는 없을 것 같은데,
쉽게 벗어나지지 않네요.

고맙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1-1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ㅠㅠ.
저도 회사 다닐 때 육아로 이랬던 기억이 있어서 더욱 공감하게 되네요.
너무 지치시겠어요, 감은빛님과 옆지기님 두 분 모두.

더 잘할 수 있어 라고 다그치지 마시고, 나의 한계는 이정도야 라고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힘들잖아요. 건강 꼭 챙기시구요.

감은빛 2011-01-15 02:06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랫만에 둘째 키우려니 너무 힘들어요.
첫째를 어떻게 키웠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첫째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월했던 것 같은데,
요녀석은 정말 힘드네요. 그새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가? ^^

cyrus 2011-01-1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이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글을 쓰시면서 두 자녀들을 돌보고
원고 작업까지 하시다니,, 존경스럽습니다. ^^

감은빛 2011-01-15 02:09   좋아요 0 | URL
아유! 왜들 이러시나요? 존경이란 단어를 그렇게 쉽게 쓰시면 안됩니다.
저는 그런 말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입니다.

아이들 돌보는 건 제가 워낙 애들을 좋아해서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요.
집안일은 되도록 나눠하려고 노력하는데, 서로 힘든 일이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대개 아내가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그럼 저는 또 미안하니까 기회가 된다면 더 잘 해주고 싶고 그런거죠. 뭐!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1-1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시군요.
갑자기, 우리아빠가 어느날 엄마 안계시던 날, 내 손잡고 눈깜빡이 인형 사주셨던 거 기억난다.. 몇 살 때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릴 땐데.. 희미하게 기억이 났어요.
엄마를 돕고, 엄마를 대신한 아빠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에 남아있네요.^^;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감은빛 2011-01-15 02:13   좋아요 0 | URL
첫째가 백일이 채 안되었을 무렵, 제가 육아휴직을 받아서 아기를 키웠어요.
아내는 나가서 일을 했구요.
그땐 제가 시민단체에 일할 때여서, 활동비를 별로 못 받았거든요.
아내의 벌이가 훨씬 더 좋았기 때문에 제가 아기를 돌보고 집안일을 했어요.
그래서 첫째는 저랑 비교적 잘 놀고 잘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둘째는 제가 같이 보낸 시간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무조건 엄마만 찾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1-1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신 시간이 새벽을 훌쩍 넘어 한참이나 늦은 때였네요.
왠지 고단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원고는 잘 마치셨죠..? ^^
날은 추운데 오늘 신문을 보는데 1면도 사진도 그렇고, 실려 있는 만화도 그렇고.. 마음이 좀 편치는 않네요. 감은빛님 주말은 따뜻함이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감은빛 2011-01-18 17:08   좋아요 0 | URL
평일에 늦게 자다보니, 잠이 좀 모자라요.
주말에는 늦잠 좀 자고 싶은데, 애들이 깨워서 더 못자구요. ㅠ.ㅠ

요즘 뉴스, 신문 보기가 겁납니다.
며칠씩 안보고 살기도 합니다.
아침에 신문 집어들어서 펼치지도 않고 그냥 쌓아만 둡니다.
언젠가는 편안한 마음으로 신문, 뉴스 보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순오기 2011-01-1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니 젊은 부부들이 어떻게 아이를 낳아 키우겠어요?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부부가 해결하기엔 너무 힘든 육아.ㅜㅜ
님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려고 애쓰는 게 보여요.^^

감은빛 2011-01-18 17:11   좋아요 0 | URL
굳이 좋은 아빠, 남편이 되려고 애쓴다기 보다는,
사회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운동하는 선배들 중에는 말만 바르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분들도 종종 보게 되거든요.
그럴 때마다 욕해놓고,
저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깨닫게 되는게 싫더라구요.
말로만 양성평등을 외치고,
집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안한다면 말이 안되겠죠!

양철나무꾼 2011-01-17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이를 임신하고 거의 막달까지 왕복 4시간 씩 운전하며 공부하러 다녔었어요.
그때 했던 생각이 누가 나 대신 아이를 좀 품고 있어줬음 좋겠다 싶였어요.
그래서 둘째는 생각도 못했었구요.
이 페이퍼를 읽으니, 감은빛님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대신 품어주기도 하셨을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런걸요.


감은빛 2011-01-18 17:13   좋아요 0 | URL
헉! 막달까지 왕복 4시간씩 운전하다니요!
엄청 힘드셨겠어요.
저는 양철나무꾸님의 그 의지와 끈기가 부럽습니다! ^^

따라쟁이 2011-01-2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아이를 재워주는 아빠라니, 멋져요

감은빛 2011-01-27 13:12   좋아요 0 | URL
재우는 것 뿐 아니라, 밥도 주고, 목욕시켜 주고, 빨래도 하고 다 해주는 걸요!
당연한 일인 걸요. ^^
 

지금까지 읽은 책들 중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붙들고 좋은 책이니 꼭 읽어보시라 권하고 싶은 책이 여럿 있다. 그중에는 내가 서평을 잘 써서 많은 사람들에게 소개해야지 라고 생각했던 책들도 있다. 이번에 글을 쓴 <잊을 수 없는 혁명가들에 대한 기억>이 그런 책들 중에 하나다. 거의 2년쯤 이 책의 서평을 쓰려고 했으나, 그때마다 맘에 들지 않아서 그냥 지워버리곤 했다. 이번에 글을 쓰고나니 오랜 숙제를 해결한 듯 후련하다. 그런데 아직 그렇게 잘 소개해보고 싶은 책이 여럿 남아 있다. 이 책들은 어떻게 써야할까. 고민이다.

  

 김단야 선생과 이정 박헌영 선생은 존경하는 선배운동가(혁명가)이자, 개인적으로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들이다. 이분들에 대한 책이 나올거라는 얘길 듣고, 몇 년을 기다렸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바로 소개글을 쓰고 싶었으나, 좋은 책을 잘 소개하고 싶다는 욕심에 자꾸만 미루다보니 어느새 2년이 넘게 지나버렸다.

 

 

 

 

 역시 잘 소개해서 널리 알리고 싶은 책. 저자처럼 재미있게 잘 쓸 자신이 없어서 계속 소개글을 쓰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써야할까? 계속 고민중이다.  

 

 

 

  

  

 정말 도시락싸들고 다니면서 읽으라고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소개글도 썼고, 단행본 <100인의 책마을>에도 소개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 소개한 듯 하다. 

아직 읽지 않은 분이 계시다면 꼭 읽으시라고 권하고 싶다. 

 아참, 이번에 나온 <에콜로지와 평화의 교차점>은 아직 읽는 중이다. 작년 년말에 읽기 시작했는데, 여러 책을 동시에 읽는 습관때문에 이 책은 아직 진행중이다. 곧 소개글을 써야겠다.

 

 

  

 이 책 처음 읽었을 때는 김두식 선생님이 지금처럼 유명하지 않아서, 널리 알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미처 글을 쓰지 못하고 시간이 지나는 동안 김두식 선생님이 많이 유명해져서, 이제는 더이상 내가 소개글을 쓰지 않아도 많이 읽히고 있는 듯 하다. 

그럼 굳이 애써 소개글을 쓰지 않아도 될까? 언젠가 한번 써보고 싶다는 욕심만 가져본다. 

 

 

 

  

 이시백 선생님의 입담은 정말 최고다! 성석제 작가와 비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내 기준에서 이시백 선생님이 좀 더 낫다고 생각한다.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 막상 이 책을 소개하려고 생각하면 마땅한 글이 떠오르지 않는다. 

 일단은 숙제로 남겨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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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enow 2011-01-13 14: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서점갈때 꼭 확인!"리스트가 자꾸만 늘어나는군요. ㅠ.ㅠ
감은빛님, 이 글 보면 은근 '혁명'쪽이세요. ㅋㅋ

(그런데, 양철나무꾼님 서재랑 스킨이 같아서 가끔 헷갈린답니다.
좀 전에도 양철나무꾼님이라 부를 뻔 했어요. ^.^;;;)

감은빛 2011-01-14 01:45   좋아요 0 | URL
네, 양철나무꾼님과 스킨이 똑같습니다.
저도 처음에 깜짝 놀랐고,
가끔 양철나무꾼님 서재에 들어가있을 때, 제 서재로 헷갈리기도 합니다.
2004년 처음 서재만들었을 때부터 사용했던 스킨입니다.
한번도 바꾼적이 없어요.
양철나무꾼님과 저는 여러모로 비슷한 취향인 것 같습니다.

은근 '혁명'쪽이라기 보다는 대놓고 '혁명주의자'입니다.
자타공인 빨갱이라서요. ^^

양철나무꾼 2011-01-13 17: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하...서재 스킨을 바꿔야 하는 걸까요.
책들도...이시백 한권 빼고 겹치네요.
근데,근데 말이죠.
성석제와 비교할 수 있는 사람은 이기호 님 정도라고 생각했었는데...이시백도 그렇다구요?^^

감은빛 2011-01-14 01:48   좋아요 0 | URL
이것도 인연인데 굳이 바꿀 필요는 없지 않을까요?
누가 일부러 따라한 것도 아니고,
둘 다 자기 취향에 따라 선택한 거잖아요.
참 많이 겹치네요.
어쩜 이렇게 취향이 비슷할까요? 신기해요!

저는 아직 이기호 작가 글은 접해보지 못했습니다만,
이시백 선생님 글은 잘 알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는 이시백 선생님 입담을 따라올 국내 작가가 거의 없습니다.

cyrus 2011-01-13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고 있었는데, 나무꾼님 스킨이랑 비슷하네요.
저 방금 나무꾼님 서재 댓글 남기고 왔거든요ㅎㅎ
<경제성장이 안되면,,>은 꼭 읽어봐야 할 책일거 같아요.
좋은 책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 ^^

감은빛 2011-01-14 01:50   좋아요 0 | URL
스킨이 똑같아요.
첨에 그 사실을 깨닫고 참 재밌다고 생각했어요.

네! 그 책은 꼭 봐야할 책 맞구요.
조 위에 있는 책들은 한번쯤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제가 서너번 이상씩 읽은 책들입니다.

다이조부 2011-01-20 1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알라딘 하면서 이 스킨을 가장 오랫동안 썼어요

이 스킨이 질리지 않더라구요 ㅎㅎㅎ

소개한 책 중에서 읽은건 김두식 헌법의 풍경 밖에 없네요..

녹색평론사 출판사를 신뢰해서 경제성장..... 이 책이 우선 땡기네요 ^^ ㅋ

감은빛 2011-01-21 13:11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다이조부님.
필명이 인상적이군요. ^^
다이조부님도 이 스킨 쓰셨군요.
처음 만들 때 이후로 스킨은 손도 안댔는데,
그때 제일 맘에 든 게 이거였거든요.

녹색평론사 책은 다 의미있고, 좋죠.
방문과 댓글 고맙습니다!
 

취한 시간 

기억을 더듬어 보면 12월 31일 밤과 1월 1일 새벽은 늘 취해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이래로 단 한번도 취하지 않고 새해를 맞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르겠다. 그런 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새해 첫 날은 늘 취해있었기에 끊어진 필름처럼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 한 해의 시작은 늘 그랬다. 취해서 맞은 새해 첫날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억이 희미해져서 내 삶의 일부가 마치 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싫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린 기억속을 더듬어 뭔가를 찾고 싶은데, 내가 찾고 싶은 게 무언지 조차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하루 하루에 숫자를 부여하고 그것을 기록해두는 것도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해가 바뀌는 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2010 이라는 숫자를 부여한 시간과 2011 이라는 숫자를 부여한 시간이 뭐가 다른가? 해는 떠올랐다가 지고, 바람은 불고, 구름은 떠다니고, 나무는 천천히 자라고, 나비는 날아다니고, 사슴은 물을 마신다. 보신각 종이 울리든 말든 자연의 시간은 변함없이 그렇게 흘러간다. 새해가 되었다고 뭐 특별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냥 시간이 흐를 뿐이다. 하루 하루 잠을 자고 나면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 뿐이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특별한 의미 따위는 없다. 

쓸데없는 끄적임 

혼자 텅빈 자취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게 언제였던가. 몇 해전이었던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날은 새해 첫 날이었다. 밤늦게까지 누군가와 술을 마셨고, 어김없이 취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혼자 자취방에서 자고 있었다.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있었고, 목이 꽉 잠겨있었고,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팠고, 속이 쓰렸다. 이불을 덮어쓰고 다시 잠들려했지만, 정신은 점점 더 또렸해졌다. 누군가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열심히 그녀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누워서 그녀만 생각했다. 생각의 끝자락에 자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을 집어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엎드려서 책을 펼쳤다가 다시 치웠다. 공책을 펼치고 연필로 의미없는 단어들을 끄적였다. 습작공책을 펼쳐들고 며칠 전에 쓴 단편을 다시 읽으며 어색한 부분을 고쳤다. 습작공책을 던져버리고 누워서 천정만 쳐다보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몸을 일으켜 좁은 방을 뒤졌지만 담배를 찾지 못했다. 재떨이를 끌어와서 장초를 뒤졌다.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놈을 하나 골라들고 이번에는 라이터를 찾았다. 잠바 주머니늘 뒤지고,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책들 사이에서 조그만 성냥갑을 찾아내었다. 성냥을 그었다. 확 불꽃이 일었다. 장초를 물고 불을 붙였다. 강한 자극이 꽉 잠겨버린 목을 덮쳤다. 콜록 콜록 두어번 기침을 했다. 길게 담배를 빨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뱉았다. 담배 연기가 앞으로 쭉 내뻗었다가 잠시 후 흩어졌다.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옷을 걸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불을 어깨에 덮어쓰고 점점 짧아지는 담배를 끝까지 피웠다. 또다른 장초를 찾으려다가 말고 물을 찾아 냉장고를 열었다. 물이 없었다. 수돗물을 틀어서 마셨다. 차가운 물이 속을 자극시켜서 다시 쓰렸다. 이불을 덮어쓰고 엎드려서 다시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오랫동안 의미없는 무언가를 끄적였다. 

2011 이라는 숫자 

나는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걸까? 나는 무었을 끄적였던 걸까? 그 공책이 지금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떠올리려 애써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종일 생각했던 그녀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공책은 없어졌고, 내 기억도 지워졌다. 그렇게 열렬하게 좋아했던 사람을 깨끗이 잊었다. 언젠가 지금을 기억하는 어느 날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애타게 바라고, 무엇에 격하게 분노하고, 무엇때문에 죽을것처럼 아파하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컴퓨터를 켜고,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오고,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작 하나하나는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무엇에 마음을 쏟고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2011 이라는 숫자가 낯설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자꾸만 2010이라고 썼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고쳐쓰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 계획에 대해서 얘기한다. 올해는 무엇을 해보고 싶고, 무엇을 바꾸고 싶고, 어딘가를 가보고 싶고, 책을 얼마나 읽고 싶고, 돈을 얼마나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새해 계획이라는 걸 해본적이 별로 없다. 계획을 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것을 잘 안다. 그저 숫자가 바뀐 것일 뿐 나에게는 같은 시간이다. 그냥 나는 미치도록 사랑이 하고 싶다! 내 바람은 늘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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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1-04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여, 요즘 추억을 더듬다 보면, 옛남자들 이름이 죄다 기억나지 않아요. 흑.
그래서 이제는 혹시 추적을 해보고 싶어도 어림두 없어염. 단서가 있어야 하죠~ 헤헤.

오호라... 미치도록 사랑을 하고 싶으시다뉘.
아무래도 날 한번 잡고, 유부남의 도리에 대해 가르쳐드려야겠슴다. 아하하.

감은빛 2011-01-05 07:29   좋아요 0 | URL
아, 마녀고양이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면 영광이겠습니다!
빨리 날 잡으세요!
근데 정말 유부남의 도리는 뭔가요? ^^

아이리시스 2011-01-07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남의 도리라는데요?,ㅎㅎㅎㅎㅎㅎㅎㅎㅎ
뭐지, 뭐지?ㅋㅋㅋㅋㅋㅋㅋㅋ

감은빛 2011-01-05 07:29   좋아요 0 | URL
저도 궁금하네요. 빨리 가르침을 받아야 될텐데요. ^^

양철나무꾼 2011-01-05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부녀의 도리는요,
집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저 사람은 내 남편이 아니다.' 생각하고 홀가분하게 놓아주는 거라는데...

저는, 그냥 미치도록 사랑이 하고 싶다 말고요,
그저 무덤덤,무던히요~^^

감은빛 2011-01-05 07:31   좋아요 0 | URL
아, 유부녀의 도리는 그런거로군요.
그렇담 유부남의 도리도 그런건가요?
'저 사람은 내 아내가 아니다' 이건가요?

어떤 사람에게 무덤덤이, 어떤 사람에게는 미치도록이 될 수도 있죠.

실비 2011-01-05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이 많이 가네요..
전에 그런생각 많이 했지요
어떨땐 숫자는 숫자이고 어느땐 의미부여가 되고..

저도 미치도록 사랑 한번 하고 싶네요

감은빛 2011-01-07 02: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실비님.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미치도록 사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