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보면 시간이 참 빠른 것 같은데, 하루는 또 왜 이렇게 길고 힘든지 모르겠다. 아침부터 아이와 전쟁을 치르듯 준비를 시켜 집을 나서고, 달동네답게 해가 잘 비치지 않는 골목길은 늘 얼어있어서 조심조심 아이손을 꼭 잡고 걷는다. 어린이집 앞에서 뽀뽀와 포옹을 하고 들여보내고나서 시계를 보면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있다. 뛰지 않으면 지각! 뛴다. 한겨울 칼바람이 머리칼을 휘날리고, 귀를 때린다. 

일터에선 맡고 있는 일의 종류가 많아서, 늘 정신이 없다. 이걸 조금 하다가, 또 저걸 조금 하다가, 다시 또 다른 일을 손을 댔다가, 우왕좌왕 이랬다가 저랬다가. 정신없는 하루가 또 굴러간다. 

퇴근시간을 딱 맞추지 않으면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친구들보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하기에, 가급적이면 칼퇴근을 해야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더구나 요즘은 아내가 급하게 끝내야 하는 일 때문에 자주 밤 늦게까지 일을 해서, 아이 둘을 다 맡아야 한다. 둘째를 안고, 첫째를 걸려서 집으로 데려온다. 간단한 반찬거리를 준비해서 첫째녀석 저녁을 먹이고, 둘째 이유식을 먹이면서, 틈틈히 내 입에도 밥과 반찬을 집어넣는다. 

잠시 아이들과 놀다보면 아가가 기저귀에 응가를 한다. 녀석은 꼭 저녁때 응가를 해서, 딱 목욕할 시간을 정해준다. 신기하다. 오늘따라 양이 많아서 응가가 다 새버렸다. 응가가 잔뜩 묻은 옷을 조심조심 벗기고, 따뜻한 물을 받아서 목욕을 시킨다. 춥지 않도록 신경써서 닦아주고, 아기용 로션과 크림을 바르고, 응가 후에 속이 비어서 보채는 녀석에게 분유를 타서 먹인다. 아기를 겨우 재워놓고, 이번에는 첫째아이를 목욕시킨다. 요녀석은 요즘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반항이 심하다. 어떨 때는 달래고, 어떨때는 장난으로 넘기고, 어떨때는 혼내고, 어떨때는 화가나서 소리도 지르면서 목욕을 마친다. 로션과 크림을 바르고 머리칼을 말려주면 나는 씻기도 귀찮을만큼 녹초가 된다. 

이쯤 되면 둘째아가가 깬다. 달래고 어르고 다시 재우려하는데, 잘 안잔다. 엄마의 부재를 느껴서 그런건지 곧잘 울고, 한번 울면 쉽게 안그친다.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아기를 다시 재워야 한다. 아기를 간신히 재우면 첫째녀석도 재운다. 

둘을 다 재우고나면 11시쯤 된다. 대개 11시 반쯤 아내가 돌아오니, 한 삼십분만 자유시간을 갖는다. 책을 읽거나, 웹서핑을 하거나, 그냥 멍하니 시간을 보내거나. 아내가 돌아오면 잠시 서로 얘기를 나누고 설겆이를 시작한다. 젖병도 씻어서 삶는다. 그사이에 아기의 응가가 묻은 옷을 아내가 빨았다. 집안일을 대충 끝내고 나면 1시 반. 

컴퓨터를 켠다. 내일까지 원고를 넘겨야 하는데, 아직 단 한 줄 밖에 쓰지 못했다. 빈 화면에 커서만 깜박인다. 안써진다. 아직 충분히 생각이 정리되지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머리를 쓰지도 않았으면서, 머리를 식히러 알라딘에 접속한다. 서재 이웃들을 방문하다보면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 

어느새 새벽 3시가 넘었다. 에라 모르겠다. 원고는 내일 어떻게든 넘기고, 지금은 자야겠다. 근데, 막상 자려고 맘먹고 나니 뭔가 허전하네. 원고는 못 썼지만 서재에 뭔가 끄적이고 자고 싶다. 

달마다 뭔가 부족한, 맘에 안드는 원고를 넘기면서, 다음 달에는 꼭 일찍 원고마감을 해서 두세번씩 꼼꼼하게 살펴보고 넘겨야지 생각하지만, 한번도 여유있게 넘겨본 적이 없다. 이번에도 어김없이 마감이 닥쳐서야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마감날까지도 글을 단 한 줄밖에 못 썼다. 

어려서부터 늘 그랬다. 시험공부는 늘 벼락치기로, 다음날 칠 과목 전부를 밤새 붙들고 앉아있었다. 나는 이런 내 삶의 태도를 '배수의 진'이라고 불렀다. 양초가 다 타서 뜨거운 촛농에 손을 데이고 나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진심으로 일을 시작하는 내게 결과는 늘 맘에 안들고, 부족하기만하다. 그래놓고 늘 큰소리는 뻥뻥 친다. 만약 내가 진심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훨씬 더 잘할 수 있어! 지금은 좀 부족해도 이건 결코 내 100%가 아냐. 이런 말들로 위로해봐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 것을. 모르겠다. 어쨌든 지금은 도저히 한 글자도 더 쓰지 못하겠고, 내일 마감을 해치우려면 이제는 슬슬 눈을 좀 붙여야 하지 않을까? 그럼 쓸데없는 수다는 이만 줄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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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1-14 09: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의 바쁜 삶. 진심으로 존경스럽네요.
두 아이를 엄마의 손길 없이 돌볼 수 있는 분이라니!!

<배수의 진> - 이거 맘에 드는 말이네요. 저도 그래요.
근데 미리미리 해 놓는 사람들이 아마도 훨씬 소수가 아닐까요?
미리 해 놨는데도 별로 결과가 안좋다면 그게 더 큰 문제니까(ㅋㅋ)
진 쳐 놓는것도 정신건강에 나쁘지는 않지 않을까요? (이것도 자기 변명이겠죠? 아하하)

감은빛 2011-01-15 02:04   좋아요 0 | URL
아뇨, 존경이라뇨? 당치도 않습니다.
저는 많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제 입장에서 노력할 뿐입니다.

미리 해놓는 사람들이 훨씬 소수일까요?
그래도 저처럼 대책없는 인간은 아직 못 본 것 같아서요.
언제까지나 배수의 진에 기대 살수는 없을 것 같은데,
쉽게 벗어나지지 않네요.

고맙습니다! ^^

마녀고양이 2011-01-1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ㅠㅠ.
저도 회사 다닐 때 육아로 이랬던 기억이 있어서 더욱 공감하게 되네요.
너무 지치시겠어요, 감은빛님과 옆지기님 두 분 모두.

더 잘할 수 있어 라고 다그치지 마시고, 나의 한계는 이정도야 라고 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너무 힘들잖아요. 건강 꼭 챙기시구요.

감은빛 2011-01-15 02:06   좋아요 0 | URL
정말 오랫만에 둘째 키우려니 너무 힘들어요.
첫째를 어떻게 키웠는지 하나도 기억이 안나요.
첫째는 조금 힘들었지만 그래도 수월했던 것 같은데,
요녀석은 정말 힘드네요. 그새 나이를 더 먹어서 그런가? ^^

cyrus 2011-01-14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대단하세요. 이렇게 많은 책들을 읽고 글을 쓰시면서 두 자녀들을 돌보고
원고 작업까지 하시다니,, 존경스럽습니다. ^^

감은빛 2011-01-15 02:09   좋아요 0 | URL
아유! 왜들 이러시나요? 존경이란 단어를 그렇게 쉽게 쓰시면 안됩니다.
저는 그런 말에 모자라도 한참 모자란 사람입니다.

아이들 돌보는 건 제가 워낙 애들을 좋아해서 별로 대단할 것도 없어요.
집안일은 되도록 나눠하려고 노력하는데, 서로 힘든 일이니까요.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대개 아내가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더라구요.
그럼 저는 또 미안하니까 기회가 된다면 더 잘 해주고 싶고 그런거죠. 뭐!

고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1-01-14 2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아빠이자 남편이시군요.
갑자기, 우리아빠가 어느날 엄마 안계시던 날, 내 손잡고 눈깜빡이 인형 사주셨던 거 기억난다.. 몇 살 때인지도 모를 정도로 어릴 땐데.. 희미하게 기억이 났어요.
엄마를 돕고, 엄마를 대신한 아빠는 이렇게 무의식적으로 기억에 남아있네요.^^;

건강하시고, 힘내세요.^^

감은빛 2011-01-15 02:13   좋아요 0 | URL
첫째가 백일이 채 안되었을 무렵, 제가 육아휴직을 받아서 아기를 키웠어요.
아내는 나가서 일을 했구요.
그땐 제가 시민단체에 일할 때여서, 활동비를 별로 못 받았거든요.
아내의 벌이가 훨씬 더 좋았기 때문에 제가 아기를 돌보고 집안일을 했어요.
그래서 첫째는 저랑 비교적 잘 놀고 잘 따르는지도 모릅니다.

둘째는 제가 같이 보낸 시간이 많이 없어서 그런지 무조건 엄마만 찾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1-15 2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쓰신 시간이 새벽을 훌쩍 넘어 한참이나 늦은 때였네요.
왠지 고단함이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원고는 잘 마치셨죠..? ^^
날은 추운데 오늘 신문을 보는데 1면도 사진도 그렇고, 실려 있는 만화도 그렇고.. 마음이 좀 편치는 않네요. 감은빛님 주말은 따뜻함이 가득하시길 빌겠습니다.

감은빛 2011-01-18 17:08   좋아요 0 | URL
평일에 늦게 자다보니, 잠이 좀 모자라요.
주말에는 늦잠 좀 자고 싶은데, 애들이 깨워서 더 못자구요. ㅠ.ㅠ

요즘 뉴스, 신문 보기가 겁납니다.
며칠씩 안보고 살기도 합니다.
아침에 신문 집어들어서 펼치지도 않고 그냥 쌓아만 둡니다.
언젠가는 편안한 마음으로 신문, 뉴스 보게 될까 모르겠습니다.

순오기 2011-01-16 1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러니 젊은 부부들이 어떻게 아이를 낳아 키우겠어요?
누가 돌봐주지 않으면 부부가 해결하기엔 너무 힘든 육아.ㅜㅜ
님은 좋은 아빠, 좋은 남편이 되려고 애쓰는 게 보여요.^^

감은빛 2011-01-18 17:11   좋아요 0 | URL
굳이 좋은 아빠, 남편이 되려고 애쓴다기 보다는,
사회운동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에게 떳떳해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운동하는 선배들 중에는 말만 바르게 하고,
행동으로 실천하지 않는 분들도 종종 보게 되거든요.
그럴 때마다 욕해놓고,
저 자신도 똑같은 사람이라고 깨닫게 되는게 싫더라구요.
말로만 양성평등을 외치고,
집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을 안한다면 말이 안되겠죠!

양철나무꾼 2011-01-17 04: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아이를 임신하고 거의 막달까지 왕복 4시간 씩 운전하며 공부하러 다녔었어요.
그때 했던 생각이 누가 나 대신 아이를 좀 품고 있어줬음 좋겠다 싶였어요.
그래서 둘째는 생각도 못했었구요.
이 페이퍼를 읽으니, 감은빛님이라면 할 수만 있다면 대신 품어주기도 하셨을 것 같아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고 그런걸요.


감은빛 2011-01-18 17:13   좋아요 0 | URL
헉! 막달까지 왕복 4시간씩 운전하다니요!
엄청 힘드셨겠어요.
저는 양철나무꾸님의 그 의지와 끈기가 부럽습니다! ^^

따라쟁이 2011-01-27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와! 아이를 재워주는 아빠라니, 멋져요

감은빛 2011-01-27 13:12   좋아요 0 | URL
재우는 것 뿐 아니라, 밥도 주고, 목욕시켜 주고, 빨래도 하고 다 해주는 걸요!
당연한 일인 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