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한 시간
기억을 더듬어 보면 12월 31일 밤과 1월 1일 새벽은 늘 취해있었다. 대학생이 되어 합법적으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된 이래로 단 한번도 취하지 않고 새해를 맞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모르겠다. 그런 때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니 새해 첫 날은 늘 취해있었기에 끊어진 필름처럼 기억이 온전하지 않다. 한 해의 시작은 늘 그랬다. 취해서 맞은 새해 첫날에 무슨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는 않지만, 기억이 희미해져서 내 삶의 일부가 마치 지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건 싫다. 안개가 낀 듯 뿌옇게 흐린 기억속을 더듬어 뭔가를 찾고 싶은데, 내가 찾고 싶은 게 무언지 조차 이미 기억나지 않는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나이는 그냥 숫자일 뿐이라고 생각해왔다. 하루 하루에 숫자를 부여하고 그것을 기록해두는 것도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해가 바뀌는 거? 그게 무슨 상관인가? 우리가 2010 이라는 숫자를 부여한 시간과 2011 이라는 숫자를 부여한 시간이 뭐가 다른가? 해는 떠올랐다가 지고, 바람은 불고, 구름은 떠다니고, 나무는 천천히 자라고, 나비는 날아다니고, 사슴은 물을 마신다. 보신각 종이 울리든 말든 자연의 시간은 변함없이 그렇게 흘러간다. 새해가 되었다고 뭐 특별할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다. 그냥 시간이 흐를 뿐이다. 하루 하루 잠을 자고 나면 조금씩 나이를 먹어갈 뿐이다. 숫자는 그냥 숫자일 뿐이다. 특별한 의미 따위는 없다.
쓸데없는 끄적임
혼자 텅빈 자취방에서 뒹굴고 있었다. 그게 언제였던가. 몇 해전이었던가 모르겠다. 아무튼 그 날은 새해 첫 날이었다. 밤늦게까지 누군가와 술을 마셨고, 어김없이 취했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혼자 자취방에서 자고 있었다. 옷을 모두 벗고 알몸으로 이불 속에 웅크리고 있었다. 입술이 바짝 말라있었고, 목이 꽉 잠겨있었고, 머리가 깨질 것 처럼 아팠고, 속이 쓰렸다. 이불을 덮어쓰고 다시 잠들려했지만, 정신은 점점 더 또렸해졌다. 누군가를 떠올렸던 것 같다. 그게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열심히 그녀를 떠올렸다. 오랫동안 누워서 그녀만 생각했다. 생각의 끝자락에 자위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핸드폰을 집어들고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하다가 그만두기를 여러번 반복했다. 엎드려서 책을 펼쳤다가 다시 치웠다. 공책을 펼치고 연필로 의미없는 단어들을 끄적였다. 습작공책을 펼쳐들고 며칠 전에 쓴 단편을 다시 읽으며 어색한 부분을 고쳤다. 습작공책을 던져버리고 누워서 천정만 쳐다보았다. 배가 고프지는 않았지만, 담배 생각은 간절했다. 몸을 일으켜 좁은 방을 뒤졌지만 담배를 찾지 못했다. 재떨이를 끌어와서 장초를 뒤졌다. 상태가 비교적 양호한 놈을 하나 골라들고 이번에는 라이터를 찾았다. 잠바 주머니늘 뒤지고, 바지 주머니를 뒤졌지만 찾지 못했다. 구석에 널부러져 있는 책들 사이에서 조그만 성냥갑을 찾아내었다. 성냥을 그었다. 확 불꽃이 일었다. 장초를 물고 불을 붙였다. 강한 자극이 꽉 잠겨버린 목을 덮쳤다. 콜록 콜록 두어번 기침을 했다. 길게 담배를 빨았다. 그리고 길게 숨을 내뱉았다. 담배 연기가 앞으로 쭉 내뻗었다가 잠시 후 흩어졌다. 추워서 덜덜 떨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지만, 옷을 걸치고 싶지는 않았다. 대신 이불을 어깨에 덮어쓰고 점점 짧아지는 담배를 끝까지 피웠다. 또다른 장초를 찾으려다가 말고 물을 찾아 냉장고를 열었다. 물이 없었다. 수돗물을 틀어서 마셨다. 차가운 물이 속을 자극시켜서 다시 쓰렸다. 이불을 덮어쓰고 엎드려서 다시 공책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오랫동안 의미없는 무언가를 끄적였다.
2011 이라는 숫자
나는 무엇을 쓰고 싶었던 걸까? 나는 무었을 끄적였던 걸까? 그 공책이 지금 남아있지 않아서 알 수 없다. 떠올리려 애써도 기억은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하루종일 생각했던 그녀가 누구였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공책은 없어졌고, 내 기억도 지워졌다. 그렇게 열렬하게 좋아했던 사람을 깨끗이 잊었다. 언젠가 지금을 기억하는 어느 날에도 그럴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애타게 바라고, 무엇에 격하게 분노하고, 무엇때문에 죽을것처럼 아파하는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컴퓨터를 켜고, 물을 마시고, 화장실을 갔다오고, 마우스를 움직이고, 키보드를 두드리는 동작 하나하나는 다 기억할 수 있을지 몰라도, 내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무엇에 마음을 쏟고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아직은 2011 이라는 숫자가 낯설다. 서류를 작성하면서 자꾸만 2010이라고 썼다가 찢어버리고 다시 고쳐쓰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새해 계획에 대해서 얘기한다. 올해는 무엇을 해보고 싶고, 무엇을 바꾸고 싶고, 어딘가를 가보고 싶고, 책을 얼마나 읽고 싶고, 돈을 얼마나 벌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나는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다. 나는 새해 계획이라는 걸 해본적이 별로 없다. 계획을 한다고 해도 지켜지지 않을 것을 잘 안다. 그저 숫자가 바뀐 것일 뿐 나에게는 같은 시간이다. 그냥 나는 미치도록 사랑이 하고 싶다! 내 바람은 늘 그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