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브래지어


누구나 한번쯤
브래지어 호크 풀어보았겠지
그래, 사랑을 해본 놈이라면
풀었던 호크 채워도 봤겠지
하지만 그녀의 브래지어 빨아본 사람
몇이나 될까, 나 오늘 아침에
아내의 브래지어 빨면서 이런 생각해보았다
한 남자만을 위해
처지는 가슴 일으켜세우고자 애썼을
아내 생각하자니 왈칵,
눈물이 쏟아져나왔다
산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남자도 때로는 눈물로 아내의 슬픔을 빠는 것이다
이처럼 아내는 오직 나 하나만을 위해
동굴처럼 웅크리고 산 것을
그 시간 나는 어디에 있었는가
어떤 꿈을 꾸고 있었던가
반성하는 마음으로 나 오늘 아침에
피죤 두 방울 떨어뜨렸다
그렇게라도 향기 전하고 싶었던 것이다


박영희 / 팽이는 서고 싶다 / 창비

 

몇 해전 박영희 시인과 식사를 하던 중에 들은 얘기가 궁금해서 이 시를 찾아 읽었다. 그때 시인은 창비에서 나온 자신의 시집 '팽이는 서고 싶다'의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고 말씀하셨다. 원래 자신이 생각했던 표제작은 바로 이 시 '아내의 브래지어'였는데, 창비쪽에서 계속 바꾸기를 요청해와서 결국 '팽이는 서고 싶다'가 제목으로 정해졌다고 한다. 만약 자신의 주장대로 '아내의 브래지어'가 제목으로 정해졌다면 책도 훨씬 더 많이 팔렸을거라고 장담하셨다.
 

책을 고를 때 가장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마 제목과 표지일 것이다. 그만큼 책을 만들때 어떤 제목을 고를 것인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고 또 어렵기 마련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문학작품은 이미 작가가 제목을 정해놓기 때문에 출판사 입장에서는 그다지 의견을 낼 여지가 없다. 대개 시집이나 단편소설집은 수록된 여러 작품들 중에서 표제작의 제목을 그대로 책의 제목으로 정한다. 이 경우에는 작가가 명확하게 표제작을 정해놓았는데, 출판사측에서 표제작을 바꾸기를 원했다. 이유가 뭐였을지 궁금하다. 뭐 짐작하지 못할 것도 아니지만, 작가가 이렇게 아쉬워할 정도인데도, 출판사가 바꾸기를 강행했다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 같기도 하다

'팽이는 서고 싶다' 는 시도 제법 괜찮아서 표제작으로 뽑은 것이 나쁜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 시 '아내의 브래지어'가 사람들 입에 더 많이 오르내리기 때문에 박영희 시인께서 그런 말씀을 한 게 아닌가 생각이 된다.

박영희 시인은 일제시대 광부 징용사에 대한 글을 쓰기 위해 중국을 통해 북한에 들어갔다가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되었고, 7년의 옥살이 끝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난 좀 별난 이력을 지닌 분이다. 최근에는 르포작가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시인은 아내의 브래지어를 빨아준 경험을 바탕으로 아내에 대한 감정을 풀어놓고 있다. 나는 아내의 생리대는 여러차례 빨아주었으나, 브래지어나 팬티를 빨아준 적은 없다. 대신 탈수가 끝난 빨래를 널면서 브래지어를 물끄러미 쳐다본 적은 있다. 그때 저걸 하고 다니려면 참 갑갑하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아내도 가끔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특히 여름이면 무척 갑갑해 한다. 그리고 가슴을 받쳐주는 용도라면 좀 더 간단해도 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두껍고 무늬도 복잡할까 라는 생각을 잠시 해봤다. 

아내에 대해 생각하면 여러가지 다양한 감정이 생긴다. 늘 곁을 지켜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 고생하게 만든 것에 대한 미안함. 결혼 전에는 늘 느끼지만, 결혼 후에는 가끔만 느끼는 애틋한 사랑의 감정 등 그런 감정들이 들게 되는 어떤 계기는 다양할 것이다. 시인에게는 브래지어가 그 역할을 했지만, 나는 생리대를 빨면서 여러가지 생각을 하곤 했다. 

술 마시고 적당히 취해서 들어오면, 아내와 아이들은 모두 잠들어 있다. 소리가 나지 않게 조심해서 옷을 벗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씻는다. 씻다가 보면 한쪽 구석에 쌓여있는 생리대가 보인다. 핏물을 빼기 위해 물에 담궈놓았다. 한꺼번에 모았다가 빨려고 놔둔 것일텐데, 손빨래는 모으면 모을수록 두배, 세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안다. 술먹고 늦게 온 것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기 위해 고무장갑을 끼고 빨래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손빨래는 팔힘이 좋은 남자가 하면 더 깨끗해진다. 가끔 아내는 내가 빨아놓은 걸레나, 아기 기저귀를 보고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빨 수 있냐고 놀랄때가 있다. 오랜 자취생활 동안 손빨래는 정말 지겹도록 해왔다. 빨래판에 빨래를 박박 밀면서 이런저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문지르고, 비비고, 짜고, 헹구고, 다시 짜고 또 헹구고 마지막으로 물기를 꼬옥 짜내고 널고나면 스트레스가 확 풀리는 기분이다. 아침에 일어나 빨랫대에 널린 생리대들을 보고 놀랄 아내 얼굴을 생각하며 피곤한 몸을 누인다. 별 것 아닌 일 하나로 뿌듯한 마음이 든다. 그래 뭐 아내를 위한다는 게 별 대단한 일을 해야하는 게 아닐거다. 평소보다 좀 더 집안 일에 신경써주는게 가장 아내를 위하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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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9-19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첫 반응을 보면, 역시 제가 경직되어 있는게 틀림없어요.... ^^
하지만 씹을수록 참 따스하고 고운 이야기입니다.

아내분께서 행복해하시겠는걸요.

감은빛 2011-09-20 12:44   좋아요 0 | URL
흠 어떤 반응이셨는지 궁금합니다.
혹시 '브래지어'라는 단어 혹은 '생리대'라는 단어 때문에,
불쾌감을 느끼신 걸까요?
본의 아니게 불쾌감을 드렸다면 사과드립니다.

루쉰P 2011-09-19 16: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 너무 멋져요!! 흠...이 따뜻한 대감동! 시 너무 좋아요. 요즘 저의 인터넷 친구인 '사자'께 시집을 한 권 선물 받았거든요. 그래서 저도 나름 시를 읽는 문학도에요. 근데 이 시도 너무나 좋은데요. 게다가 너무 멋있으세요. 저도 정말 감은빛님 같은 결혼생활을 하고 싶어요. 아...정말 따스해라.
사실 결혼하면 제 팬티도 부인이 다 빨아주잖아요. 당연하게 생각하구요. 근데 부인의 속옷을 직접 빨아주는 그런 낭만적인 사람이 정말 되고 싶네요. ^^
잘 지내시죠? 항상 감은빛님의 글을 읽으며 정화되는 저 입니다. 완전 정화!!

감은빛 2011-09-20 12:45   좋아요 0 | URL
시를 읽는 문학도, 루쉰님.
늘 루쉰님의 댓글을 읽으면, 입가에 웃음을 머금게 됩니다.
저를 웃게 만들다니, 대단한 능력이세요! ^^
지금 연애하는 분과 관계를 잘 만들어가서,
얼른 루쉰님도 결혼하세요! ^^

쉽싸리 2011-09-19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실천해 봐야겠어요. 저는 핏물이 어느 정도 빠지면 세탁기에 돌리는줄 알았는데 손빨래를 하겠군요. 그것이 힘은 들지만 더 깨끗이 빨리겠군요. 아닌가?
뭐 하여간 실천해 보도록 하겠슴다. ㅎㅎ 감은빛님의 사랑을 배웁니다.^^

감은빛 2011-09-20 12:48   좋아요 0 | URL
세탁기에 돌리는 것보단 당연히 손빨래가 더 깨끗해집니다.
좀 힘이 들기는 하죠.
양이 많은 날에는 하루에도 여러개씩 나오니까요.
귀찮으면 세탁기에 돌려도 상관없을 것 같아요.
다만 세탁기 돌리기 전에 충분히 핏물을 빼고,
한번씩 비벼주면 더 좋을 것 같네요.

아유, 쉽싸리님께서는 저보다 훨씬 더 가족들을 잘 챙기실텐데요.
제가 오히려 배워야 할 입장입니다. ^^

yamoo 2011-09-19 2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도 멋지고, 감은빛님의 마음도 멋지네요!

감은빛 2011-09-20 12:49   좋아요 0 | URL
멋지다고 말씀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야무님! ^^

순오기 2011-09-20 0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낮에 학교에서 보고 비로그인아라 추천만 했는데,
심야에 다시 한번 추천하고 댓글 남겨요.
감은빛님 옆지기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남편이 서답까지 빨아주는 아내가 몇이나 될까요... 좋은 남편이세요!

감은빛 2011-09-20 12:51   좋아요 0 | URL
아, '서답'이란 단어. 처음 들었어요.
'개짐'이란 단어도 있던데요.
처음에 이 '천 생리대' 만드는 법을
'피자매연대' 활동가에게 배울 때,
'대안 달거리대'라고 배웠는데,
발음도 표기도 영 어색하더라구요.

그에 비해 '서답'이란 단어는 고전적이면서 느낌이 좋네요.
고맙습니다! ^^

진주 2011-09-20 16:22   좋아요 0 | URL
저는 경상도 토박이인데요..^^서답은 제 나이 또래만 되어도 거의 쓰지 않는 말로써 연세드신 어른들이 '빨래'와 같은 의미로 써요. 즉, 서답에는 달거리대라는 의미는 없이 그저 온갖 빨래에 두루 통용되는 그런 사투리지요.

그런데 지금 기억나진 않지만 분명 달거리대에 해당하는 말이 있었던 것 같아요. 총기있는(ㅋㅋ)제가 기억 못 하는 이유는 경상도라도 젊은 사람들은 표준말을 쓰느라 사투리를 못 배운 이유도 있고요(아..물론 표준말은 알아도 경상도식 억양은 어쩔 수 없지만요)

또 다른 이유는 여성의 생리현상이나 생리대 따위를 공공연하게 말하는 분위가 아니라서 그럴거예요. 제가 어릴 적엔 할머니나, 엄마, 고모, 언니들이 은근슬쩍 그것들을 지칭하는게 미덕이라고 여겼을거 아녜요? 제대로 들은 적이 없으니 모르는게 당연하겠지요.

사실 저도 감은빛님 페이퍼 읽으며 요즘 애들 말대로 '깜놀!'했답니다. 저도 피자매연대 그것이 있는데 이게 여간 번거로운게 아녜요. 그것을 애용하는 분이 계시다는 것도 대단하고, 핏물이 흥근한 채 욕실에 있는 모양을 상상해도 놀랍네요. 제가 자랄 때 집안에 생리하는 여자가 북적북적했지만 한번도 그 빨래거리를 본적이 없거든요. 그게 부끄러운 건 아니지만 나 외에 다른 사람이 본다는 건 생각조차 해본 적 없어요. 달거리가 부끄럽진 않지만 남 눈에 띄지 않게 깔끔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아는 것은 남성우월주의적인 잘못된 교육 때문일까를 생각해보네요.... 가치관에 따라 차이가 있겠죠? 확실한 건 제가 참 보수적으로 살았다는 거예요.

어쨌던 아내의 속옷을 빨래해 줄 마음이 있는 남편은 좋은 남편이예요^^
감은빛 님, 오늘 처음 뵈었는데 이례적으로 많은 말을 했네요^^

감은빛 2011-09-21 10:41   좋아요 0 | URL
진주님, 안녕하세요!
저는 가끔 진주님 서재에 들르곤 했는데, 따로 인사를 드린 적은 없었네요.
먼저 인사해주시고 또 사투리에 대한 말씀 남겨주셔서
무척 반갑고 또 고맙습니다! ^^

제가 '서답'을 찾아보니,
'빨래'와 '개짐' 두가지 뜻이 있더라구요.
포털에서 사전을 검색해보면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1 ‘빨래’의 방언(경상, 제주, 충북, 평안).
2 ‘개짐’의 방언(경남, 충청).

지역에 따라 다른 뜻으로 사용했나봐요.

네, 경상도라도 젊은 사람들은 사투리를 많이 못배웠다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저도 부산 토박이지만, 대개 서울에서 알게된 사람들은
제가 부산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깜짝 놀랍니다.
어떻게 사투리를 안쓰냐고 물어요.
저는 부산이라도 젊은 사람들은 사투리를 잘 안쓴다고 답합니다.
진주님 말씀하신 것처럼 억양만 다를 뿐이죠.

그리고 저희집 화장실 풍경은 놀라실만 하죠! ^^
저도 처음에는 좀 놀랐습니다.
아내가 좀 그런 면에서 자연스럽달까? 자유롭달까?
암튼 신체와 관련된 것을 숨기거나 부끄러워 하면 안된다고 생각하더라구요.
게다가 저희가 어른과 같이 사는게 아니라서 그런 상황이 가능할 겁니다.

저도 반가운 마음에 답글이 길었네요.
다시 한번 고맙습니다!

stella.K 2011-09-20 1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감은빛님 멋진데요!ㅋ
저런 시가 있었군요. 저 시도 멋지고.
이 화창한 가을 날 좋은 글 읽게해 주셔서 감사!^^

감은빛 2011-09-21 10:42   좋아요 0 | URL
아, 스텔라님. 오랫만이네요.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파란놀 2011-09-20 14: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저 따순물로 핏덩이를 헹구고 애벌빨래를 한 다음에 목초액을 한두 번 뿌리고
더운물에 담가 놓고서 한두 시간쯤 지나서 두벌빨래와 세벌빨래를 하면
달거리천은 잘 빨 수 있어요.

그나저나, 집에서 일을 하는 남자라면 속옷이든 달거리천이든
일찍부터 빨래하기 마련이니까 뭐...
그닥 대수로운 일일 수 없는데,
이 나라에서는 남자들이 집일을 아예 안 하거나 거의 안 해 버릇하니까,
앞으로 이 나라에서 살아갈 남자들 또한 똑같이 되풀이되겠지요...

감은빛 2011-09-21 10:47   좋아요 0 | URL
저는 좀 오래 담가둬서 핏물을 빼고,
비누칠을 두세번 하고, 헹구기를 서너번쯤 합니다.
그럼 웬만큼 핏기가 빠지더라구요.
물론 그래도 완전히 하얗게 깨끗해지지는 않지만요.
아내는 몇 달에 한번쯤은 삶기도 하더라구요.
목초액을 뿌리는 건 좋은 아이디어네요.
담에 한번 활용해보겠습니다.

대부분의 남성들이 집안일을 잘 안하긴 하지만,
그것도 세대가 바뀔수록 자연스레 바뀌긴 하는 것 같아요.
제 주위의 삼,사십대 남성들은 곧잘 집안일을 합니다.
물론 그 태도와 빈도가 여성들과 다르긴 하죠.

고맙습니다!

책을사랑하는현맘 2011-09-20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제게 감은빛님의 일상은 늘 놀랍고 신기해요.^^
일찍부터 혼자 독립하여 사셨다고 해도, 모든 남자가 다 그렇지는 않던데
참 자상하신 것 같아요.^^


감은빛 2011-09-21 10:53   좋아요 0 | URL
현맘님, 늘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대개 남성들이 집안일을 잘 안하지만,
막상 하게되면 또 대부분 곧잘 하더라구요.
특히 군대 다녀온 남자들은 청소 하나만큼은 확실하게 하잖아요.
이게 다 평소의 버릇인 거 같아요.
암튼 저는 특별히 자상하다기 보다는 그냥 그렇게 버릇이 들어서요. ^^

비로그인 2011-09-25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왠지 감은빛님은 집안일을 꽤 많이 하고 계실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나와산지 꽤 오래 되었는데, 나중에 감은빛님처럼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네요.
그래도 이 페이퍼 보면서 좀 나서서 구석까지 뭐 도와줄 일 없나 생각해봐야겠습니다. ^^

감은빛 2011-09-29 18: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바람결님.
답이 좀 늦었네요.
바람결님도 나와산지 오래되셨군요.
아마 잘 하실 것 같아요!
대부분 혼자 좀 살아본 사람들은 닥치면 다 잘하게 되던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