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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 Travels 쉬 트래블스 1 - 라틴 아메리칸 다이어리 1
박정석 지음 / 효형출판 / 2001년 6월
평점 :
절판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유난히 '여행기'와 '낯선 곳으로의 떠남'에 열광을 하는지. 그 사람에겐 내가 역마살이라도 낀 것처럼 보였나 보다. 그러나 나는 여행이 하고 싶어서 달떠 있는 것과는 너무나 모순되게, 성실한 시계추처럼 집과 회사를 왕복하며 산다. 그렇다. 여행기란 대리 만족과 같은 것.... 거창하게 말하면, 낯선 곳으로의 여행기는, 나에게 이 세상에 계속 살아야 할 존재 이유 같은 걸 만들어 준다. 계속 살아서, 좋은 날이 오면 그땐 내 눈으로 직접 보고 들어야겠다는. 이 라틴 아메리카 여행기도 그렇다.
너무나 멀어서 갈 수가 없을 거라고 일찌감치 낙인찍힌 대륙이다. 그런 나라들을 기행한 사람의 얘기를 듣는 이 행위는 참 매력적인 귓동냥이다. 여행기 중간중간 내비치는 푸념들. 두고 온 현실에서 풀려나온 상념들. 충분히 공감이 갔다. 화려한 약력과는 달리, 지은이는 스스로 느끼기에, 미래가 잡히지 않는 공부를 계속 하고 있었고, 무기력증에 시달리다가 과감하게 공부를 접고,(공부의 시작이 어려웠지만, 그만두는 건 아주 쉽게) 떠나기로 결정한 여행이었던 것이다.
여행기에는 여러 가지 내용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현지 사정, 일테면 물가나, 숙박 시설 수준이나 교통편 같은 여행 팁도 있고, 어딜 가면 멋있는 풍광을 구경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고, 독특한 문화 체험이 기다리고 있다는 식의 내용들 말이다. 그러나, 여행기를 다 읽고 나면, 그런 현지 정보보다는, 여행을 한 장본인 개인 내력과 여행지가 주는 정서 사이에 얽힌 회한 같은 것들이 더 머릿속에 남는 것 같다.
여행기 1권에서는 콜롬비아 여행기가 가장 인상적이었다. 라보키야 라는 해변에서 만난 끈질기게 따라붙는 어린 동냥 소년들, 지은이는 '돈을 주면 공책 사서 열심히 공부할께요' 라고 말하는 소년들을 끝까지 외면하다가, 결국엔 그들에게 동전 몇 개를 떨어뜨려 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콜라 사, 공책 사지 말고.'라고. 참 재밌는 여자다.
그리고 콜럼비아의 내륙 산 아구스틴이라는 깊고 깊은 산골 마을에서, 마을 관광을 위해 빌린 조랑말과 하루 종일, 몸싸움과 기 싸움을 했던 이야기, '총이 있고 말 값을 물어줄 염려만 없었다면 당장 이 자리에서 사살해서 저 까마득한 절벽 아래로 던져버려도 시원치 않을텐데.' 라는 과격무쌍한 말들도 서슴칠 않아, 읽는 묘미를 더해 준달까.
여행기 2권에서는 특별히, 페루에서 보낸 날들에 대한 기록이 기억에 남는다. 지은이 조차도 페루를 20년간 잊었던 기억을 되찾아준 아주 이상한 나라라고 했다. 사막, 고산, 유적지 등을 정신없이 돌아다니다가 결국 잊어버린 줄도 몰랐던 것과 마주하게 된 나라라고 말이다. 그녀는 여기 페루에서 늘 함께 해 주던 유일한 친구인 노트북이 완전 고장이 나버린 일을 겪게도 되고, 고산병에 내내 시달려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으며, 사막에서 비키니 한 짝을 잃어버리고, 그 한 짝을 찾기 위해 택시를 타고 온 길을 되짚어 다니는 둥의 이상하게 집요한 고집을 부렸다.
아메리카 대륙의 남단 자락에 붙은 페루의 어느 사막에서 그녀가 맞딱뜨리게 된 것은 무엇일까. 황량한 사막의 유적지에서 거침없이 불어오는 매마른 바람을 맞으며, 지은이는 어릴적 꿈이 뱃사람이었다는 20년전의 기억을 떠올린다. 어린 나이에 뱃사람은 '낯선 세상을 떠나 모험을 떠나는 사람'의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이렇게 아쉬운 여행기를 접는다. 그녀와 함께 참 괜찮은 여행을 했었다. 그녀의 말처럼, 지금 몸담고 있는 이곳에서 한번도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을 먹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누구보다도 불행한 사람이거나, 아니면 엄청난 행운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