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줌마 밥 먹구 가 - 오한숙희의 자연주의 여성학
오한숙희 지음 / 여성신문사 / 2002년 4월
평점 :
품절


두 가지 측면에서, 이 책은 나에게 매우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가르침이란 항상 따금한 것이 아니라서, 이렇게 읽는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고 유하게 만드는 스타일의 가르침도 있나보다.

첫째, 나에겐 물건을 잘 정리하지 못하는 나쁜 습관이 있다. 예전엔 엄마가 친척집에라도 방문을 하기 위해 여러 날을 비울 일이 생기게 되면 꼭 다음과 같은 일들이 발생했다. 필요한 물건을 찾아 삼만리를 해야 하는 상황 말이다. 가족끼리 살다보면 흔히 발생하는 문제이다. 무엇인가 내 것이든 남의 것이든 자리에 두는 습관이 되어 있지 않아서 일어나는 일들.

그런데 자리를 못 찾는 물건을 다 제자리 찾아 주시며, 물건을 찾느라 벌어지는 대혼란을 항상 소리없이(물론 잔소리로 들리는 말씀을 자주 하신다.) 평정해 주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은 바로 어머니이다. 어머니는 집안의 모든 서랍에 무엇이 있고, 없음을 꿰뚫고 계시는 듯하다. 어머니는 물건 정리하는 게 사는 낙이라서 이 고생을 자처하시는 것일까? 평소에 별로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이 부분에 대해 생각이 미치었다. 생색도 안 나는 이런 노동을 항상 엄마라는 존재가 도맡아야 하다니.

일반 일리치라는 가톨릭 신부는 <젠더>라는 그의 저서에서 모든 것이 상품화되어 갈수록 이런 그림자 노동이 늘어난다고 했단다. 그의 책에서는 현대 사회의 여성들이 도맡아 하고 있는 부분이고, 꼭 필요한 일임에도 임금이 지불되지 않는 노동을 그림자 노동이라는 말로 설명했다.

예를 들면 '시장 보기' 같은 것이 좋은 예이다. 시장을 본다고 하면 돈만 있으면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차를 타고 시장에 가야 하고, 사려는 물건을 둘러보고 가격을 비교해서 적합한 것을 선택하고 돈을 내고, 만약 돈이 모자라면 은행에 가서 찾아야 하고, 하는 일련의 과정들 말이다. 이런 것뿐이랴. 집안일은 나날이 정교하고 세분화되어 간다. 그런데 이렇게 정교하게 세분화되어 가는 집안일을 완벽히 어렵다. 숙희는 이 부분에서 집안일을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 내는 인생의 '편집 기술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집안일을 간략
화시키는 것이다.

둘째, 신영복님이 이 책의 저자 오한숙희씨가 들었던 어떤 강연에서 그런 말을 했단다.
냉장고가 발명되면서 사람들은 음식을 쌓아놓고 혼자 먹기 시작한 것 같다고. 냉장고가 보편화되기 이전에는 이웃 사람들의 배가 냉장고라서, 내가 있을 때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나눠주면 그 사람들이 언젠가 음식이 생겼을 때 내 몫을 챙겨 오곤 했었으니까 말이다. 이렇게 음식은 돌면서 정을 만든다. '빈 그릇 주는 법은 없다'고 뭐라도 담아 보낸다. 전기가 아니라 정으로 돌아가는 냉장고.

여성의 본질은 결국 자연과도 같다는 사실을 여러 가지 전제(시골살이의 일담)들을 통해서 보여 주고, 결국엔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라는 게 서로를 끌어앉고, 감싸 주어야 한다는 결론으로 향해 간다. 그리고 그 구비구비에는 시골살이의 여러 일화들을 풀어놓는 것이 이 책의 스타일이다. 그렇다. 아줌마의 구수한 입담이 느껴지는 편안한 책이다.

상석도 없고 말석도 없는 누구라도 끼어않을 수 있는 여유로운 밥상, 두레반을 펼쳐 놓고 사람들을 부르는 것이다. 밥먹구 가. 라고. 이웃과 사는 지혜를 십분 발휘하는 것이 조금은 벅차게 되어버린 세상이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함께 잘 사는 인생의 노하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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