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고용주의 노예나 될법한 저녁잠 많은 인간형이 되기 싫어, 이 시간에 안 자고 있는 것은 아니다. 디지털 티비로 바뀌면서 고안된 메뉴얼을 찬찬히 둘러볼 계기가 없었는데, 오늘 보다가 데이타 방송으로 애들한테 보여 줄 만한 무료 프로그램들을 몇 개 발견했다.  

지금 참으로 늦게 취침 드시는 둘째가 맹렬하게 연속으로 보고 있는 중이다. 그 녀석이 스스로 자겠다고 나설 때까지, '엄마는 일해(인터넷 하라는 의미)' 모드이다.  

요즘엔 나의 건강염려 증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내 자리에서 일할 때도, 사내식당에서 밥먹을 때, 집에 있을 때, 출퇴근 지하철 안에서 조차 남의 눈을 의식 못하고 겨드랑이 언저리를 외과 의사가 촉지로 진료보듯 하곤 한다. 때도 못 가리고.... 내가 그러고 있는 모습을 제 3자가 되어 지켜본다고 했을 때 좀 추한 그림이..ㅎㅎ 그리고는 시도때도 없이 불현듯 생각났다는 듯, 지식인으로 검색을 한다. ***의 초기 증상 따위를 ...  

한번은 검색하다가 사람들이 올린 답변글 중에, 자신의 병에 대해 인터넷으로 답변에 의지하는 것은 바람직한 대처방안이 아닌듯한 사안이니, 당장 전문의에게 진료받으라...는 글을 보고 그 말에 강하게 긍정한 나머지 기함을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오늘 독감 예방 접종을 병원에서보다 60%나 저렴한 가격에 단체 접종한다고 했는데도, 맞지 않았다. 작년까지는 해마다 꼬박꼬박 맞았었는데, 오늘은 어쩐지 주사 따위 맞을 기분이 아니었다고 하면 너무 궁색한 변명인가?  

오늘은 몸을 사리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아침에 집을 나와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다가 오른쪽 뒤꿈치가 헛방을 치는 바람에 몸이 헛스윙을 했다. 구두의 뒷굽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뒷굽을 어느 길목에서 잃어버린 것일까. 절뚝이며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봤다. 구두 바닥을살폈더니, 뒷굽과 밑창 접착 부분이 너덜하게 떨어져 있었다. 대롱거리는 뒤축을 이끌고 집으로 갔다. 오늘 무슨 일이 있으려나, 말도 행동도 삼가 절제하자 하며, 구두를 갈아 신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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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공지영의 ‘도가니’를 읽으면서 이 책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을 떠올리게 되었다. 두 책 모두 공통의 카르텔은 전자의 경우는 검찰, 고위공무원, 위시한 정치계 인사로 대표되는 상류 기득 권력층들에게 고함이라면, 후자는 사회 속 남성 권력층들에게 고함이다. 폐단은 정작 읽혀야 할 그들은 읽으려 들지 않고, 우리 같은 사람들(사회적 약자? ㅎ)만 들입다 읽는다는 점이긴 했다.  공지영은 책 한 권으로(정확한 표현은 원작으로 만들어진 영화) 책 속의 ‘자애학원’이 재조명되게 하였고, 남들이 돌아보려 하지 않는 어두운 곳에서 조용히 약자를 돕는 사람들 이야기 또한 세상에 알려지게 하였다. 사람들의 관심 하나, 말 한마디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 것이란 이야기, 그리고 책 한 권이 바꿔가고 있는 이 사회가 그래도 희망은 있다고 봐야지 않을까? 

22~23쪽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는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 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인 것이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35쪽
인간은 누구나 자신이 경험하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배 이데올로기나 대중매체에서 떠드는 것 이상을 알기 어렵다. 알려는 노력. 세상에 대한 애정과 고뇌를 유보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타인에게 상처를 준다. 한나 아렌트가 말했듯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 이것이 바로 폭력이다.

120쪽
결국 사람들은 또 무엇이 더 결정적이냐고 결론 내고 싶어한다. 마치 민족 모순이나 계급 모순처럼 '큰' 문제를 우선시하는 사람은 구조적 파시즘을 강조하고, 소수자들은 일상적 파시즘에 더 무게를 두는 것처럼 논의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일상적 파시즘도 구조적 파시즘도 극복하기 어렵다. 구조적 파시즘은 일상적 파시즘을 전제로 작동하는데, 두 가지 파시즘이 어떻게 구별될 수 있단 말인가?

140쪽
한국 남성에게 성폭력당하면 '개인적인 일'이고, 일본 남성에게 당하면 '민족의 아픔'인가? 성폭력은 가해 남성이 누구인지에 따라 그 성격이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에 의한 폭력이라는 사실이 더 본질적인 문제이다. 그러므로 여성을 '순결한' 피해 여성과 '타락한' 성판매 여성으로 구분하는 것은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가치를 정하는 방식이다. 남성의 입장에서 성매매와 성폭력은, '자발'과 '강제'라는 '반대' 현상이지만, 여성의 시각에서는 구별될 수 없는 연속선이다. 언뜻 모순처럼 보이는 이 현실이 바로 성폭력과 성매매의 원인이다. 남성의 성욕은 통제할 수 없다는 전제  아래, 여성을 남성의 성 권력의 희생자와 '자발적으로 남성의 욕구에 부응한' 여성으로 나누는 것은 누구의 논리인가? 성폭력 피해 여성이나 성산업에 종사하는 여성 모두, 결국은, 남성을 위한 제도의 '희생자'들이다.

177~179쪽
그러나 인간이 원하는 것은 개인의 고유한 의지로만 형성되는 것이 아니며, 몸은 단순히 그 몸을 '소유한' 개인의 판단 대상이 아니다. 여성의 자기결정은 여성의 정신에 의해 투명하게 구성되거나, 약자인 여성의 결정이기에 그 자체로 올바른 것이 아니다. 성적 자기 결정론은, 개인의 자기 몸에 대한 결정 내용이 사회 혹은 상대방과의 상호 작용과 사회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은폐하는 추상적, 현실 초월적인 논리이다. 
"내 몸은 나의 것"이 아니라 내 몸이 바로 나다. 성적 자기 결정권을 주창한 급진주의 페미니즘은 성폭력이 사적인 피해라는 자유주의 이론 비판에서 출발했지만, 몸을 주체의 소유물, 주체의 재산으로 간주하는 근대 자유주의 철학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
같음의 기준이 남성의 경험에 근거한 것일 때, 여성은 남성과 같음을 주장해도 차별받고 다름을 주장해도 차별받는다. 이것이 소위 '차이와 평등의 딜레마'이다. 예를 들어, 여성이 남성과의 차이를 주장하면 남성 사회는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고, 같음을 주장하면 사회적 조건의 다름은 무시한 채 남성의 기준을 따르라고 요구한다. (...)
그러나 아직까지도 우리 사회에서 '평등'은 장애인이 장애를 '극복'하고 비장애인과 같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사회적 강자의 기준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등이라고 볼 수 없다.

250쪽
의무는, 수행하지 않으면 처벌을 받을 수는 있어도, 이행했다고 해서 보상받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군 가산제 제도는 여성과 장애인 등 처음부터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 사람들에게 그 면제된 의미를 이행하지 않았다고 처벌하는 격이다. 면제의 기분을 문제삼아 여성과 장애인의 징병을 주장할 수는 있어도, 처음부터 면제된 의무를 안 했다고 해서 개인의 권리와 생존권(취업권)을 박탈하거나 감수하라고 말할 수는 없다. (...) 여성은 병역의 의무가 면제된 것이 아니라 배제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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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에 미치다 - 현대한국의 주거사회학
전상인 지음 / 이숲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서울 인구의 56.9%가 아파트에 거주한단다. 울산이나 대전, 대구는 그보다 더 높은 64%이다. (나는 아파트에 살지 않는다. 의지가 담긴 것은 아니다. 주거 형태의 다양화를 위해 아파트 말고 다른 대안은 없는가 하는 논의들이 거론된다지만, 그러거나 어쩌거나 간에, ‘언제 한번 평수 넓은 아파트에 살아보나 하는 로망이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아이들 키우기에는 -아이들의 동네 친구들을 만들어준다거나 하는 점에 있어서- 대단지 아파트에서 키우면 좋지 않을까 하는 점들에 미련을 갖고는 한다.)  

그렇다면, 시골은 어떨까?  친한 친구가 올초 결혼을 하면서 남편을 따라 전주 인근에 내려가 살고 있다. 처음에는 직장에서 제공하는 관사에 살다가 불편함이 많아서 아파트로 이사를 했다고 한다. 대도시 사람만 아파트를 편리한 주거 환경으로 꼽는 게 아니다. 그런데, 논가운데 있는 아파트이다 보니, 자연의 냄새(?) 말고도 다른 냄새(농약?)를 맡으며 살아야 하는 게 애로 사항이라서 얼마전에 필터값이 눈돌아가는 고가 말고, 물로 씻어 쓸 수 있는 착한 가격에 속하는 공기청정기를 눈물을 머금고 질렀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들 호흡기도 고려하고 해서, 한번 구해봄이 어떤지 하면서, 자신의 쌔끈한 공기청정기를 찍어 전송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한국 사회는 아파트 공화국이 되고 있다. 이 책은 아파트를 단순한 주거시설이나 주거공간의 의미를 넘어서 현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일종의 내시경으로 간주했다. 아파트를 알면 오늘 한국 사회의 특성과 추이가 보인다는 예단에서다. 우리 시대 한국 사회의 영욕은 물론, 희노애락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혁명의 여파로 귀족계급이 몰락하면서 그들의 대저택 역시 주인을 잃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러한 틈바구니를 비집고 새로 성장한 도시 중산층이 귀족의 대저택을 아파르트망별로 나누어 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오늘날 아파트의 기원이라고 한다. "

"르 코르뷔지에는 도구로서의 주택 개념을 제안하면서 주택을 '거주용 기계'라고 정의했다. 하지만 그는 거주용기계로서의 주택이 건축행위를 통해 궁전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않았다. "

"아파트가 도시생활의 전형적인 주거형태로 자리 잡았지만, 물론 도시 사람들만 아파트에 살고 도시 사람들만 아파트를 좋아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농어촌 지역에서도 아파트거주 인구는 계속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웬만한 읍면 소재지치고 고층 아파트 몇 동 들어서 있지 않은 농어촌 지역은 이제 찾아보기 어렵다. 그런 아파트를 흔히 '논두렁 아파트'혹은 '밭두렁 아파트'라고 부른다. 주변 외관이나 풍광은 아랑곳하지 않고 저혼자 높이 솟아 있다는 뜻에서 '나 홀로 아파트'라고 불리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나홀로 높아진 아파트가 아름다운 농촌 풍경을 망친다고, 가끔 농촌을 찾는 도시인들이 불만을 토로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항변은 "우리가 시골에 산다고 아파트에서 살지 말라는 법이라도 있느냐'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떠도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농촌에 노총각이 많은 이유도 현대적 주거양식인 아파트가 적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

"한국의 중상층계급에게 있어서 아파트란 단순한 주거공간의 의미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자신들의 신분이나 지위를 세상 밖으로 드러내고 보여주는 '과시적 소비'의 대상이다. 서구사회의 전통적 상류계층에게 있어서 문화자본은 상속이나 학력 등을 통해 지식이나 교양, 기능, 취미, 감성 등이 체화된 상태를 의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그것은 급조가 불가능한 것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숙성되는 경향 때문에 보통 사람들이 쉽게 흉내 내거나 범접하지 못하는 그 무엇이다. 이에 반해 최근 수십 년 동안 국가주도 압축성장과 동반 성장한 한국의 지배계급에게는 그와 같은 온축과 내공을 갖춘 문화자본이 없다. 역설적으로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하여 그들은 자신들의 지위왕 신분을 대외적으로 표현하는 일이 보다 절박한 것이며, 이때 특정 지역 내 고급아파트 집단 거주야말로 그것의 가장 효과적인 수단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기 쉽다. "

"1990년대까지도 소설가 이외수는 아파트를 "인간 보관용 콘크리트 캐비넷"이라고 핍박할 정도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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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10-12 1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일산이지만, 끝자락인지라 앞뒤로 우리 마을 빼고는 논밭이예요.
결국 농지를 점령해나가는 과정에 있는 아파트들인거죠.
공기가 좋아서 좋아라 하지만, 한번씩 비료(?) 냄새가 진동을 하죠.

음, 페이퍼를 읽다보니
제가 참 위선적이구나 그런데 어떻게 해결을 못 할거 같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대단위 아파트가 사실 살기 편리하거든요. 정원있는 집을 꿈꾸지만,
단독 주택이 무섭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제가 자연을 갉아먹는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자각을 하면 또 그것대로 심란하구요..........

인간으로 산다는게, 항상 부조리의 연속같아요. 그래서
더욱 따스한 시선을 유지해야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쉽지 않더라구요. ^^

icaru 2011-10-12 15:48   좋아요 0 | URL
ㅎㅎ 맞는 말씀야요!
부조리할 수밖에 없죠.
환경생물학적으로는 아파트라는 콘크리트 더미들이 끼치는 오염과 파괴가 만만찮다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요. 참, 주거 문제라는 게 부동산이라는 재산가치와 맞물려서도 그렇고 많은 화제거리를 갖다 주네요...
뭐니뭐니해도 일상은 단순하고 쾌적해야...
노후에는 전원 생활을 꿈꾸기도 했었거든요. 그럼 다들, 아플 때 병원 가는 것도 그렇고, 불편한 점이 많아 되려 나이들수록 도심으로 나와 살아야 한다고들 말해요~

어찌 살게 되려나 그때 되어봐서 대책이 나올듯 하긴 해요 ㅎㅎ


 
하루 15분 책읽어주기의 힘 - 아이의 두뇌를 깨우는
짐 트렐리즈 지음, 눈사람 옮김 / 북라인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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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에게 이 책은 또 하나의 육아 바이블과 같은 책이다. 

저자는 많은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은 그들의 부모와 선생님께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부모들과 선생님들에게  "아이들에게 읽는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책을 읽고 싶어하도록 가르치는 것에 있다. 교육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사랑하고 소망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무엇을 배우도록 하는 것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이다." 라는 사실을 고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비를 들여 이 책을 썼다고 한다. 자비를 털더라도 책 읽어주는 효과와 방법적 측면에 대해 많은 부모 및 선생님들과 나누고 싶어 하며 썼을 저자를 생각해 보니, 문장 하나하나가 더욱 절실해진다.

사실 책 읽어주기의 목표는 아이들의 성공이 아니라 아이들에 행복에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자신을 최고로 사랑하는 부모님께서 따뜻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얘기를 들으며 "불행하다"라고 느낄 수 없는 것 아닌가? 하는 점.


"책을 읽어 주는 것은 신동이나 영재를 만들려는 것이 아니다. 아기에게 책을 읽어 주는 진정한 목적은 아기 안에 이미 있는 잠재력에 양분을 주고, 부모와 아이 사이를 친밀하게 묶어 주며, 아기가 자라나 책 읽을 준비가 되었을 때 아이와 책 사이에 자연스러운 다리를 놓아 주는 것이다. "

"중산층 가정의 엄마와 아이를 10개월간 관찰한 결과, 연구진은 엄마가 아이에게 사물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경로의 75퍼센트가 책을 통해서이고, 아이의 응답을 바로잡아 주거나 긍정해 주는 것의 81퍼센트도 책을 통해서임을 밝혀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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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 장정일 단상
장정일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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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 생각이 변해 간다 혹은 굳어간다, 혹은 나이를 먹는 증거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다음과 같은 점들 말이다. 장정일의 독특한 생각과 라이프 스타일에 어떤 것은 궤변 이상으로는 의미를 부여하기가 힘든 것, 내가 장정일 마누라였다면 1년도 못 채우고 이혼했겠다 싶은 것. 

그러니까 전에는 이 정도는 아니었고, ‘괴짜구나, 파격미가 있구나, 발상 재밌구나’ 뭐 이랬었다는. 그럼에도 옮겨온 구절들...

"해변가의 모래밭에서 햇볕을 쬐거나 물장구치기, 산에 올라가서 맑은 공기를 마시는 거나 절 구경을 하는 것, 강아지나 고양이와 뒹굴며 순수한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 맛있는 음식이나 술을 마시며 담배를 피우는 것, 공원의 벤치에 누워 햇빛에 물든 나뭇잎의 변화무쌍한 푸름을 즐기는 것, 낯선 여행지에서 낯선 사람들과 어울리며 이야기하는 것, 분홍신을 구해 신고 전신에서 힘이 빠져나갈 정도로 춤을 추는 것,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도록 세 끼 식사를 걸러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긴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온종일 입맞추는 것 등등. 음악은 좀 다른 경우에 속하지만 책이나 영화에서 훔치고자 하는 즐거움은 앞서의 즐거움을 대신하는 빈약한 대체물일 따름이다. 열거한 즐거움들을 이웃과 함께 나누거나 다른 사람들도 누릴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면 좋겠지만, 확고한 원칙과 각오만 되어 있다면 철저히 개인적으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본다. 오직 개인적인 만족과 즐거움만을 위해 주위에 눈을 돌리지 않고 사는 일이, 민족과 국가의 이름을 빌어 개인적인 사욕을 키우는 사람들보다 더 신뢰가 간다."

"마빈 해리스라는 꽤 저명한 인류학자는 <음식문화의 수수께끼>라는 책에서 ‘당신이 무엇을 먹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할 수 있다.’고 장담을 한 바 있다. "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어 왔지만, 나에게 영화란 명확하게 규정된다. “두 번 본 것”만이 영화다. 한번 보고 만 것은 영화가 아니다. 그것은 길거리에서 우연하게 목격하게 된 교통 사고와 같은 것. "

"또 다른 탈주의 방법으로서 수면의 리듬을 바꾸는 것은 사회적 고립의 가장 중요한 수단 들 가운데 하나이다. 우리의 내적 시계는 취침과 기상 시간에서 조금의 변화밖에 용납하지 않는 커다란 규칙성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거나 단계가 늦는 경우, 일상적으로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 이때 몇 시간 앞서거나 늦는 것이다. 단계가 앞선 것은 20시나 21시로 잠을 앞당기는 것에 해당하는데, 이것은 오히려 사회 질서에 극도로 순응하거나, 삶의 어려움에 복종하거나, 아니면 잠속으로 도피한다는 징후이다. 반대로 단계가 늦는 것은 밤을 지새우며 밤에 어떤 활동을 추구하고, 매우 늦게 또는 새벽에 잠자리에 들고 낮에 잠을 자는 것으로 표현되는데, 이것은 사회 생활의 리듬과 양립하기가 어려울 뿐이다. 단호한 의지나 어떤 필요성에 의해 많은 창조자들이 영감을 되찾기 위해 밤의 침묵이나 불면의 순간을 이용하여  단계의 늦음을 나타낸다. (...) 평생 고용주의 노예로 살기로 작정한 사람만이 일찍 일어난다.

       - 천재와 광기, P브루노(동문선) -

"핸드폰에 벨소리로 저장해 놓는 음악들은 모두 잡음이다. 사람들은 그걸 잘 모른다. 그게 어떤 것이건, 그게 음악으로 들릴 리가 없을 게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음악을 잡음으로 만든다. 대체 그 잡음들을 들려 주면서, 당신은 당신이 어떤 사람으로 비쳐지기를 원하는 거야? 나는 뚜~뚜~뚜~ 하는 단순한 신호를 좋아한다. 그 계측 가능한 신호음은 음악을 똥으로 만들지도 않으며, 당신에 대해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을 용납하지도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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