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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처럼 - 우리시대의 지성 5-016 ㅣ (구) 문지 스펙트럼 16
다니엘 페낙 지음, 이정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린 정말로 아이가 걱정스러웠다.
어찌나 걱정스러운지 시도 때도 없이 내 아이를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시시콜콜 비교하곤 했다.
뿐만 아니라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둔 친구 아무에게나...가 아닌, 학교 성적이 뛰어나며 죽어라고 책만 읽는다는 아이를 둔 친구에게 자문을 구해보기도 했다.
귀가 잘 안 들리나? 독서 장애가 아닐까? 아예 학교를 안 가겠다고 하는 거나 아닐까? 저러다가 영락없는 학습 지진아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별의별 검사를 다 해보았다. ...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둔해서일까?
단지 둔해서일 뿐이라고
아니다. 아이는 그저 자신의 리듬을 따라가고 있을 뿐이었다. 그 리듬은 다른 아이들과 반드시 같아야 한다는 법도, 평생을 한결같이 언제나 일정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 아이에게는 저마다 책읽기를 체득해나가는 자신만의 리듬이 있다. 때론 그 리듬에 엄청난 가속이 붙기도 하고, 느닷없이 퇴보하기도 한다. 아이가 책을 읽고 싶어 안달을 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포식 뒤의 식곤증처럼 오랜 휴지기가 이어지도 한다. 거기에 아이 나름대로의 좀더 잘 하고 싶다는 갈망, 해도 안 될 것만 같은 두려움까지 감안한다면....
교육자를 자처하지만, 실은 우리는 아이에게 성마르게 빚 독촉을 해대는 고리대금업자와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얄팍한 지식을 밑천 삼아, 서푼어치의 '지식'을 꿔주고 이자를 요구하는 격이다.
되돌려 주어야만 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될 수록 빨리! 그렇지 않으면, 누구보다 바로 우리 자신부터 의심해보아야 할 것이다.
-60쪽~61쪽쪽
학생 여러분, 우리가 처음 문학에 끌리기 시작하는 건 한낱 단어 나부랭이나 문장 때문만은 아닙니다. 문학이 어떻게 우리의 삶 속에 스며들기 시작했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야기의 시대는 그 옛날 기억마저 아스라한 시절, 갓난아이를 어르고 재우는 자장가를 그만둘 즈음부터 벌써 시작됩니다. 아이는 젖을 빨 듯 이야기를 빨아들입니다. 그러곤 그 경이로운 이야기들의 세계가 끝없이 되풀이되며 이어지기를 요구합니다. 아이는 냉철하기 그지없는 훌륭한 독자입니다. 나 또한 그 하고많은 마법사며 괴물, 요정 따위를 끊임없이 지어내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쳐야 했는지 모릅니다.
-68쪽쪽
아이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한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가 엿가락처럼 늘어난다. '책' 속의 낱말들이 워크맨의 이어폰 사이에서 춤을 춘다. 아무런 감흥도 없다. 한 자 한 자가 납덩이처럼 무겁기만 하다. 낱말들이 안락사를 당하는 말처럼 차례로 쓰러져간다. 전열을 가다듬는 드럼 연주로도 죽어가는 낱말들을 소생시키기엔 역부족이다(설령 드럼연주자가 그 유명한 켄들일지라도!). 낱말들은 의미를 반납하고 평이한 글자들의 세계로 돌아갔다. 낱말들이 눈앞에서 무참히 쓰러져가건만 아이는 겁날 게 없다. 오직 앞으로의 전진만이 있을 뿐이다. 읽는 것만이 자신에게 유일하게 주어진 당면과 제이자 의무이므로.
-p.81~82쪽
살아가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우리를 짐승이나, 야만인, 일자무식의 무뢰한 광포한 광신도ㅡ 자기 도취에 빠진 독재자. 탐욕스러운 배금주의자들과 구별짖는 것이 책을 읽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서의 절대적 필요성이다. 그러니 책을 읽어야 한다. 기필코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배우기 위해서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지식을 쌓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디서 왔는지 알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알기 위해서
·타인들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 인간이 어디로 가는지 알기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간직하기 위해서
·현재의 우리를 직시하기 위해서
·지난 시대의 경험을 활용하기 위해서
·선조들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서
·자신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우리의 문명을 이루고 있는 근원을 파악하기 위해서
·끝없는 호기심을 일깨우기 위해서
·기분 전환을 위해서
·교양을 쌓기 위해서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기 위해서
·비판 정신을 기르기 위해서
-p.92쪽
책 읽을 시간이 고민이라면 그만큼 책을 읽을 마음이 없다는 말이다. 따지고 보면 책 읽을 시간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책 읽는 시간은 언제나 훔친 시간이다(글을 쓰는 시간이나 연애하는 시간처럼 말이다).
대체 어디에서 훔쳐낸단 말인가?
굳이 말하자면, 살아가기 위해 치러야 하는 의무의 시간들에서이다.
(...)
책을 읽는 시간은 사랑하는 시간이 그렇듯, 삶의 시간을 확장시킨다.
만약 사랑도 하루 계획표대로 해야 하는 것이라면, 사랑에 빠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군들 사랑할 시간이 나겠는가? 그런데도 사랑에 빠진 사람이 사랑할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경우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
독서란 효율적인 시간 운용이라는 사회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다. 독서도 사랑이 그렇듯 그저 존재하는 방식인 것이다.
문제는 내가 책 읽을 시간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그렇다고 아무도 시간을 가져다주지는 않을진대), 독서의 즐거움을 누리려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p.159~161쪽
입사 시험에서든 학교 시험에서든, '이해한다'란 말의 의미는 시험관이 수험자에게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해한다는 뜻이다. '제대로 이해한' 답안이란 그러므로 요령껏 타협을 본 답안이다.
(...)
그러므로 '열등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지극히 정상적인 보통의 아이일 경우가 허다하다. 단지 전술적인 대처 능력이 결여되어 있을 뿐이다.
-p.175~176쪽
책을 끝까지 읽지 않을 권리
.....
한권의 소설책을 끝까지 읽어내지 못하고 던져버릴 만한 무려 36000가지의 이유들이 있다.
이를 테면 전에 어디선가 읽어본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다지 주의를 끌 만한 이야기가 아니라서, 작가가 주장하는 바에 전혀 동조할 수가 없어서, 혹은 닭살이 돋을 만큼 문체가 역겹다거나 반대로 더 이상 읽어나갈 이유를 찾지 못할 만큼 문체가 진부해서라는 둥. 이유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책이 우리의 손에서 떨어져나간다면?
그것으로 그만이다.
어쨌거나 제아무리 몽테스키외라한들, 마음에도 없는 책을 억지로 1시간씩 읽어가며 마음의 위안을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일테니 말이다.
하지만 읽기를 포기하는 숱한 이유 가운데 한 가지만은 좀더 시간을 들여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어렴풋이나마 패배한 느낌을 받아 책을 다 읽지 못하는 경우이다. 책을 펼쳐 들고 읽기 시작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나 자신보다 완강하게 느껴지는 무언가에 의해 점점 밑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 위대한 소설이 쉽게 읽혀지지 않는다고 하여 그 소설이 반드시 다른 소설보다 어려운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책과 -제아무리 위대한 소설이라 할지라도- '이해'할 수 있는 지적 소양을 충분히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우리들 사이에 모종의 화학적 반응이 일어나지 않았을 뿐이다.
-p.203~ 205쪽
소설은 그냥 소설로, 소설처럼 읽어라.
아이들은 다들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혹은 무엇이 되어가는 과정들이다. 아니 어른인 우리도 언제나 나 아닌 다른 무엇이 되는 꿈을 꾸며 살아간다. 책은 그런 우리의 꿈을 은밀히 부추기고 공모하는 동반자의 역할을 해 줄 따름이다. 그러니 어떻게 그것을 우격다짐으로 강요할 수 있겠는가. 그래서 ‘읽다’는 ‘사랑하다’나 ‘꿈꾸다’처럼 명령문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책과 담을 쌓은 아이들을 위해서 구체적인 방안 하나를 우리에게 던져 준다.
-역자후기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