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작가 ‘갈 데까지 가본다’ 하는 마음으로 소설을 쓰는게지?
어머니는 같고, 아버지가 다른 두 인물이 주인공이다. 이들은 마치 헤르만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처럼 동생(미셀)은 성욕을 완전 배제한 이성의 최정점에, 형(브뤼너)은 지나친 육욕의 추구라는 다른 한 끝에 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존재는 미약하고, 마취과 의사인 엄마(히피들의 꽁무니나 쫓는)에게 거의 버림받다시피 해서 각각의 할머니에게 키워졌다.
주인공 특히 형(브뤼너)를 통해 포르노는 널렸으나 사랑은 없는(그는 그저 젊은 여자의 몸에만 목매달 뿐) 세대의 파멸을 보여주는 이 소설은 성적 해방을 주도한 68년 혁명 세대를 비판하는 책이다.
브뤼너는 40대인 또래의 이혼녀를 ‘변화의 장-뉴에이지풍 캠프장’에서 만나고 드디어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결국 그녀는 무리한 파트루즈(그룹섹스-같은 역자가 번역한 ‘카트린 M의 성생활’이 생각나는 부분) 중 하반신 마비의 장애를 얻게 되고 자살한다.
미셸은 또 어떻고.
“인류는 이제 자기 자신을 다른 종으로 대체하는 상황을 스스로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일은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에서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인류는 스스로를 소멸시키고 다른 종으로 거듭 태어나는 최초의 동물 종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점을 자랑스러워하게 될 것입니다.”
원자, 분자 등의 소립자들은 그 자체는 생성 소멸하지 않지만 구성과 배열이 달라지면 물질이 달라진다. 이렇듯 뛰어난 능력을 지닌 미셸 같은 소수가 앞줄에서 인도하면서 인류는 자신 스스로를 분해, 재조립하여 새로운 종을 탄생시킨다는 것인데.
정말이지, 형과 아우를 섞어서 절반으로 나눌 수 있다면, 미래는 암울하지 않을 것이다.
청소년기에 미셸은 삶의 부조리나 실존적인 절망이나 일상의 어찌할 수 없는 공허함을 주제로 한 소설들을 여러 권 읽은 바, 순수한 도덕이나 유일하고 보편적인 어떤 것과 같은 거대 담론과 학문에 집중하는 인물이고, 형은 욕망, 섹스, 몸 같은 미세적이고 말초적인 것에 매몰된 사람인데, 이 둘이 씨줄과 날줄처럼 교직을 이루며 진행하는 이야기 방식이다.
여기서 작가는 브뤼노를 세상에 하나쯤 있을 법한 한낱 개인으로만 바라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제목 “소립자”가 탄생했다. 그의 기관들이 썩어 가는 것 즉, 늙는 것은 그의 몫이다. 그러나 그의 쾌락주의적 인생관이나 그의 의식과 욕망을 구조화하는 힘은 그의 세대 전부에 속한다. 브뤼노를 일종의 역사적 흐름의 수동적인 요소의 하나 정도로 파악한 것이다.
영국인 캐릭터에 대한 소설 후반부 내용
" 대체로 영국인은 냉정하고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 라고, 사물의 아이러니한 측면을 (심지어 비극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사람들이라고들 합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죠. 왜냐면 아이러니는 사람을 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유머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수년 혹은 수십 년쯤은 아이러니라는 잣대로 인생을 이해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릅니다. 거의 언제나 생의 유머러스한 측면만을 보며 살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인생은 여지없이 고통을 안겨줍니다. 아무리 용감한 사람도, 아무리 침착한 사람도 아무리 유머 감각이 있는 사람도, 마지막 순간에는 고통에 휩싸입니다. 그 순간에는 웃음을 잃고 말지요. 그러고나면 추위와 적막, 고독만이 남습니다. 어쩌면 당신은, 그러고 나면 죽음만이 남는다고 할지도 모르겠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