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고 싶은 사람 있을 때, 불운한 일들이 겹쳐서 일어날 때,

난 꼭 그럴 때만 쓰고 싶은 욕구가 샘솟는다.

욕하고 싶었던 사람을 객관적으로 낱낱히 해부하여 그 사람에 대한 섭섭함과 일말의 오해를 희석시키고, 불운한 일들을 구구절절하소연 하면서 그러했으나 이젠 좋아질 거라고 주문을 거는 모양이다. 페이퍼로 쓰면서 말이다. 

 나는 월요일부터 수요일까지 3일 병가다. 백발마녀 차장님으로부터 어렵사리(말을 떼는 게 어렵지, 그 이후 절차는 일사천리~) 오케이 사인 받은 병가.

목요일날 출근할 때, 병원에서 만원 주고 발급받은 전치 2주 진단서를 총무부에 제출하면 병가는 간단하게 절차를 마치게 된다. 차장님은 쉴 때 확실히 쉬라며 입원을 그리고 일주일 이상의 휴가가 어떻겠냐고 권하시더라. 많이 흔들렸지만 4월말 하판 앞두고 있는 이 시국에 팀원들의 원성어린 눈길도 심히 밟히고, 그래 내맘도 편하지 않을듯하여 절반 3일 병가다.  

 오늘의 불운한 일 퍼레이드는  이렇다.

어제 일찍 잠들었음에도 오늘 눈을 뜨니까, 9시였다. 새벽에 건이가 느닷없이 우는 바람에 일어나서 토닥이고 분유 타 먹이고 했던 일 때문이었을까? 그것도 이유가 된다면.... 아무려면 어떤가 출근 준비로 서두를 일도 없는데. 그러나 집앞에서 어린이집차가 9시 20분에 찬이를 데릴러 오는데, 그 때까지 준비를 마치지 못할 거 같아서 유치원에 전화를 했다. 오늘은 찬이 차량 등원 안 하고 직접 데려갑니다.

그러나 9시 20분이 되자, 기사 아저씨와 선생님이 연락을 못 받은 모양. 크락션을 빵빵거리고 하기에, 수첩 뒤져서 차량 핸드폰으로 전화를 해서 오늘 안 탄다고 다시 말하고 돌아서는데, 찬이가 쉬아가 마렵다며 발을 동동 구른다.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남방 가슴 주머니에 넣고 아이 쉬아시키다가 그만 세수물 받아놓은 대야에 핸드폰을 퐁당 한거다. 신속하게 밧데리를 분리시키고, 드라이로 말려 줬어야 하는데 정신나간 아침 시간에 찬이 등원 준비시킨다고 마저 씻기고, 하는 와중에 회사에서 전화가 온거다. 

 전화를 받고, 여보세요~ 나는 상대의 목소리가 잘 들리건만,,,,,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가보다. 핸드폰이 고장난 거지. 집전화로 회사에 전화를 하니, 같이 일하는 대리가 암울하게 탁한 목소리로 "큰일났다"고 하는거다. 

 인쇄 사고다. 3학년에서 과목명과 학년이 들어가는 맨 첫장이 백지로 나가게 생겼다. 그 페이지가 백지로 나간다고 애들이 책보고 공부하는데 하등지장 없고, 그 페이지가 아녀도, 표지에서 표2에서 속표지에서 이 책이 뭐고 몇 학년인거 다 나오니까.... 그래도 책이 좀 우습긴 할 거다. 

 잘잘못을 가려 뭣하나 내 불찰이다. 디자인 표지팀과 확실하게 의사소통을 하지 않은 불찰, 제작부와 제판실 부장님께 직접 말씀드리지 않은 불찰( 그 페이지만 뒤늦게 디자인 표지팀에서 작업이 되어서, 표지팀에서 제작부에 직접 넘기기로 말이 되었다가, 내가 1학년 화면 보러 외근 중인 사이 우리 조판소에서 작업해 내리고 했었던거다. 그래서 늦게 나온 그 페이지를 같이 일하는 대리에게 대신 제판실에 내려 달라고 했고 나는 병가를 냈지.) 그 친구는 제판실 부장님에게도 다 이야기가 된 줄 알고, 제판실 부장님이 자리에 안 계시니 그냥 자리에 내려 놓고 온 것이고. 

 그때부터 사정없이 뒤골이 땡기고 머리에서 딱따구리가 콕콕 쪼기 시작하면서 은근하게 허리 통증과 다리 저림이 시작되었다. 눈앞에 산적한 해결해야 할 과제 중. 무엇부터 해야 할까? 일단 찬이부터 유치원에 데려다 준 다음, 나머지 일을 처리하자는 생각에 아이 손을 잡고, 집을 나서는데, 아이가 유치원 차를 타고내리는 집 근처 바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질 않으며, 차를 타고 갈 거라고 고집을 부리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입속에 혀같이 착착 안기는 맛도 있는 아이인데, 하필이면 이런 날. 영문을 알 수없는 떼부림. 정말 네 머릿속에 들어가 네 생각을 일일히 헤아려 주려 하는 엄마 마음 십분 그 이상임에도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그 고집....

우리가 늦어서 유치원 차가 먼저 갔다고 해도, 타고 거야 한다는 거다. 어르고 달래며 용케 유치원 현관 앞에 도착했는데, 집에 도로 가겠다며 대성통곡을 하는 아이. 거의 억지로 담임 선생님에게 떼매어 주며, 엄마가 교실 앞에서 서 있을께 라 하며 선생님과 아이가 교실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버스 정류장 쪽으로 향했다. 핸드폰을 손봐야 하니까. 평소에 버스를 타며 출퇴근길에 봐 두었던 핸드폰 서비스 센터가 서울대입구쪽에 있었다는 기억을 더듬어 찾아가기로 했다. 버스를 타고 세정거장에서 내렸다. 우쒸 한정거장 더 왔다. 거슬러 걸어 올라간다. 드디어 도착. 저 멀리 입간판이 보였다. 건물 근처까지 걸어 갔는데, 도통 입구처럼 생긴 곳이 아리까리. 스포츠 맛사지 해 준다는 층만 크게 입구표시를 해놓고, 건축 자재 같은 건이 건물 1층에 널부러져 있는 것도 불길... 2층이라고 표시되어 있길래 가보니, 입구에 "3월 30일부로 폐점합니다. 구로점과 삼섬점을 찾아 주세요."

 

검색 좀 하고 와 볼걸,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냐....!  

갑자기 허리와 꼬리뼈가 시끈시끈...

금방 좌절모드로 바뀐 나는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정류장으로 세 정거장이나 되는 집쪽으로 하염없이 걷고 있더라. 집 근처 병원에서 1시간여 물리치료를 받고, 집에 돌아오니 시간은 12시 30분을 향하고 있었다.

엄마가 기운없는 목소리로 내가 나가고 바로 회사에서 전화가 왔었다고 전하신다. 아침부터 춥고 목구멍이 아프시고 입맛도 똑 떨어지셨다고 하시는 엄니는 느닷없는 감기의 방문에 컨디션이 속절없이 다운되신거다.

 

(이러니까 내가 불행은 겹쳐서 온다고 말하는 거다. )

 

회사로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세상에 국어부에 인원이 40여명인데, 우리 팀원 없으면, 다른 데서 내선으로 땡겨 받기라고 해야 할 것 아닌가.

기억을 잘 더듬어 보니, 오늘 5일부로 신입사원이 6명 입사한다고 했는데, 점심 환영 회식이 있는 모양인기라. 그래서 1시가 넘기를 기다렸다가 회사에 전화해서 대리와 후속 처리 문제를 논의하고, (후속 처리랄 것도 없다. 3학년은 인쇄가 이미 끝났다고 한다. 그러니까 일은 되돌릴 수 없는거다.) 내 책임으로 일어난 사고니까, 시말서를 쓰든 사직서를 쓰든 책임도 내가 지고, 차장님께 보고도 내가 드리기로 했다. 일이 생기면 집전화로 연락 달라고 했다. 그러고 나자, 이 친구의 목소리가 조금 기운을 차리는 듯.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음식에 대해서 아무 생각 없기도 오랜만이다. 목이 유난히 뻣뻣하니 뻐근해질 때 동반하는 것이 있는데, 속이 울렁~ 하는 증상이다. 속시끄러운 일들 투성이인지라 입맛도 딱 떨어지고.

 

하지만 약을 먹어야 하니까 몇 술을 떠 본다. 이제 삼성역 1번 출구로 나와 미래에셋생명 건물 1층에 있다는 핸드폰 수리 고객 센터를 찾아가 보기로 한다. 그런데 지하철 타고 갔다고 오기 싫다는 생각이 드는거다. 그러니까 내가 어떤 사람이냐면, 구로 애경백화점에서 산 남편 가디건이 사이즈가 맞질 않아서 바꿔야 하는데, 2호선 타면 분주한 신도림역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구로역에 갈 일이 깝깝스러워서 집앞 버스 정류장에서 서울대입구 방향으로 가는 아무 버스 잡아탄 다음, 서울대입구 역에서 내려 20여분 기다려 (배차 간격도 참 지랄같지 공항버스 라니깐 뭐...) 6003번 공항버스로 다시 갈아타고 구로역에서 내려 애경백화점 찾아간 위인이지.

마침 근방에서 근무하는 남동생에게 전화를 해서 네 회사 근처 갈 건데, 한번에 가는 버스는 없을테고, 갈아타고 갈 수 있는 버스가 있냐고 묻자,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노선을 바라냐는 듯 없다고 모른다고 하네. 근처 가면 잠깐 얼굴은 볼 수 있냐고 물으니, 외근이라 하네.

 
핸드폰을 맡기고, 역에서 지하철이 오기를 기다린다. 정신이 안드로메다로 외출중인데다가 어깨통증이 허리와 발끝까지 찌릿찌릿한 것에 대해 몹시 신경 쓰고 있던 와중이었다. 하여 몸에 밴 감각에 따라 발길 닿는대로 걷고 들어오는 지하철에 몸을 실었을 뿐인데, 어느덧 정신을 차리고 보니 집과는 반대 방향인 종합 운동장역이더라. 이제 이 정도 되면, 헛걸음 헛수고는 그냥 애교라고 생각되는 경지라 나오느니 헛웃음이다.


집에 돌아왔다. 건이는 자고 있다. 엄마가 몸이 많이 힘드신지 기운없는 창백한 얼굴로 누워 계신다. 아이가 잘 때가 유일하게 나를 위한 차 시간을 갖을 수 있을 때다. 게다가 오늘은 힘들었잖아. 얼른 믹스 두 개를 털어넣고 머그컵에 물을 잔뜩부어 과하게 커피를 타 가지고 책상 앞에 앉고, 노트북을 켠다. 커피를 채  두 모금도 마시지 않았는데, 잠에서 깨어난 건이가 기분이 좋은지 벙싯거린다. 아이에게 달려간다. 부비부비 하고 어쩌고 하다가, 아침에 아이 등원시킬 때 서랍칸에서 아무렇게나 빼놓은 옷들 마른 빨래들이 너저분하여 그거 정리하다보니, 누워 계시던 엄마가

"쟤 컵들고 저방(컴퓨터 방)에서 뭐하는 거라니?"

하........   


책상과 방바닥이 커피로 맛사지를 제대로 받는 와중이었던 거다.  조금만 늦었어도, 노트북 마저 에이에스 맞길 뻔... 

 
건이의 요즘 일과 중에 하나다. 식탁이나 책상위에 있는 것들 장님 코끼리 만지는 손 쭉 뻗어 더듬더듬해서 다 내려놓고 내용물 쏟아내기. 지난번에는 식탁위에 올려둔 조림 반찬 그릇을 내려서 방바닥에 쏟아놓고는 철벅철벅 손으로 절구질을 하더라.  

 
5시가 조금 지나서 찬이가 유치원에서 돌아왔다. 오전에 유치원 현관앞에서 '오늘 잘 놀면, 장난감 트럭 사 준다'고 순간 면피용으로 귓속말 했었는데, 그 때는 시끗도 안 하더니만, 날 보자마자

"엄마가 이따가 장난감 트럭 사준다고 그랬죠오~?" 하며 확인하는 거다. 무서운 녀석.

'일단 밥먹자.' 하니까. " 밥 잘 먹어야 엄마가 사주는 거죠오~?" 하며 끝을 길게 늘이는 말투다.  

밥 다 먹고 나서 장난감 언제 사러 가냐는 채근을 견디기 어려워, '응 설거지 다하고~ '

설거지 다 한다음에는 방책이 안 떠올라 "찬아, 우리 아빠 마중 나갈래?" 라고 물으니, 좋다고~ 트럭이고 뭐고 다 잊어버린 눈치.... 

버스정류장으로 아이 아빠마중을 나갔다. 그 시각이 8시 30분쯤.... 조금 있으니, 아빠가 9번 버스에서 내린다. 그냥 들어가기 아쉬워 하는 내 눈치를 헤아린 걸까, 오늘 정신없고 의기소침했노라 전화 통화로 했던 말들이 걸렸던 걸까. "우리 시장 갈까?" 하는 남편. 

돌아오는 길에, 보드람 치킨 집에서 (헉,,, 저녁에 삼계탕 해 먹었거늘) 아이와 두 내외 후라이드 반마리 뜯고 생맥주 한 잔씩 걸쳐 주시고.... 남편 님 왈

"아무래도 너 조만간 그만 두는 게 좋겠다." -그럼 이렇게 시간적인 여유도 더 부리며 살 수 있지 않겠냐는 문맥의 말인듯- 그 말에 만감이 교차하는 나.

다사다난 했던 하루였지만 마무리는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 찬이도 예의 그 장난감을 득템하고야 말았고, (트럭이 아니라 뽀로로 불자동차라고 편의점에서 파는 9000원짜리로 쇼부쳤다.) 내 꿀꿀함을 헤아려 준 남편이 고마웠다. 

남편으로 말하자면, 요즘 부쩍 피곤해하고 늘 제자리이던 몸무게 마저도 빠지는 거 같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을 하던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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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icare 2010-04-06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입산수도?
사바세상이 곧 도 닦는 곳이지요.^^
힘내시고!

icaru 2010-04-06 22:21   좋아요 0 | URL
ㅎㅎㅎ 작년에는 눈물 쏙빠지게 힘들어서 올해는 괜찮겠지 했는데, 아휴~ 언제나 경지에 오를지요~

춤추는인생. 2010-04-06 1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카루님 이게 얼마만인가요?^^
밥 잘먹어야 엄마가 사주는 거죠오..~~ 와.. 찬이가 벌써 그렇게 컸나요 이카루님.?ㅎㅎ
전 아직도 가엾게 울던 찬이의 이미지가 지워지질 않네요.ㅎㅎ 정말 힘겨운 하루이지 않았나 싶어요. 이카루님 수고하셨습니다.
참 찬이동생 건이도 보고싶어요...^^

icaru 2010-04-06 22:2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찬이는 이제 좀 커서 저랑 툭탁툭탁 할 지경이죠.
제가 비교적 점잖은 사람인데, 아주 도발을 시킨다고나 할까요.
건이는 무던한듯 하면서 말썽쟁이예요. 생김새는 곰돌이 같은데, 하는 짓은 생쥐라... 딱 곰쥐...

프레이야 2010-04-07 18: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욕해주고 싶은 사람, 저도 오늘 있는데
정작 그래주진 못하고..ㅠ
미안하단 말도 옆구리 찔러 억지로 받고 참 어이없어요.
출판사 여직원이요.
이카루님 물리치료 잘 받으세요.

icaru 2010-04-09 10:49   좋아요 0 | URL
ㅎㅎ 지금쯤은 풀리셨나 몰라요.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상식과 교양의 양날인 혜경 님을 화나게 만들었다면, 그 여직원이 얼마나 어이없는 과실을 했는지는...
물리치료는 꾸준히 잘 받겠습니다~ 후유증 정말 무섭잖아요 ^^;;

순오기 2010-05-13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완전 머피의 법칙이 적용된 날이군요.

2010-05-13 20:44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