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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5월
평점 :
김남일 님의 작품을 하나도 읽은 게 없으니, 노동자와 농민의 현실을 그렸다는 작가의 작품 세계를 말할 순 없을테고, 그러나 이 책을 읽으면서 "작가의 “영혼의 앨범”을 먼저 들여다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일련의 정치 상황이라던지 하는 것과 맞물려 젊은 날 어떤 책을 읽었고 하는 부분(제2부)은 내가 그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작가가 하는 말을 오롯이 다 알아들었던 것은 아니고, 나에게 체화되는 부분도 덜 했지만, 제1부와 2부는 내게 의미가 있었다. ‘작가도 아니고 뭣도 아닌 나도 훗날에 저런 (성격의) 글을 쓸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는 책만 보자고 말하는 게 아니다. 일테면 다음과 같은 구절.
소로는 월든에서 “ 필요하다면 강에 다리를 하나 덜 놓고, 그래서 조금 돌아가는 일이 있더라도 그 비용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보다 어두운 무지의 심연 위에 구름다리 하나라도 놓도록 하자.”
를 인용하면서 그는 ‘구름다리’가 비단 ‘책’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 거라고 말한다. 소로는 책을 하나의 언어로 생각했고, 우리가 ‘책’으로 대변되는 하나의 언어에만 몰두하면 다른 언어를 잊어버릴 공산이 크다고 경고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른 언어는 무엇일까?
“ 나는 내 인생에 넓은 여백을 갖기를 원한다. 어떤 여름날 아침에는 이제 습관이 된 멱을 감은 다음, 해가 잘 드는 문지방에 않아서 해띁녁부터 정오까지 한없이 공상에 잠기곤 했다. 그런 나의 주위에는 소나무ㅡ 호두나무와 옻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으며 그 누구도 방해하지 않는 고독과 정적이 사방에 펼쳐졌다. 오직 새들만이 곁에서 노래하거나 소리없이 집안을 넘나들었다. 그러다가 해가 서쪽 창문을 비추거나 또는 먼 행길을 달리는 어느 여행자의 마차 소리를 듣고서야 문득 시간이 흘러간 것을 깨달았다. 이런 날에는 나는 밤사이의 옥수수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 월든
바로 이것이었다.
215~216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은 헤겔의 미학을 계승한 루카치는 근대 시민사회에 대응하는 대서사 양식을 소설로 보았다. 그는 고대 사회에 대서사 양식인 서사시가 고대인의 삶을 선험적 총체성으로 그렸다면, 소설은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개인주의적이고 산문화된 일상을 나타내 준다고 했다. 다시 말해 소설은 자본주의 시대의 산물이다. 인간은 이미 ‘형이상학적 지붕’을 상실했으며, 이제 비가 와도 비를 그을 데가 없는 새로운 운명에 처해진다.
( ... )
책은 쉽지 않다. 나는 이 책을 스무 번도 넘게 뒤적거렸지만, 아직 한번도 통독하지 못했다. 그래도 자신 있게 이 책을 권하는 것은 이 책이야말로 유신독재와 광주 학살의 악몽 속에서 고통 받던 내 젊은 날의 영혼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때 내가 ‘소설의 이론’을 읽으면서 꿈꾸었던 총체성, 삶의 완벽한 총체성은 신자유주의와 닷컴의 압도적인 공세가 이루어지고 있는 지금, 정녕 꿈을 꾸는 것조차 불가능한 것일까.
223쪽 7째줄 오타
말하자면 소재주의적 차원에 머물고 있지 있다. -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