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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의 서재에서 - 우리가 독서에 대하여 생각했지만 미처 말하지 못한 것들
탕누어 지음, 김태성.김영화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2월
평점 :
내가 하는 행동 가운데 가장 의문으로 여겨지는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책을 원껏 곱게 읽기만 하면 될 것이지 왜 자꾸 끄적거리려 하느냔 말이다.
여러 가지 이유를 물론 찾을 수 있겠다. 첫째, 휘말되어 버리기 전에 여흥(문학의 경우는 감상, 비문학의 경우는 정보) 남겨 둔다는 것, 둘째, 이 책을 토대로 하여 생각의 단초를 확장해 보자는 것.
지금껏 남긴 글들을 읽어보면, 대부분의 내용이 첫째 이유에 속한다.
이 책에서 탕누어는 말한다. 책 읽는 사람은 글쓰기의 필요를 느끼지 않고 좀더 즐겁고 자유로운 독서에 전념하지만, 글을 쓰는 사람은 책을 읽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어야만 자신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독서와 글쓰기의 최종적인 관계이다.
나는 물론 공식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아니고, 단지 좀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은 발로에 의해 책을 읽을 뿐이긴 하다.
즐거움을 위해 독서에 전념한다고 말하기에 여전히 미진한 구석이 있다.
그러다가 겨우 혼자 생각해낸 결론이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책을 읽는 것도 무엇인가를 기록하는 것도 모두 시간을 보내는 한 방식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
내가 처리해야 할 많은 일에 우선순위를 매기고 그 중에서도 이렇게 읽거나 쓰는 일이 좋았기 때문에
쓰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이 순간 시간을 보내는 최적의 방식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것을 하는 것이다. 영화를 보기 위해 텔레비전으로 넷플릭스에 접속하기 시작하면 읽거나 쓰는 일은 그 직시 중지된다. 텔레비전이 가까이 있으면 내가 최고로 꼽는 시간을 보내는 방식은 '독서'에서 '시청'이라는 형태로 바뀌어 버린다.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면서 보내는 저녁 시간이 당연한 일상인 시절이 있었다는 케케묵은 과거를 먼지 속에서 소환해 본다.
그러나 저러나 요즘 내가 독서가 어려운 (신체적인) 이유를 둘러대기 딱 좋은 부분을 책 속에서 찾아내고 만 것이다. 옮겨와 본다.
마흔이 넘어 막 인생의 변환점을 돌았을 때 우리는 아직 늙는다는 것에 익숙해지지 못한 상태이고,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은 더더욱 불가능하다. 아무리 피곤하고 아무리 큰 병에 걸려도, 아무리 밤새도록 술을 마시면서 수다를 떨어도, 하루 푹 자고 나면 모든 것이 회복되지 않았던가? 각종 기관과 내장까지 전부 저절로 관리되지 않았던가? (...) 눈은 늙어가고 있는 모든 독자가 가장 큰 자극을 받는 부분이다. 어쩔 수 없이 글자 크기를 비교하게 되고 조명의 정도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 심지어 부유한생활을 누리는 사람처럼 책을 읽는 장소의 편안함까지 따지게 된다. 이리하여 독서는 더 이상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세를 잡고 힘들게 해야 하는 일이 되고 만다.